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판 ‘최신 서울특별전도’를 보면 사대문을 중심으로 한 강북 도심은 주요 시설로 빼곡하고 강남엔 여전히 허허벌판 논밭이 많았다. 그만큼 인구의 강북 밀집으로 인해 주택난 등 여러 문제가 발생했다. 강북은 더 이상 서울 인구를 적정하게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만원’이었고 60년대부터 인구 억제 정책이 추진됐다.
매년 대통령 지시가 내려졌고 도시계획은 크게 두 축을 중심으로 수립됐다. 하나는 강북 인구를 억제하고 강남으로 유치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무허가 건물에 대한 단속을 강화해 서울로의 인구 유입을 억제하는 것이었다. 서울시는 1975년 행정 지침으로 학원·예식장·시외버스터미널·공구상·고물상 등을 도시 외곽으로 이전하는 ‘도심 부적격 시설의 교외 이전’ 계획을 발표했다.
도심의 교통 혼잡이 심각해지자 남대문로5가, 봉래동1가, 종로6가 등 도심부에 위치한 고속버스터미널이 도심 부적격 시설로 지목되면서 외곽 지역으로의 통합 이전이 추진됐다.
1975년 3월4일 서울시 연두순시에서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서울시 인구 증가 없이 강북의 조밀 인구를 강남에 소산시키는 방향으로 정책적인 방안이 깊이 연구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매년 설파해 온 정책 의지였지만 그때만큼은 목소리 톤이 달랐다.
박 대통령 “강남으로 인구 분산” 지시
강북 인구 분산과 강남 개발을 목적으로 생긴 서울고속버스터미널의 단면도.[출처 : 경향신문 81.9.28]
대통령 지시에 따라 구자춘 당시 서울시장은 고속버스터미널의 강남 이전을 추진했다. 원래는 서울을 3개 핵심 공간으로 나눠 개발하는 계획에 따라 버스터미널도 영등포와 강남, 반포 3곳을 개발하려고 했지만 박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강남으로 집중됐다.
같은 해 6월27일 서울시는 도심 집중 완화와 강남 개발을 촉진한다는 명목으로 서초구 반포동 일대에 종합버스터미널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5만 평의 부지에 고속버스터미널(3만 평)과 시외버스터미널(1만 평)을 짓고, 나머지 1만 평의 부지에 택시 승강장과 시내버스 주차장 등을 건설한다는 계획이었다.
이 계획에 따라 11월 초에는 가건물 형태로 운영됐지만 접근성이 떨어지는 강남터미널은 한동안 고속버스가 거쳐 가는 용도로만 사용됐다. 강남터미널 이용 승객을 늘리기 위해 구자춘 시장은 잠수교 건설과 남산 제3호 터널 개통을 추진했다. 1977년에는 교통부장관의 행정명령으로 모든 고속버스는 강남터미널에서만 출발과 도착을 하게 된다.
하지만 불편을 호소하는 시민이 많아 결국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을 새로 짓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해서 하차장은 1980년 9월19일, 본관은 1981년 10월11일에 완공해 같은 달 20일 개장했다. 이후 교통난이 심각해지자 서울시는 시외버스터미널을 지금의 남부터미널로 이전하게 된다.
1980년 2월20일 착공을 시작한 지하철 3호선은 1985년 7월12일 구파발에서 독립문 구간이 개통됐다. 같은 해 10월18일에야 독립문에서 양재역 구간이 연결됐다. 지하철역과 고속버스터미널이 연결되면서 자연스레 고속버스를 이용하는 시민도 크게 늘었다. 허허벌판 위에 세워진 서울고속버스터미널은 차츰 쇼핑·레저·문화·숙박·공공시설 등을 갖춘 복합문화공간으로 발돋움하면서 시민들의 사랑을 받게 됐다.
완공 당시에는 3층과 5층에도 승차장이 있는 초대형 버스터미널로, 서울의 명물로 꼽혔다. 버스가 신반포로를 면하고 있는 반포상가 지붕을 타고 3층과 5층 승차장까지 올라갈 수 있는 독특한 구조를 가진 건물이었다. 지하 1층, 지상 11층 규모의 본 건물과 지하 1층, 지상 2층의 하차장 건물로 구성됐다. 규모뿐 아니라 전자안내시스템 등 시설 면에서도 당시로서는 최첨단 건물이었다.
1·3·5층 각각의 승강장에 매표소와 대합실이 있고 지하층에서 5층까지는 음식점·목욕탕·은행·다방·제과점·커피숍·약국 등 다양한 편의시설이 들어섰다. 6·7·8층에는 의류도매상가, 9층에는 고속버스 관련 사무실, 옥상인 10층에는 승용차 200여 대가 주차할 수 있는 주차장이 있었다. 보행자를 위한 에스컬레이터와 엘리베이터 개수만도 각각 26개와 23대나 있었다고 한다. 이용 승객뿐 아니라 관광객들도 상당수 방문했을 것으로 보인다.
세월이 흐르면서 시설이 노후화되자 터미널 일대 도시 풍경은 을씨년스러워졌다. 그러자 활발한 재개발 논의 끝에 2005년 8월, 호남선을 수용할 센트럴시티터미널과 영동선 대합실, 화물집하장이 준공됐다. 특히 서울고속버스터미널과 센트럴시티터미널 사이에 신세계백화점과 JW메리어트 호텔 서울이 자리 잡아 쇼핑과 숙식까지 해결할 수 있는 편리한 21세기형 터미널로 새 단장됐다.
시민 생활 엿볼 수 있는 서울미래유산
서울고속버스터미널은 서울 시민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장소라는 의미에서 2013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개장 당시 주차장이었던 10층은 요즘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서울에서 50여 년을 살고 있는 필자도 지난 2021년에야 이곳을 오를 수 있었다. 그동안 10층은 고사하고 2층조차 가 본 일이 거의 없었는데, 때마침 서울시 보조금 사업인 서울 미래유산 답사를 맡게 돼 고속터미널을 자세히 알게 되는 기회를 가졌다. 서울고속버스터미널이 서울시가 지정한 서울 미래유산이기 때문에 이곳에서 답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서울시는 서울고속버스터미널의 서울미래유산 지정에 대해 “1970년대부터 서울과 지방을 잇는 버스 여객 및 화물을 수송하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국내 최대, 서울의 대표적인 버스터미널이다. 많은 시민들이 이용하는 종합터미널이자 ‘민족 대이동’이라 표현되는 귀성·귀경길 중심지로 서울시민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장소란 의미에서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했다”고 그 이유를 밝혔다.
당시 10층에 처음 올라가 본 느낌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흔히 볼 수 있는 녹색 방수도포로 덮인 옥상의 모습이 아니라 녹색 나무와 풀로 뒤덮인 옥상 정원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해 서울시에서 옥상 녹화사업의 일환으로 고속버스터미널 옥상의 1만3000㎡ 면적을 녹지로 만들었다. 10층엔 옥탑 개념의 건물이 있는데 놀랍게도 그 건물에 천주교회와 음식점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시 20여 명의 답사팀이 일제히 경탄했다. 누구도 이곳에 이런 시설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10층 북측에 위치한 천주교 고속터미널성당은 서울대교구 소속 제12서초지구에 속한 11개 성당 중 한 곳이다. 남측으로는 ‘포석정’과 ‘육각고기’란 식당 두 곳이 거대 야장을 두고 영업하고 있다. 야장에서 식사하기 좋은 봄·가을 피크 시간대에는 한 시간 정도 웨이팅은 기본이다.
고기 냄새 그득한 야장 공간 맛집
포석정은 서울고속터미널 10층 너른 야장을 자랑하는 흑돼지 구이 전문점이다.
10층으로 올라가다 보면 엘리베이터 안을 가득 채운 숯불구이 고기 냄새에 흠칫 놀라게 된다. 옷에 밴 고기 냄새가 엘리베이터 안을 장악한 것이다. 또한 고기 굽는 연기가 엘리베이터로 직접 들어갈 수도 있을 정도로 많은 양의 고기가 불판 위에서 지글거리는 곳이 이곳 야장이다.
두 번째 놀라움은 바로 이 야장의 넓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작은 축구장 크기의 엄청난 넓이를 자랑하는 야장과 이를 꽉 채운 식객들이 분주히 고기 굽는 장면은 이를 처음 본 사람을 압도한다.
먼저 생긴 ‘포석정’은 지리산 토종돼지를 사용해 숯불구이와 두루치기를 전문으로 하는 곳이다. 한우 육회와 생등심을 팔지만 예약해야 맛볼 수 있다. 현장에 가 보면 한우를 먹는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대부분 숯불구이와 두루치기를 굽고 볶는다. 서넛이 오면 대부분 두 가지 메뉴를 같이 주문한다. 두루치기를 먹어야 볶음밥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저녁 무렵 자리에 앉으면 멀리 북쪽으로 남산 서울N타워가 눈에 들어온다. 늦은 오후 해가 서쪽으로 뉘엿거리면 야장엔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우면서 운치를 한층 더한다. 포석정과 육각고기는 서로 붙어 있어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어디가 어딘지 구분하기 힘들다. 치열하게 경쟁하는 업장들이지만 상도를 지키며 이웃과 더불어 사는 모습이 정겹다.
대기가 20팀 있었지만 일전에 포기한 터라 오늘만큼은 엉덩이를 무겁게 하고 진득하니 기다렸다. 홀을 주관하는 남성분은 예리한 눈썰미와 속도감 있는 서빙으로 넓은 야장을 나름대로 장악하면서 주문이 꼬이거나 계산이 누락되는 것을 막으며 적절히 조절했다. 장사의 고수가 있다면 바로 저분이 아닐까 싶을 정도의 내공과 스킬이 느껴진다. 주문받는 홀 서버들의 빠른 손놀림과 스몰 토크도 이곳의 고기 맛을 끌어올리는 요소다.
박피가 덜 된 쫄깃하고 꼬들한 지리산 토종돼지가 짙은 연기를 내며 구워지고 있을 무렵 해가 산을 넘었나 보다. 사위가 점점 어두워지더니 야장의 전등불이 더욱 밝게 빛났다. 진짜 포석정(鮑石亭)은 경북 경주시 배동, 신라 별궁이 있던 정자로 사적 제1호라는 사실을 이참에 다시 들춰 본다.
후발주자 육각고기는 육즙이 흐르는 각고기라는 뜻의 상호를 가진 참숯 직화구이 전문점이다. 경부선터미널 옥상에 위치한 ‘루프탑 고기집’으로 이름나 있다. 흑돼지 생오겹살과 이베리코 꽃목살, 와규 세트가 대표 메뉴다. 포석정과 육각고기는 놓인 환경이 같다는 면에서 원육과 메뉴 구성에서 자웅을 겨루고 있는 양상이다.
비 오는 장마철엔 야장이 철수하지만 홀 안에서 내리는 빗소리를 곁들이 메뉴 삼을 수 있는 것이 이곳의 장점이 아닐까 싶다. 특별한 장소에서의 독특한 미식 경험은 잔상이 오래 남는다. 필자는 아직도 공복에 강제로 맡은 엘리베이터 안 돼지구이 냄새가 잊히질 않는다. 서울고속버스터미널에도 포석정이 있다는 사실, 이제 아셨는가.
[유성호의 미각 여행] 서울고속버스터미널 10층에 ‘포석정’이 있다고? < 유성호의 미각여행 < 칼럼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