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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아트 Jul 24. 2024

② 탁류 문학기행 (2)

[군산 새만금 답사기]

채만식문학관

"낡은 맥고모자는 아까 벌써 길바닥에 굴러 떨어지고, 당목 흩두루마기는 안팎 옷고름이 뜯어져서 잡아 낚는대로 주엉뱅이처럼 펄럭거린다.



여보게 이 사람, 여보게!



보긴 무얼 보라고 그래? 보아야 그 상판이 그 상판이지 별것 있나? ... 잔말 말고 돈이나 내요?"(채만식, 탁류, 문학과 지성, 11페이지)



소설은 두 사람의 싸움으로 시작된다. 봉변을 당하는 사람이 정주사이다. 정주사는 서천 용댕이에서 전답을 팔아 군산에 와서 집을 사고 남은 돈 300원으로 미두를 시작해서 돈을 다 날렸다. 선물의 속성상 10프로의 증거금으로 거래를 하지만, 돈이 없이 거래한 것이 들통나자 젊은 친구에게 봉변을 당하고 있다.



호남의 곡창 지대에서 모아진 쌀이 장항선 이리역에서 분기하여 24킬로를 달려 이곳 종착역 군산항으로 몰린다. 이곳에는 금융 기관, 세관 등 식민지 경영을 위한 건물들이 즐비하다. 정주사는 미두장 앞에서 백주 대낮에 젊은이에게 멱살을 잡히며 망신을 당한다.

미곡취인소는 증강현실안내판이 설치되있다.



'속한(俗漢)은 미두장이라고 부르며 간판은 ‘군산미곡취인소(群山米穀取引所)’라고 써 붙인 도박장은 집이야 낡은 목제의 이층으로 헙수루 하니 보잘것없어도 이곳이 군산의 심장임에는 틀림이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가산을 날리는 곳 군산 앞바다는 가산을 탕진한 이들의 눈물로 얼룩졌다.



호남평야에서 생산되는 질 좋은 미곡 집산지인 군산항은 3천 톤의 대형 선박 세 척이 들어 올만큼 큰 항구다. 과거에는 전북 장수에서 발원한 금강을 통해 강경이나 논산에서 쌀을 실은 세곡선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뱃길로는 많은 미곡을 나르지 못하자 일제 강점기에는 더 많은 미곡들을 수탈해 가기 위해서 많은 물류를 개척했다. 육로로는 군산선 철길을 깔았다. 서해의 심한 조수 간만 차이에도 배가 쉽게 드나들도록 '뜬다리'까지 만들어 큰 배의 접안을 용이하게 했다. 일본 지주들은 추수한 미곡의 45에서 75프로에 이르는 소작료를 걷어갔다. 오죽하면 이곳 옥구에서 소작 항쟁이 있었을까? 1927년 11월 농사를 지어봤자 일본 지주들에게 곡식의 대부분을 빼앗긴 조선의 소작인들은 소작료 할인을 요구하며 농민 봉기를 일으켰다.



이것저것 떼고 나면 입에 풀칠조차 할 수 없는 조선 사람들은 일말의 기대를 품고 이곳 미두장으로 몰려들었다. 말이 '미두취인소'이지 공인된 도박장이다. 정주사도 5년 전 서천 용댕이의 가산을 팔아 군산으로 왔다. 집을 장만하고 부채를 갚고 남은 돈 300원으로 미두장까지 밀려 들어왔다. 겨우 백 원 단위로 투자하는 조선 미두꾼들은 구조적으로 이곳에서 돈을 벌 수 없었다. 정주사도 하루하루 가족의 끼니를 걱정하는 신세로 전락하였지만 마땅히 할 일이 없어 매일 이곳에 출근하다시피 한다.

군산미곡취인소자리

 



미곡취인소는 원래는 미곡의 품질과 가격을 표준화하기 위해서 설립된 시장이지만 실제로는 도박장과 다름없었다. 거래하려면 중매점에서 통장을 개설하고 매매를 해야 했다. 10퍼센트의 증거금만 있으면 거래가 가능했다. 가격 변동 폭이 클 때는 간혹 돈을 벌 수 있었지만, 그것은 자본을 쥔 소유자에게만 가능했다. '선물 거래'는 주식처럼 가격이 오를 때만 버는 것이 아니라, 내릴 때에도 잘 만하면 벌 수 있다고 선전하지만, 거꾸로 얘기하면 가격이 오를 때도 잃을 수 있고, 내릴 때에도 돈을 날릴 수 있는 위험성이 있었다. 군산보다 더 큰 미두장이 서는 인천은 '미두로 전답을 날린 사람들 한숨 소리로 인천 앞 바다가 파인 것이요, 인천 바닷물은 그들이 흘린 눈물이'라고 할 정도로 전국에서 몰린 미두꾼들의 지옥과 같았다. '정주사는 마침 만조가 되어 축제 밑에서 넘실거리는 강물을 내려다본다.'(탁류 22페이지)



그는 사실 미두에서 돈을 날리자 금강에 몸을 날리려고도 했다. 맘을 고쳐먹고 몸으로 힘을 쓰는 노동을 하려고 했지만, 몸만 망가졌다. 미두장의 가장 밑바닥인 하바꾼으로 전락했다.



이미 군산에는 군산미곡취인소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다. 낡은 건물들만 즐비한 군산항 초입의 이 근대화거리는 이미 쇠락할 대로 쇠락해져서 오가는 사람의 발길조차 없었다. 옛 건물을 리모델링해서 레트로한 감성을 자극하는 호프집이며 카페가 가끔 보였다.

조선은행군산지점

 



두 사람의 싸움을 말리는 조선은행 행원 고태수의 등장으로 싸움은 끝났다. 일제 강점기 조선은행에 근무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원래 서울의 조선은행에서 직원들의 심부름꾼으로 출발한 고태수는 직장 상사의 주선으로 이곳 군산 지점에 행원으로 내려왔다. 전문대학 졸업에 부잣집 자제로 자신을 포장했지만, 홀로된 어머니는 서울에서 겨우 연명만 할 뿐이고, 재산은 무일푼에 빚뿐이다. 빚은 공금횡령이다.



미두장 중매장 친구 장형보의 꼬임으로 고객의 통장 잔고를 빼돌려 언제 들통나게 될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삶을 살아가는 인물이다. 처음에는 적은 돈을 빼내다가 나중에는 점점 그 액수가 커진다. 횡령한 돈은 그를 더 깊은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불안한 태수는 기생집으로, 술집으로 다니며 탕진한다. 고태수도 정주사와 마찬가지로 여차하면 죽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다. 결국에는 전세집 주인 마님, 한참봉의 처와도 애정 행각을 벌인다. 그러면서도 약국 점원이자 정주사 딸인 초봉이에게 마음이 끌려, 장인의 장사 밑천을 대준다고 약속하고 결혼을 하지만, 초봉이를 넘보던 친구 장형보의 계략으로 한참봉에게 죽음을 당한다.

조선은행은 군산근대건축관으로 바뀌었다.

 



군산항 부두에는 조선은행을 비롯하여 많은 금융기관이 포진해 있었다. 조선18은행 등등. 이 은행들은 군산항에 재화가 몰릴 때 일본인들의 배만 불렸다. 특히 식민지 조선의 중앙은행인 조선은행은 일본 상인들에게만 특혜를 제공했다. 자국민에게는 농지 대금을 저리로 융자해 주고, 조선인에게는 비싸게 이자를 받았다. 나락으로 몰린 조선인들이 미두장에서 날린 재화는 이런 일본계 은행을 통해 일본인의 손에 넘어갔다.



지금의 조선은행 군산지점은 외형은 옛날 그대로이다. 몇 번의 리모델링을 거쳐 박물관으로 쓰인다.



정주사는 자신의 장사 밑천을 대주겠다는 고태수의 거짓말에 속아 딸 초봉이를 태수에게 시집보낸다.


동녕고개

 



정주사는 동녕고개를 지나서 한참봉의 집에 이른다. 군산항 인근에 살던 조선인들은 이곳에서 쫓겨가야 했다. 군산항 주변에 많은 관공서와 금융기관이 들어서고 그 후면에 상가와 근대적 신흥가옥이 들어섰다. 지금 군산을 찾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격자형으로 계획된 신흥도시, 이곳은 이름도 신흥동, 월명동이다. 시마타니야소야, 히로쓰 같은 군산의 일본 갑부들이 이곳에 집을 짓고 살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군산에 올 때마다 들리는 히로쓰 가옥도 일본의 악질 지주 아닌가. 생각할 일들이 많아진다. 젊은이에게 망신을 당한 정주사는 미두장을 나와 일본 사람들이 모여 사는 격자형 도심을 지난다. 일본 사람들이 자주 가는 극장이며 식당들이 즐비했던 곳을 지나니 한참봉의 집에 이른다.


조선인들이 많이 살았던 초입이 개복동이다. 개복동 이름을 딴 개복교회

 



'개복동, 구복동, 둔뱀이, 그리고 이편으로 뚝 떨어져 정거장 뒤에 있는 스래,이러한 몇 곳이 군산의 인구 칠만 명 가운데 육만도 넘는 조선 사람들의 거의 대부분이 어깨를 비비면서 옴닥옴닥 모여사는 곳이다... 제법 문화 도시의 모습을 차리고 있는 본정통이나 전주통이나 공원 밑 일대나 또 넌지시 월명산 아래로 자리를 잡고 있는 주택지나, 이런 데다가 빗대면 개복동이나 둔뱀이니 하는 곳은 한 세기나 뒤떨어져 보인다.'(탁류 26페이지)



싸전 가게를 하는 한참봉의 집은 전주통(동영고개)를 지나서 있다. 원래 군산은 수덕산과 동영산이라는 두 개의 산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군산항 일대가 주거지와 상업지로 탈바꿈하면서 동영산도 개발이 되어 고개가 되었다. 이곳을 지나면 조선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동네가 나온다.

탁류길, 한참봉쌀가게 소설비

한참봉의 집은 동영고개 앞 경찰서 앞 네거리 근처에 있다. 정주사는 싸전 가게를 하는 한참봉과 절친이어서 오가다가 같이 장기도 두는 사이다. 그러나 외상값이 밀려 가게 앞을 피해 다니기도 한다. 한참봉의 집에는 고태수가 세를 들어 산다. 한참봉의 처와 정을 통하지만, 그녀가 다리를 놔서 초봉이와 결혼을 한다. 서로 물고 물리는 이상한 관계이다. 결국 정주사의 딸 초봉이와 결혼하고도 한참봉의 아내와 관계를 지속하다가 초봉이를 탐내는 고태수의 친구 미두 중매점 '마루강'의 바다지 곱사 장형보의 밀고로 한참봉에게 맞아 죽는다.



한참봉의 집은 친절하게도 군산시에서 지정한 구불길 중 '탁류 길'로 지정되어 서 안내판이 붙어 있다. 이곳을 지나면 정주사의 집이 나온다. 정주사가 사는 마을 이름이 둔뱀이다.



'둔뱀이는 조선 사람이 많이 사는 개복동보다도 더하게 언덕 비탈로 제비집 같은 오막살이 집들이 달라 붙었고, 올라가는 좁다란 골목길은 코를 다치게 경사가 급하다.'(탁류 73페이지)

군산선의 철길 흔적.

 



정주사 집은 '콩나물 마을'이라고도 한다. 가난한 조선 사람들이 팔 것이 없어서 콩나물이라도 팔았다고도 하고, 가난한 초가집의 모습이 콩나물 머리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콩나물 마을이라고도 한다. 군산항의 개발에 밀려 쫓겨난 조선인들은 이 산동네에서 게딱지 처럼 초가집을 짓고 살아간다. 정주사도 아내, 자녀 도합 6명이 옹기종기 산다. 소설의 인물들과는 확연히 다른 캐릭터가 이 집에 세들어 산다. 남승재이다. 그의 출현은 무엇인가. 그는 서울에서 의사 면허를 따지는 못했지만, 의사가 되려는 꿈을 안고 이곳 군산에 내려왔다. 서민들이 자주 찾는 금호의원에서 근무하며 의사 수업을 받고 있다. 승재는 소설 속에서 가장 긍정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초봉에게 마음을 두지만 소극적 성격으로 사랑의 관계로 발전하지 못한다. 그는 금호의원 퇴근 후, 헐벗고 의학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조선 사람들에게 의술을 베푸는 계몽적 인물로 그려진다.



승재가 근무하는 금호병원 옆이 제중당약국이다. '정거장에서 들어오자면 영정으로 갈려드는 세거리 바른편 귀퉁이에 있는 제중당이라는 양약국이다.( 탁류 36페이지)'



 



이곳에서 탁류의 주인공 초봉이가 근무한다. 약사는 '말대가리 같이 기다란 얼굴에 대머리가 훌러덩 벗겨진' 박제호이다. 그는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아 틈만 나면 약국의 점원 초봉이를 데리고 서울로 갈 궁리만 한다. 결국 초봉이는 남편이 한참봉의 몽둥이에 맞아 죽은 뒤, 제호의 꼬임에 빠져 서울에서 살림을 차리지만, 원래부터 초봉이에게 흑심을 품은 남편 고태수의 친구 형보에 의해 살림은 깨진다. 형보의 겁박으로 살림을 차리지만 결국 초봉이는 형보를 죽이면서 작품은 종말을 맞는다.



채만식은 왜 작품 속에 미두장을 등장시켰을까? 바로 채만식의 형이 미두장에서 많은 돈을 날렸다. 그래서 그는 작품에서 미두장의 모습을 실감나게 그릴 수 있었다. 1930년대 조선은 자본주의의 광풍이 불었던 시기이다. 황금을 캐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광부로 나섰다. 정어리가 돈이 된다고 해서 정어리 잡는 광풍이 불기도 했다. 자본 만능, 황금주의가 나라를 휩쓸었다. 이런 시대 환경에서 자본주의의 맹점을 간파하고, 돈의 흐름을 면밀히 추적한 작가는 없다. 그가 경성에서 식민 지식인의 좌절된 삶을 실감있게 그린 '레디메이드 인생'도 결국은 지식인의 방황과 좌절을 자본 속에서 파악한 소설이다.


초봉이가 근무하는 제중당 옆의 남승재가 근무하는 금호병원

 



탁류에서 그려지는 인간들은 돈을 찾아 부나비처럼 이리저리 뛰는 인간들이다. 정주사도 돈 때문에 망신을 당했고, 장사 밑천 대준다는 거짓에 속아 딸까지도고태수에게 넘겼다. 고태수는 한 술 더 떠, 고객의 돈을 횡령하고 그 돈으로 허랑방탕한 삶을 살다가 결국 죽음을 당한다. 장형보는 미두장에서 돈을 벌어 초봉이를 겁탈하고 살림을 차리지만 결국 아내에게 죽는다. 모두 비참하게 종말을 맞는다. 특이한 것은 작품 속에 일본인들은 아무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주제는 조선 사람들의 재화와 곡물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뼈빠지게 살아가지만 그들이 번 재물은 오간데 없다. 돈을 좇아 금강의 탁류처럼 살아가지만 일본에 수탈당한 식민지 군산은 일본의 배만 불려줄 뿐이다. 교묘한 식민 장치에 의해 조선의 백성들은 흐린 군산 앞바다에서 침몰해 간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자본주의의 속성을 파헤치고, 1930년대 식민 사회의 질곡 속에 허덕이는 조선 사회에 돈의 흐름에 대한 근본적 문제를 제시했다.



소설은 아무런 희망을 제시하지 못했을까? 이 작품은 초봉이를 사이에 두고 부유하는 조선 사람들, 고태수, 장형보, 박제호와 같은 부정적인 인물만 그린 것은 아닌것 같다. 남승재와 같은 인물을 배치함으로써 어려움속에서 긍정적 모습으로 살아가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군산앞바다의 탁류, 조선인들의 눈물을 삼킨 현장이다.



https://www.d-art.co.kr/news/articleView.html?idxno=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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