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문학관 중 김승옥관/ 사진: 한이수
참 평화로운 땅이다. 서울에서 차로 달려 307km, 5시간은 가야 도착할 수 있는 곳. 서둘러 내려온 탓에 어느덧 짭조름한 냄새가 코를 파고든다. 바닷가에서만 맡을 수 있는 냄새다. 이곳은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의 배경이 되는 순천이다.
김승옥 작가는 '무진'을 이렇게 설명했다.
"서울의 어느 거리에서고, 나의 청각이 문득 외부로 향하면 무자비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소음에 비틀거릴 때거나, 밤늦게 신당동
집 앞의 포장된 골목을 자동차로 올라갈 때, 나는 물이 가득한
강물이 흐르고 잔디로 덮인 방죽이 시오리 밖의 바닷가까지 뻗어 나가 있고
작은 숲이 있고 다리가 많고 흙담이 많고 높은 포플러가 에워싼
운동장을 가진 학교들이 있고, 바닷가에서 주워 온 까만 자갈이 깔린 뜰을
가진 사무소들이 있고 대로 만든 와상이 밤거리에
나앉아 있는 시골을 생각했고 그것은 무진이었다. “ (소설『무진기행』중)
순천만 앞바다 사진: 한이수
김승옥은 꽉 막힌 도로에서 들리는 경적 소리, 일상적 소음 속에서 비틀거릴 때 무진을 생각했다. 김승옥이 그리는 무진은 우리가 맘속에 간직한 고향의 풍경이다. 강 옆, 마을 가운데 있는 방죽이 바닷가로 뻗어 있는 곳. 아득하여 맘이 쉼을 얻고 싶을 때 달려갈 수 있는 곳. 덤불숲 사이로 흐르는 개천 위에는 수양버들이, 오래된 폭 좁은 다리가 놓여 있고, 동구 밖에는 포플러 나무가 긴 목을 드리우고 서 있다. 학교를 파한 아이들이 나무 아래 황소를 묶어 놓고 올챙이를 잡는다. 시끄러워야 할 면사무소 마당에는 바닷가에서 주워온 까만 돌이 깔려 있다. 그 돌들조차 동네의 맘 착한 할아버지를 닮았다. 돌 위를 밟고 다니는 까막 고무신을 신을 동네 사람들. 들락거리는 사람들의 사투리조차 정겹다. 그는 그런 곳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쓰고자 했다. 맘 속에 있는 자신의 고향 순천을 그대로 옮겨놓은 가상의 공간 무진을 배경으로 한 『무진기행』이다.
김승옥은 이런 배경 위에 문학적 상상력을 가미했다. 무진에만 있는 명산물, 안개. 바다에 인접해 있지만 물이 얕아 배가 들어올 수 없어 여느 곳처럼 흥청거리는 변변한 항구가 없다. 바다로 연한 땅은 지대가 낮아 물이 들어와 습지가 많아 농토로 쓰기에 적합하지 않다. 그러다 보니 놀려둔 땅에는 안개가 많이 끼어 있다. 김승옥은 안개를 문학적 소재로 삼아 밤이면 여자 귀신들이 숨을 토해내듯이 안개처럼 진주해 오지만 햇볕이 쬐면 금세 사라지는 곳이라 했다.
안개? 안개가 짙게 깔리면 앞을 전혀 분간할 수 없다. 안개가 끼어 늘 불확실한 것이 삶이다. 그러나 그 안개는 우리의 모호함을 가려주는 구실을 한다. 젊은 날, 불안을 안개에 비유해서 그 속을 떠나고 싶어 떠났지만, 정작 안개가 걷힌 서울은 나를 방어해 줄 것이 아무것도 없는 무방비의 도시다. 불확실하고 불안한 인간의 모습을 안개로 표현한 그의 상상력이 놀랍다. 그런데 무진기행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그 동네와 어울리지 않게 날이 선 사람들이다. 자연풍광을 닮은 할아버지, 아낙네들만 등장하면 소설은 아무런 긴장감이 없었을 것이다. 무진을 떠나고 싶어하는 사람들, 세무서장 조한수, 음악교사 하인숙, 주인공 윤기준. 그런데 무진을 벗어나온 사람들은 정작 무진을 그리워 한다.
사실 전라남도 최남단 순천은 그렇게 평화로운 고장은 아니었다. 말로만 듣던 '여수·순천 사건'(1948년 10월 19-27일). 전에는 '여순반란사건'이라 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이렇게 아팠던 시절이 있었을까? 한국전쟁의 전주곡과 같았던 이 사건으로 2,500명 이상이 죽었다고 하지만, 민간인 사망자가 1만 명이 넘을 거라는 주장도 있다. 김승옥의 아버지도 그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이 사건에 가담하기 위해 가족의 곁을 떠났다. 무진기행 소설 속 주인공 윤기준이 징용을 피해 다락에 숨어 있는 것은 어쩌면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에서 비롯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념에 의해 사람들을 죽이기도 하는 시대를 지나온 순천. 그 철 지난 이념이 아직도 우리 사회를 그늘처럼 드리운다.
순천의 아침 풍경 /사진: 한이수
순천은 정말 안개가 명산물처럼 드리운 동네일까? 나는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김승옥 문학관은 찾은 것은 5시간을 차로 달려 오전 11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큰 기대와 달리 순천문학관 안에 있는 '김승옥관'은 참 소박했다. 그러나 다른 곳의 문학관에 비해 사람을 압도하지 않아서 좋았다. 넓은 대지 위해 두 개의 문학관이 지어져 있는데 '김승옥관'과 '정채봉관'이다. 두 문학관은 소박한 초가집이다. 김승옥이라는 도회풍의 작가와는 왠지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도 든다.
문학관 입구에 있는 김승옥 작가의 그림
"갈대 우거진 순천만에서 무진기행의 의미를 찾길 바랍니다."
라는 소박한 글귀가 관람자를 맞이한다. 그 옆에는 김승옥이 그린 수채화가 몇 점 그려져 있다. 만화를 잘 그려서 그런지, 그림도 잘 그린다. 그는 한 때 『서울경제신문』에 4컷 만화를 그리던 만화가였다.
김승옥 문학관 내의 영사기
내부로 들어서자 반기는 것은 커다란 영사기 한 대. 그는 소설가인가 영화인인가? 김승옥의 필모그래피에는 그가 시나리오 작업을 한 작품들이 나열되어 있다. 자그마치 16편이나 된다. 자신의 대표작 『무진기행』을 각색한 〈안개〉 를 시작으로 생전에 그를 그토록 아꼈던 이어령 선생님의 〈장군의 수염〉, 자신이 직접 메가폰을 잡은 〈감자〉, 〈영자의 전성시대〉, 〈겨울여자〉, 〈강변부인〉, 〈도시로 간 처녀〉 등등. 사춘기 시절, 영화 간판으로만 보았던 낯익은 영화들이 즐비하다. 이런 작품들이 모두 김승옥의 손으로 탄생했다니.
문학관 내부 모습
1960년 서울대 불문과 입학 동기들
많은 사진들 가운데 그의 젊은 시절에 찍은 사진이 눈길을 끈다. 1960년 서울대 불문과 일 학년때 동구릉에서 찍은 사진. 김치수와 김현 등 우리나라 문학평론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던 사람들로부터 자동차회사 사장까지, 이들이 한때는 우리나라 문화계를 주름잡은 사람들이다. 그 옆의 사진을 보니 고등학교 시절 김승옥의 모습이 보인다. 순천고등학교 학생회장은 물론 배구선수까지 출전한 촉망받는 학생이었다.
결혼식 사진에 하객들이 대단하다.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문화계의 인사들이 즐비하다. 그가 결혼한 1967년에 20대였을 그들은 지금은 모두 어디에 있을까? 아내 백혜욱 여사는 변방으로 떠도는 그를 붙잡아 두었다. 부평초처럼 영화판에서 여배우들과 이리저리기웃거릴 때, 남편의 삶을 걱정해 준 아내다. 샘터사 편집인으로, 대학교수로 지내며 삶의 안정을 찾았다.
이어령 선생의 글이 남아있다. 최고의 찬사, '처음 평필을 꺾을 만큼 감동을 받았던 작품이 바로 김승옥의 무진기행이었다'로 시작하는 글은 김승옥 문학에 대한 찬사로 이어진다. 우리 문화계의 큰 스승인 이어령 선생은 그를 타워호텔에 가두어 두고 감시인을 붙여 소설을 쓰게 할 정도였다.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을 알리는 신문
김승옥이 뇌졸증으로 쓰러졌을 때의 기사
그가 쓰러진 것은 2003년 절친 이문구의 타계 소식을 듣고 장례식장을 찾을 때였다. 그 이후로 주목할만한 작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문학관을 나왔다. 순천만의 습지가 더욱 또렷하게 보인다. 저 앞에 있는 산들은 유배당한 것처럼 멀리서 보일까? 지금 김승옥선생은 이곳을 잘 찾지 않는다고 한다. 얼마 전 유튜브에서 안개를 찍을 때 가수 정훈희와 대담을 나누는 것을 보았다. 젊은 시절 한 시대를 풍미했던 김승옥 선생이 쾌차하여 시대를 아우르는 작품 하나만 더 만들어 주시기를 기대한다.
낭트쉼터 내부
문학관 앞에 조성된 정원을 지나니 이상한 목조 건물이 있다. '낭트 쉼터'라는 카페다. 2009년 순천시와 프랑스 낭트(Nantes)시 간에 자매결연을 기념하기 위한 구조물이다. 프랑스 낭트시에서 전통 목선인 '빨래배'를 기증했고, 현지의 기술자들이 와서 설치했다. 그래서 그런지 건물의 외관이 배를 닮았다. 한국어로는 '세탁선'이라고 하는게 더 어울린다. 파리에서는 수도시설조차 없던 시절에 강가에 빨래배를 띄워 배 안에 물을 퍼 올리는 시설, 말리는 장소 등을 설치하여 주부들의 편의를 보았던 시설이다. 주로 낡은 배를 개조해서 이용했다. 배 주변에는 프랑스 정원의 상징인 장미, 포도 밭 등이 조성되어 있다. 함께 둘러 볼만하다.
[문학의 공간을 찾아서 ①] '안개'가 명산물인 고장 -『무진기행』의 순천 < 문화일반 < 문화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