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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아트 Jul 24. 2024

③ 새만금NEW매력 (1)

[새만금 답사기]

사람이 하늘 되고 하늘이 사람 되는 세상을 꿈꿨던 사람들 이야기


지난 6월 6일 정순희 기자는 로컬콘텐츠연구소에서 기획한 '새만금NEW매력 탐방'에 참석했다. 1박 2일 일정인 '새만금NEW매력 탐방'은 동학농민혁명의 현장 원평집강소와 구미란 전적지를 돌아본 후 새만금 팸투어로 진행되었다. / 편집자 주



원평집강소, 구미란 전적지
최고원 (사)김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상임이사

서울에서 출발해 첫 탐방지 원평집강소에 도착하니 ‘구미란댁(宅號)’으로 불리는 최고원 (사)김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이하 기념사업회) 상임이사가 일행을 맞았다. 최고원 상임이사는 평생을 동학농민혁명을 기린 향토사학자 故 현학 최순식(1933-2008) 선생의 딸이다. 그녀는 선친의 뜻을 이어받아 2008년 12월 기념사업회 창립 이후부터 16년 동안 김제 지역의 동학농민혁명사의 위상 정립과 희생된 동학농민군의 추모 사업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최고원 상임이사와 함께 돌아본 원평집강소와 구미란 전적지를 중심으로  동학농민혁명을 복원해 본다.




복원된 원평집강소. 원평집강소는 동학 53개 집강소 중 유일하게 복원된 곳으로 전봉준 장군이 수천 명의 동학농민군을 거느리며 전라우도를 호령했던 총 지휘 본부였다.

130년 전 원평집강소의 주인은 동록개(‘동네 개’라는 뜻)로 불리던 백정이었다. 그는 ‘사람이 곧 하늘이다’는 동학 사상에 감명을 받아 금구대접주 김덕명 장군에게 “신분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어 달라”며 이곳을 헌납했다.




이후 동학농민군은 그의 뜻을 받아들여 동록개의 집에 집강소를 설치했다. 집강소는 전라도 일대 53곳에 설치된 농민 자치 행정기관이다. 고을마다 설치한 접의 수령인 접주를 ‘집강’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동학농민군은 집강소를 중심으로 행정권을 장악하고 잘못된 제도를 바로 잡아 만민이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였다.




원평집강소 문화공간. 2023년 원평집강소 뒤뜰에 조성된 문화 공간은 원평취회 정신을 기리는 문화 향유 공간이 되었다.

김제 지역 동학농민혁명사는 거의 원평 일대에서 벌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번 국도가 지나는 원평은 접근성이 좋았으며 지리적 요충지로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다. 그리고 원평천과 주변의 논들에서는 예부터 사금(砂金)이 나와 이것을 채취하고자 하는 사람들로  붐볐다. 이러한 원평의 환경은 인근에서 생산되는 물산을 거래하는 원평장을 형성했다. 원평장에 모인 사람들은 다양한 정보를 교환했고 민심의 동향도 살필 수 있었다.




원평취회지. 1893년 원평취회는 이전까지의 교조 신원 운동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정치적 집회였으며 동학농민혁명의 전조가 되는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1893년 봄 약 1만 명의 동학농민군은 원평 장터에 모였다. 한 달간 고부접주 전봉준 장군과 금구접주 김덕명 장군 등 남접(南接)의 주도 하에 봉건 왕조의 무능·부패와 외세를 반대하는 정치적인 성격의 집단 시위(원평취회)를 전개했다. 동학농민군의 원평취회에서는 북접(北接)이 중심되어 내세운 교조 신원의 종교적 주장보다 백성들의 현실적·정치적 요구를 전면에 내세우고자 했다. 원평취회의 주동 인물들은 이후에도 선도적인 투쟁성을 보였으며, 이듬해 동학 농민의 봉기를 혁명 차원으로 발전시키는 데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군은 제2차 봉기에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 부대에 패배 후 전라도 쪽으로 퇴각했다. 전봉준 장군이 이끌던 주력 부대는 퇴각하면서도 재기를 위해 원평으로 내려와 구미란에 진을 쳤다. 동지 전날이었던 음력 11월 25일 해가 뜨면서 시작된 전투는 해질녁까지 이어졌다. 동학농민군은 지형상의 이점을 누리고 있었지만, 관군 연합 부대와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재래식 무기를 쓴 농민군은 불리했다. 결국 저녁 무렵 산 위에서 혈전이 벌어졌고 수많은 시체가 쌓였다. 우금치에서 패배한 동학농민군은 패퇴하던 중에도 잔존 병력을 계속 재정비하며 일본군과 관군을 괴롭혔으나 원평 구미란 전투에서 패배한 후 흩어져 각자 재기를 꾀하게 되었다.


무명 농민군 묘역. 외형상 초라한 모습이지만 구미란은 전봉준 장군이 이끈 동학농민군의 최후 항전지라는 역사적 의미가 매우 크다.

당시 40여 호에 이르던 마을이 두 가구를 제외하고 불탔으며 살아남은 주민들도 몸을 피하자 숨진 동학농민군의 시신을 한 달 가까이 거두지 못했다. 썩어 가던 시신의 팔과 다리를 개가 물고 다니는 지경이었다. 명절 준비를 위해 섣달그믐이 되어서야 돌아온 주민들이 이를 수습해 구미란 뒷산에 몇십 구씩 묻었다고 한다.


원평장터 기미독립만세운동기념비. 1893년 3월 동학농민군의 원평취회가 열렸던 원평 장터에서는 1919년 3월 동학농민군의 후손들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태극기를 매달아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구미란 전투는 사실상 동학농민군 최후의 항전이었다. 결국 화력의 차이로 패하고 말았지만, 동학농민군의 잔여 세력이 의병 운동에 가담함으로써 항일 구국 운동과 독립운동에 기여했다.



원평집강소의 동록개 장승. 동록개 장승은 임성안 목조각장의 작품이며 글씨는 박명근 서예가가 썼다.


동록개의 꿈이 살아 있는 원평집강소는 일제 강점기 땐 면사무소로, 그 후엔 종교 시설 등으로 사용되었으나 1990년대 이후 방치 상태였다가 2015년에 보수 정비를 완료했다. 자칫 붕괴되어 사라질 뻔했던 원평집강소가 복원되었듯이 평등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동록개의 꿈도 잊지 않고 기억했으면 한다. 이번 '새만금NEW매력 탐방'의 첫 코스로 찾은 원평집강소와 구미란 전적지는 교과서로만 배우는 역사가 아니라 동학농민군의 숨결을 느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매력의 장소임이 분명했다.



https://www.d-art.co.kr/news/articleView.html?idxno=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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