푼 힐 전망대에서 바라본 새벽의 히말라야 산군
히말라야가 부른다. 그 부름을 받고 랄리구라스(Laliguras)가 춤을 추는 봄, 나는 안나푸르나(ANNAPURNA BASE CAMP, 약칭 ABC)를 향해 떠난다. 예전 인도 북부 깊숙이 들어간 네팔의 산악지대에서 현지인들의 삶과 계단식 밭의 가을 풍경, 멀리 보이는 히말라야 산군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 곳을 몸소 체험하고자 발을 내디딘다. 마음은 하늘을 날고 몸은 넘치는 기대와 기운으로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듯하다.
네팔 히말라야의 청명한 하늘, 계단식 밀보리밭의 너울거리는 초록 풍경, 트레킹에서의 온화한 햇살과 산들바람은 덤으로 얻는 가슴 벅찬 보너스다. 정신은 평온하고 몸은 포근하며 눈은 바쁘다. 콧노래는 흥얼흥얼 온몸이 조용히 요동을 친다.
안나푸르나는 네팔, 인도, 파키스탄, 중국, 부탄에 걸쳐있는 히말라야 산군 중에 힌두교 풍요의 여신 ‘락슈미(Lakshmi)’ 를 상징하는 봉우리다. 이곳은 랑탕 계곡과 쿰부 히말라야와 함께, 히말라야 3대 트레킹 코스 중 한 곳으로 손꼽히는 아름다운 길이다.
구름 속에 보이는 풍요의 여신 안나푸르나의 비경
발걸음도 가볍게 저지대에서부터의 출발은, 한국의 산길과 비슷한 풍경이다. 꼬불꼬불한 길을 걷다보면 따스한 햇살과 부드러운 바람이 등을 떠밀고, 듬성듬성 보이는 농가와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한국의 여느 시골 풍경과 다름없다. 얕은 계곡을 건너고 사람의 손으로 엮어 만든 허름한 나무다리들을 건너니 본격적인 오르막 트레킹의 시작이다.
가파른 길은 왼쪽으로 산허리를 끼고, 다른 한쪽으로는 낭떠러지 계곡 너머 겹겹의 산들과 마주한다. 가다가 숨이 차면 길가 돌담에 걸터앉아 올라온 길을 내려다본다. 산자락 허름한 집의 아이들은 누런 코를 잔뜩 흘리고, 까만 눈동자는 연신 뚫어져라 이방인을 쳐다본다. 높고 파란 하늘 아래 순박한 아이들의 티 없는 눈빛이다.
다시 길을 나서며 대자연의 장대한 풍광을 감상한다. 이쪽저쪽 산자락에는 계단식 논밭이 가득하다. 보리, 밀, 감자, 채소들이 탐스럽게 자란 밭은 땀 흘린 농부들의 노동이 담겨있다. 초록의 정겨운 풍광이 아름답고 아름답다. 깊은 계곡을 가운데 두고 한쪽 산허리에 굽이굽이 난 길을 휘어 돌며 올라가는 길은, 내가 길인 듯 길이 나인 듯 하나가 된다. 하늘 아래 대자연과 하나 되어 걷는 이 행복감을 어디에 비길까.
점점 휘몰아치는 호흡과 휘청거리는 다리가 무거워질 때쯤 언덕 위에 반가운 산장이 보인다. 앞이 탁 트인 산장 의자에 지친 몸을 쉬며 온몸으로 자연을 느낀다. 여기 이곳, 이렇게 아름다운 전경을 볼 수 있는 산장이 있다니…. 발아래 펼쳐진 산들은 광대한 파노라마다. 여행자의 지친 발걸음을 잘도 알아차려 주는 산장에서 쉼이 더없이 좋다. 이러한 산장들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숨이 목에 찰 때쯤이면, 멋진 뷰를 자랑하며 나타나곤 한다.
랄리구라스가 히말라야에 말을 건다.
봄의 안나푸르나는 해발 1200m-3600m 고도에서 피는 랄리구라스 꽃들로 아름다운 장관을 이룬다. 봄의 전령인 랄리구라스는 나무에서 피는 네팔의 국화로, 진달래 여러 송이를 뭉쳐 놓은 듯한 크기의 핑크 바이올렛 빛이다. 고목에서 작은 나무까지 활짝 핀 꽃들로 올라가는 길은 온통 꽃 터널이다. 올려다봐도, 내려다봐도, 옆을 보아도, 사방의 랄리구라스의 만개 풍경은 가히 무엇과도 비교 불가다.
예전 알프스를 트레킹 할 때도, 몽골의 초원에 서도, 아프리카 메마른 들판에서도 흐드러진 들꽃들의 아름다움으로 숨이 멎는 듯했는데, 여기는 그와 또 다른 별세계를 보여준다. 꽃 속에 파묻혀 있자니 머리는 맑아지고 온갖 잡념이 사라진다. 신선이 따로 없다. 이 꽃은 인간의 정신적 고통까지 치유해 주는 정신 세계를 지닌 듯하다.
랄리구라스에 뒤덮인 아름다운 롯지에서 하룻밤을 머문다. 롯지 뒤로는 랄리구라스의 에덴동산이요, 앞을 보면 지척의 광대한 원근감의 산군들이 산수화를 그려내고 있다. 꽃들의 에덴동산과 산군의 산수화가 만나면 어떤 그림이 나올까? 아니면 산군의 산수화가 랄리구라스의 에덴동산을 만나면 어떤 그림이 나올까? 머릿속으로 이 그림, 저 그림을 그려본다.
해발 3,210m의 푼힐전망대를 가기 위해 묵어야 할, 고라파니 롯지를 향한 발걸음은 계속된다. 산허리를 휘어 돌아 걷고 걸으며, 원 없이 보았던 풍광들이 조금씩 달라진다. 돌들은 점점 커져 발 디디기에 조심해야 하고, 나무들은 작아지며 바위산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계속 겹치며 따라오는 양쪽 산 사이 계곡 끝으로, 안나푸르나의 흰 봉우리가 조금씩 크게 보인다. 내일 새벽 푼 힐전망대의 일출을 보기 위해 일찍 잠을 청한다.
마차 푸 차레에 동이 튼다.
깜깜한 새벽, 오직 일출을 본다는 생각만으로 천근만근의 몸을 일으켜 걸음을 재촉한다. 앞사람 뒤꿈치만 보며 가파른 길을 한참 오르니 반가운 전망대다. 어둠이 조금씩 사라지면서 멀리 희끄무레한 선들이 보인다. 잠시 후 광활한 청회색 산군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안나푸르나와 마차 푸 차례 등 모든 봉우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예전 인도 북부 깊숙이 들어가서 봤던 파노라마 산군 풍광이다. 이 경외감의 설산 산군들을 나는 인도 시킴 왕국과 부탄을 다녀오는 귀국 비행기 안에서도 내려다보는 행운을 얻는다. 대자연의 경이로움 앞에 감탄과 놀라움과 숙연함까지 느껴진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장대한 히말라야 산군
동쪽 하늘이 붉어지면서 맞은편 설산 봉우리들이 황금빛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한다. 잠깐의 시간에 변신한 황금색 봉우리들의 풍광은 황홀하다. 몸은 한 곳에 멈춰 서고, 머릿속은 하얘지고 맑아진다. 아마도 트레킹 동안에는 머릿속이 텅 비어 있을 것 같다. 아니 비울 거다. 그래서 히말라야 기운을 가득 채운 채 현실로 돌아가, 그 기운으로 또 다른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
하산 후 롯지에서 몸도 마음도 산뜻한 기분으로 아침을 먹는다. 새벽 트레킹 탓인지, 짐꾼 중 요리사의 실력인지 최고의 만찬이다.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짐꾼들의 수고가 감사하다. 그들은 동네 앞산을 오르듯, 낡은 슬리퍼에 허름한 얇은 옷을 입고, 식재료와 그릇들을 어깨에 잔뜩 짊어지고 이동한다. 몸만 한 짐이 버거워 중간중간 내려놓고 쉬는 모습이 안쓰럽다. 그래도 눈이 마주치면 늘 밝게 웃는다. 롯지에서 짐을 풀고 쉴 때는 앞마당에 장작불을 지펴놓고, 전통 노래와 춤을 추면서 여행객의 피로를 풀어주려 애쓴다. 그들의 밝고 긍정적인 표정들이 귀국 후에도 오랫동안 남는다.
이들은 탄자니아의 킬리만자로산을 트레킹 할 때의 짐꾼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부탄을 트레킹 할 때의 짐꾼들도 그랬다. 친절했던 나라들의 사람들이 오버랩 되면서,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에 얼굴까지 기억나는 사람들이 그리워진다. 한번 스치고 간 인연인데 아마도 자연에서 며칠간 교감하며 자연의 순수와 함께해서인가 보다.
늦은 아침, 오늘은 여유 있게 출발한다. 몸은 가볍고 마음은 행복하다. 아직 콧속에 남아있는 모닝커피 향이 기분 좋다. 길은 산허리를 돌다 내려와 계곡을 가로지르기도 하고, 계곡을 따라 걷기도 한다. 졸졸졸 계곡물은 간간이 보이는 들꽃 무리와 함께 그리 반갑고 정겨울 수가 없다. 오른쪽으로는 화산 활동으로 쪼개진 듯한 날카로운 거대한 바위들이 옆으로 비스듬히 뉘어 있고, 거친 바위산들은 줄줄이 따라온다.
그 뒤로 멀리 마차 푸 차례의 아름다운 물고기 봉우리도 덩달아 따라온다. 마치 졸병들을 거느린 대장 같은 안나푸르나다. 안나푸르나의 설산 봉우리가 점점 커지며 눈이 부시다. 이제부터 안나푸르나 ABC를 향한 막바지 트레킹에 들어선다. 마차 푸 차례는 계속 따라오고 주변은 거친 바위들의 가파른 길이 이어지면서 오르막 내리막이 반복된다. 순간의 실수로 발을 헛디디면 바로 사고로 이어지는 길이다. 집중력이 서서히 떨어지면서 머리가 무거워진다. 언제부터인가 나무와 계곡이 사라지면서 눈앞의 거대한 산만 보고 걷고 또 걷는다.
[오지화가 이향남의 예술기행 ⑧] '히말라야'의 나라 네팔 1 < 칼럼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