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레이, 내가 사랑하는 예술품 ⑥] 박형진 화가

by 데일리아트

하나의 점에 찍힌 노은님 선생님의 힘

내게는 아주 특별한 그림이 하나 있다. 이 그림은 매우 작고 소중해서 오래도록 애지중지 잘 보관 중이다. 크기가 작다 보니, 너무 잘 보관해 놓고는 가끔 어디에 뒀는지 까먹어 난감할 때도 있다. 그래서 몇 해 전부터는 전용 보관 상자를 마련해 ‘작은 그림들’을 한데 넣어 두었다. 이 글을 쓰며, 수납장 한쪽에 넣어 두었던 상자를 꺼내 오랫만에 열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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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스케치북, 노트와 함께 보관중인 작은 '점' 그림 ⓒ 박형진

2008년 한 여름, 30중반을 갓 넘은 신진 작가인 나는 함부르크 조형예술대학의 썸머 아카데미 과정 ‘펜티먼트’에 참여하기 위해 독일로 떠났다. 재독작가 노은님 선생님께 수업을 듣기 위해서였다. (결과적으로 노은님 선생님이 아닌 다른 독일인 선생님께 수업을 듣긴 했지만, 노은님 선생님께서는 기간 내내 실기실에 자주 방문하시어 내 작품에 관해 여러 조언들을 해주시곤 했다.) 3주간의 수업에는 전문 화가들과 다양한 직업을 갖은 사람들이 참여하였고 흥미로운 커리큘럼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독어에 능숙한 한국인 참여자 분들의 도움과 세계 공용어 바디랭기지 덕분에 무사히 수업을 잘 마칠 수 있었다. 아카데미 수업 중간에는 선상파티 등의 행사가 있었고 수업이 끝나고 나서는 수업 중 제작했던 작품들을 전시하는 ‘오픈하우스’ 종강 파티도 개최되었다. 그렇게 나는 함부르크에서의 낯설면서도 흥미진진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노은님 선생님께서는 당시 펜티먼트 학장이셨고 여러모로 신경을 써 주셨는데, 그때 이 작고 소중한 ‘점’ 그림을 내게 선물로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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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은님, Glückspunkt, 2008, acrylic on canvas, 5x5cm. ⓒ 박형진

이 그림은 캔버스 크기가 5x5cm로 내가 보유하고 있는 캔버스 중 단연 제일 작은 크기다. 이 작은 캔버스에 갈색 물감으로 점이 하나 콕! 찍혀 있다. 이 점을 보는 순간 한 눈에 반하고 말았다. 콕! 찍힌 점 하나에서 힘이 느껴졌다. 선생님의 기운이 느껴지는 이 그림이 너무 좋다. 앙증맞은 캔버스 중앙에 찍혀있는 갈색 ‘점’은 매끈하게 동그랗지 않고 붓 끄트머리가 힘차게 캔버스를 치고 올라간 흔적이 남아 있다. 선생님의 몸짓, 붓을 잡으신 오른손의 온기가 느껴지는 것만 같다.

노은님 선생님께서는 2000년 이후의 작업에서 본격적으로 ‘점’을 그리기 시작하셨다. 선생님께서는 ‘눈이 먼 불쌍한 물고기’를 본 이후에 작품에 ‘점’을 찍어 ‘눈’을 표현하셨다고 한다. 그러니까 노은님 선생님의 ‘점 (㸃)’은 일반적인 ‘점 dot’ 이기도 하지만, 살아 있는 생명체의 ’눈 (eye)‘의 의미가 더 강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소장하고 있는 노은님 선생님의 또 다른 작품들에도 선명한 ‘점’ 모양의 ‘눈’들이 찍혀있다.

펜티먼트 종강 이후, 노은님 선생님의 특별한 배려로 미헬슈타트 작업실에 열흘 정도 머물게 되었다. 그 곳은 고성(古城)의 부속 건물로 2000년 쯤부터 선생님의 주말 작업실이면서, 방학 때면 작업을 하기 위해 머무르셨던 곳이다. 본격적으로 ’점’을 모티브로 작업하셨던 장소이기도 하다. 선생님께서는 3층에 위치한 작은 창문이 달린 조그만 방을 아기자기하게 꾸며 내가 머물게 해 주셨다. 너무나 특별하고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렇게 독일과 영국에서의 2달 일정을 모두 잘 마치고 이 작은 ‘점‘ 그림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온지 벌써 17년이 지났다. 이렇게 애지중지하는 이 소중한 그림을 여지껏 액자를 하지 못한 데는 이유가 있다. 그림 뒷면의 싸인 때문이다. 하단에는 선생님의 싸인이 쓰여있고, 상단에는 선생님께서 흘려 쓰신 글씨가 적혀 있는데, 독일어 단어를 흘려 써 놓은 거라 제대로 알아 볼 수가 없었다. (당시 선생님께서는 무슨 의미인지 친절히 알려주셨을텐데…) 고민 끝에 이 글씨를 해독하기 위한 적임자를 떠 올렸다! 오랜 기간 함부르크에 거주하며 번역가로 활동하셨던 L 언니다. 노은님 선생님의 인쇄물 번역 작업도 하시고 친자매 같이 가깝게 지내셨던 분이었기에 선생님의 글씨를 보여드리면 바로 알아보실 것 같았다. 오랜만에 전화를 드려 안부 인사를 나눈 후에 사정을 말씀 드리고 사진을 보내드렸다. 역시나 바로 답을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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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은님, Glückspunkt 뒷면, 2008, acrylic on canvas, 5x5cm. ⓒ 박형진

이 단어의 의미는 바로, 〈Glückspunkt (행운의 점)〉 이었다.

오! 그렇구나! 오랜 기간 동안 내 곁에 있어 준 ‘행운의 점!’ 지난날의 나를 지켜준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문득 2008년의 미헬슈타트가 떠오를 때가 있다. 창문을 열면 커다란 나무 숲이 보이고 졸졸졸 흐르는 강물 소리, 따스한 햇볓과 꽃들로 둘러싸인 선생님의 작업실. 이른 아침마다 검은 숲 길을 산책하시던 모습, 느린 말투, 온화한 표정의 선생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하지만 이제는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 안타깝게도 선생님께서는 2022년 가을 영면하셨다. 함부르크와 미헬슈타트의 행복했던 추억에 이제는 그리움이 자리를 잡았다. 수없이 많은 작품과 오브제들에 찍혀 있는 노은님 선생님의 ‘점’들이 누군가에겐 ‘행운의 점’으로 또 누군가에겐 앞을 보는 ‘생명의 점’으로 영롱하게 빛나고 있다.


[릴레이, 내가 사랑하는 예술품 ⑥] 박형진 화가 – 지난날 나를 지켜준 ‘행운의 점’ < 미술일반 < 미술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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