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공간을 찾아서 ②] 윤동주 유고집 보관처

by 데일리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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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초판본 /출처: 전시 사진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를 꼽으라면 늘 상위에 오르내리는 시가 김소월(金素月1902-1934)의 「진달래꽃」, 윤동주(尹東柱, 1917-1945)의 「서시」 등이다. 김소월의 시가 우리의 토속적 정서를 일깨웠다면, 윤동주의 시는 일제 강점기 우리 문학의 민족적 순결성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윤동주가 29세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났기에, 자칫하면 그의 생애가 베일에 가릴 뻔했다. 그가 영혼을 갈아서 쏟아부었던 그의 시들도 모두 잊힐 수도 있었다.


그의 시집은 1948년, 해방 이후 3년이나 지나서 발간됐다. 시집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정음사에 출간했다. 정음사는 '훈민정음'의 '정음'을 빌려 출판사 명을 지었다. 국어학자 외솔 최현배 선생이 연희전문 교수로 있던 1928년에 문을 열었다. 정음사는 일찍부터 가로쓰기를 주창하였다. 윤동주는 최현배 선생의 강의를 수강한 적이 있어 아마도 그 인연으로 정음사와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


윤동주의 시집 초판본에는 윤동주의 작품 31점과 살아 생전 윤동주가 존경하며 따랐던 정지용 시인의 서문, 강처중의 발문이 실렸다. 정지용은 서문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청년 윤동주는 의지가 약하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서정시에 우수한 것이겠고, 그러나 뼈가 강하였단 것이리라. 그렇기에 일적에게 살을 내던지고 뼈를 차지한 것이 아니었던가?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고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도 없이! (···) 일제 강점기에 날뛰던 부일문사 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배앝았을 것뿐이나, 무명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실린 서문)



당시 경향신문 주간이었던 정지용은 일제 강점기에 민족적 순수성을 잃지 않았던 윤동주와 그가 쓴 시가 얼마나 아름답고 슬픈 것인가를 서문을 통해 밝혔다.


초간본 시집에는 강처중의 발문도 실려있다. 강처중은 윤동주의 친구로 송우혜 선생이 쓴 『윤동주 평전』이나 영화 〈동주〉에서 잠시 소개된 바 있다. 연희전문 시절 문과대에서 강처중과 송몽규, 윤동주는 삼총사로 불릴 만큼 친한 사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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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에 출간한 시집


강처중은 발문에서 다음과 같이 윤동주에 대해 술회했다.


"동주는 별로 말주변도 사귐성도 없었건만 그의 방에는 언제나 친구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동주 있나?' 하고 찾으면 하던 일을 모두 내던지고 빙그레 웃으며 반가이 마주 앉아 주는 것이었다. '동주 좀 걸어보자구!' 이렇게 산책을 청하면 싫다는 적이 없었다. (···) '동주 돈 좀 있나?' 옹색한 친구들은 곧잘 그의 넉넉지 못한 주머니를 노리었다. 그는 있고서 안 주는 법이 없었고 없으면 대신 외투든 시계든 내 주고야 마음을 놓았다. 그래서 그의 외투나 시계는 친구들의 손을 거쳐 전당포 나들기를 부지런히 하였다."(

윤동주와 줄곧 함께 학교생활을 했던 강처중은 마음이 여려 친구들에게 싫은 내색 한 번 하지 않았던 윤동주를 시집의 발문에서 이처럼 소상하게 기록했다. 강처중은 함경남도 원산 태생으로 아버지가 한의사였던 덕에 부유하게 생활했다. 그는 함경도에서 농민운동을 벌였던 항일독립투사였다.


강처중은 윤동주가 일본 유학 시절 자신에게 보내온 편지 속에 수록된 <쉽게 씌어진 시> 등 5편과 자신이 보관 중이던 <팔복>, <참회록> 등 7편, 종로구 누상동 9번지 하숙 시절 필사본으로 남긴 19편 등 모두 31편을 모아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간했다. 그래서 그의 시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윤동주의 시가 세상에 알려지기까지에는 강처중의 공이 크다.


1948년 초판본 이후에 발간된 증본판에는 정지용의 서문이나 강처중의 발문이 삭제된다. 정지용은 납북되고 강처중은 소련에서 공부하겠다고 떠났다는데 이후의 행적을 아는 사람은 없다. 이념 갈등이 극에 달하던 시절, 두 사람이 쓴 서문과 발문을 출판사에서 싣기는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강처중이 받은 19편의 시는 어떻게 그의 손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 종로구 누상동 9번지에서 하숙 생활을 같이 했던 정병욱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그는 윤동주의 시 19편을 잘 간직해서 시집 발간에 큰 도움을 준 사람이다. 아마도 그가 시를 간직하지 않았더라면 시집은 출간되지 못했을 것이다. 윤동주의 2년 후배지만 나이는 5살이나 어린 백영 정병욱(白影 鄭炳昱, 1922-1982).


그의 호 '백영'은 윤동주의 시 '흰 그림자(白影)'를 그대로 따 온 것이다. 정병욱은 연희전문 기숙사를 나와 2년 동안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하숙을 하며 함께 지낸 룸메이트로 유명하다. 그의 국문학 연구도 우리 문학사에서 빛을 발한다. 그는 서울대학에서 27년 교수로 재직한 한 유명한 국문학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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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가옥 /사진: 한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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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가 보관되었을 당시 정병욱 가옥 모습 /출처: 전시 사진


정병욱은 윤동주가 1942년 징용으로 끌려간 후, 2년 후 1944년 일본군에 징집되었다. 태평양전쟁 막바지, 끌려가면 살아 돌아올 것을 장담할 수 없는 막다른 길이었다. 그가 참으로 걱정한 것은 자신이 간직하고 있던 윤동주의 시 19편이었다. 그는 광양 망덕포구에서 양조장을 운영하는 어머니에게 시집을 부탁했다.


자신이 돌아오지 못하면 이 시편을 연희전문학교에 갖다 주어 시집을 발간하게 해 달라고 한 것이다. 이 시는 생전 윤동주가 묶은 필사본이다. 한 편은 윤동주 자신이 갖고, 한 편은 당시 연희전문 이양하 교수에게 주었다. 이양하 교수는 일제의 감시 속에서 민족적 정서가 담긴 시의 출간은 위험하다고 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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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가옥 내부, 마루 밑 항아리에 윤동주 시가 놓여 있다.


나머지 한 편은 그의 친구와 같은 후배 정병욱에게 주었다. 이 필사본을 어머니에게 주어 보관을 부탁한 것이다. 아들의 부탁을 맡은 어머니는 그 시집을 명주 보자기에 싸서 마루 아래 항아리에 넣어 숨겼다. 시는 해방이 되고 빛을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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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가옥 뒤편에 쓰인 서시


정병욱 가옥을 방문했을 때는 봄꽃 만개가 한참 지나고, 장미가 막 피기 시작하는 5월 중순이었다. 꽃들의 개화 시기가 중부 지방보다 열흘은 앞서는 느낌이다. 초여름 날씨에 중부 지방에서 볼 수 없는 화려한 꽃들이 만개했다.


그래, 이곳은 광양 아닌가! 광양(光陽), 빛 광(光)에 볕 양(陽)이다. 빛과 볕, 둘 다 태양을 표한다. 그래서 그런지 광양은 우리나라에서 일조량이 가장 많다고 한다. 망덕포구는 광양 땅 최남단에 위치해 있다. 겉으로 보면 다른 오래된 집들과 전혀 차이가 없어 보이는 집. 가옥 뒤편에 보이는 윤동주의 대표작〈서시〉를 보고 이 집과 윤동주와의 관계를 유추해 볼 수 있다.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윤동주의 시집을 보관했던 이 집을 찾는 학생들이 떼를 지어 관광버스에서 내린다. 사람을 감동케 하는 윤동주의 시도 그러하지만, 이 시를 잘 보관한 정병욱 가의 노력도 하나의 스토리가 되어 후대에 아름답게 전해지고 있다.


사진 속 시를 보관했을 당시의 가옥이 원형이 훼손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다. 단지 사진 속 가옥은 섬진강변에 있지만, 지금은 도로를 확장하여 도로 변에 있는게 다를 뿐이다. 정병욱 가옥 전체를 윤동주를 기념하는 공간으로 쓰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맑은 물가에 있는 조그만 포구에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가 숨어있을 줄이야. 정병욱 가옥 인근에는 '윤동주 시비 공원'도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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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가옥 인근. 윤동주의 시를 비석에 새긴 시비 공원 전경 /출처: 광양시 공식블로그


가옥 건너편에는 배알도라는 조그만 섬이 있다. 그 섬과 광양의 정병욱 가옥과는 연계되어 있다. 다리 이름도 '별을 헤는 다리'다.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에서 다리 이름을 따왔다. 맑은 날 밤 별이 반짝일 때, 이 다리 위에서 윤동주의 시 〈별헤는 밤〉을 읊조려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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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헤는 밤 다리 /사진: 한이수


다리를 건너 배알도에서 망덕 포구를 포구와 작은 마을이 잘 어울린다. 이렇게 시를 보관한 동네는 한 편의 시편처럼 아름답다. 아름다운 망덕포구, 전통주가 익어가던 항아리에서 윤동주의 시는 수년을 묵혀 우리에게 돌아왔다.


정병욱은 자신이 가장 잘한 일이 윤동주의 시집을 보관한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는 형의 원고를 찾기 위해 망덕포구 이곳을 오고 가고 하다가, 정병욱의 동생 정덕희와 사랑이 익어 결혼하게 된다. 윤동주와 정병욱 두 사람의 우정이 발전하여 사돈지간까지 되었다고 하니 문학의 힘이 이토록 큰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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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알도에서 바라본 망덕포구 /사진: 한이수


윤동주의 아름다운 시를 이야기 할 땐 그의 시를 보관한 정병욱도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시를 보관했던 망덕포구의 정병욱 가옥도 함께. 두 사람의 아름다운 우정이 결국 민족시인 윤동주를 탄생케 했다니 이 동네가 윤동주의 시처럼 아름답게 보인다. 광양의 최남단 망덕포구, 볕이 좋아 늘 섬진강이 아름답게 빛을 반사하는 그곳이 너무도 아름답다. 윤동주의 시와 그 시를 지키고자 했던 우정 덕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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