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접하는 현대미술은 그 이름에서부터 거리감을 안긴다. ‘현대’와 ‘미술’이 결합한 이 용어에서 우리는 ‘현대’라는 모호한 단어에 주목하게 된다. 현대는 20세기를 뜻하는가, 19세기인가, 아니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인가. 그 경계는 명확하지 않다. 학계에서도 이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현대미술은 시작부터 낯설다. 그러나 그 배경과 흐름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 안에서 분명한 즐거움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화가의 주체성이 본격화한 19세기 말부터, 미적 규범이 무너진 추상표현주의와 개념미술, 그리고 예술의 경계마저 허물어진 오늘날까지 그 흐름은 유효하게 이어진다. 이번 시리즈에서는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 있었던 현대미술가들을 통해 주요 사조와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현대미술의 기원을 논할 때 흔히 비엔나 분리파나 인상주의를 떠올린다. 그러나 오늘 주목할 인물은 이들과 접점을 공유하면서도 그 경계를 벗어난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이다. 그의 극적인 삶과 예술 세계, 그리고 ‘원시주의’는 당대 미술계에 새로운 충격을 안겼고, 이후의 예술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현대미술사의 한 축을 형성했다.
폴고갱(Paul Gauguin), photography, ca. 1891 / 출처: 위키피디아
파리의 증권인에서 부랑자 화가로
1848년 파리에서 태어난 고갱은 외할머니 플로라 트리스탄(Flora Tristan, 1803–1844)의 급진적인 사상적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녀는 사회주의자이자 여성운동가, 작가였다. 고갱은 유년기를 페루에서 보내고 7세에 프랑스로 돌아온 뒤 선원과 해군 생활을 경험했다. 이후 어머니 지인의 소개로 증권 거래인의 길에 들어선 그는 환전소 직원에서 증권 중개인까지 차근차근 성공을 쌓아 한 해 4만 프랑을 버는 부르주아로 자리 잡았다.
덴마크 코펜하겐 출신의 명문가 딸 메테 가드(Mette Sophie Gad)와 결혼해 다섯 자녀를 둔 그는, 결혼과 동시에 그림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수집을 넘어 직접 그리기 시작한 그는 특히 인상주의 회화에 깊은 감동을 받았고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와의 교류를 통해 본격적인 화가의 길을 모색하게 된다.
그의 부르주아 생활은 1882년 프랑스 주식시장 붕괴로 무너졌다. 이듬해인 1883년 그는 서른다섯의 나이에 전업 화가로 전향하며 안락한 삶과 가정을 떠나 예술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이후 프랑스 각지를 떠돌던 그는 타히티로 향하며 본격적으로 ‘문명’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했다.
고갱이 그린 와이프 Mette Gad (Madame Gaugin) in an Evening Dress by Gaugin (1884) / 출처: 위키아트
전업 화가로서의 초기 고갱은 인상주의의 영향을 짙게 드러냈다. 그러나 그는 이내 기존의 양식을 넘어서기 위해 프랑스 브르타뉴의 퐁타벤(Pont-Aven)으로 향한다. 도시 생활에 지친 그는 이곳에서 전통적 삶과 자연에 매료되었고, 동료 화가들과 공동생활을 하며 ‘종합주의(Synthetism)’라는 독자적 양식을 확립했다. 종합주의는 대상을 단순화하고 강렬한 색채로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고갱의 대표적 화풍이 된다.
설교후 환상(Vision after the sermon), 1888, 스코틀랜든 국립미술관 소장 / 출처: 브리타니카
브르타뉴조차 예술적 갈증을 해소해 주지는 못했다. 그는 경제적 궁핍을 벗어나고자 1891년 남태평양의 타히티로 떠난다. 그러나 타히티는 그의 기대와 달랐다. 이미 서구 식민지화가 진행된 문명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그는 수도 파페에테(Papeete)를 떠나 외곽 지역에서 더욱 원시적인 삶을 마주하게 된다.
타히티의 여인들 (Femmes de Tahiti), 1891, 오르세미술관 소장 /출처: 위키피디아
그곳에서 그는 원주민 여성들을 모델로 한 그림과 그들의 신화를 반영한 작업을 통해 독자적 예술 세계를 펼쳤다. <타히티의 여인들(Femmes de Tahiti)>,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D’où venons-nous? Que sommes-nous? Où allons-nous?)>, <지켜보고 있는 망자의 혼(Spirit of the Dead Watching)> 등 대표작들에는 강렬한 색채, 단순화된 형태, 상징적 모티프가 두드러진다. 그는 서구 전통의 원근법과 명암법을 벗어나 평면적이고 장식적인 구성을 통해 회화의 새로운 시각 언어를 창조해 냈다.
그의 예술은 타히티에서 더욱 풍요로워졌지만, 삶은 더욱 궁핍해졌다. 가난, 병, 외로움 속에서 그는 고통받았다. 1892년 11월 2일, 그가 남긴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고백이 담겨 있다.
“건강이 안 좋다. 병들어서가 아니라(날씨는 엄청 좋다), 돈 걱정 때문이다. 이제 늙었다. 당면한 일들을 해결하자니, 제대로 먹지도 못한다. 빵 쪼가리와 차, 그러니 바짝 말랐다….”
이후 다시 프랑스로 돌아갔던 그는 2년 뒤 타히티로 복귀했고, 1903년 마르키즈 제도에서 아사(餓死)로 생을 마감한다. 죽는 해까지도 그는 그림을 놓지 않았다.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D’où venons-nous? Que sommes-nous? Où allons-nous?)>, <지켜보고 있는 망자의 혼(Spirit of the Dead Watching), 1897-1898, 보스턴 미술관 소장 / 출처: 위키피티아
원시주의, 도시를 벗어나려는 마음
고갱의 삶은 한 예술가의 편력이자 19세기 말 유럽 사회의 위기를 반영하는 징후다. 그는 왜 안락한 삶을 버리고 미지의 섬으로 떠났을까? 그 선택은 이성적이라기보다 문명에 대한 반감과 본능적 충동에 가까웠다. 타히티에서도 그는 결코 왕처럼 살지 못했다. 가난과 병, 옥살이 끝에 아사로 생을 마감했다.
19세기 말,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간의 감각은 억압받고 있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문명 이전의 세계’, 즉 원시적인 삶에 대한 동경이 예술가들 사이에서 퍼져 나갔다. 고갱은 이 흐름의 중심에 있었다. 그의 원시주의는 색채를 감정의 수단으로 삼고, 단순화를 통해 대상을 본질로 환원하려 했다. 물론 이를 비판하는 일각에서는 식민주의·이국취향의 전형으로 바라본다. 충분히 이런 견지에서도 바라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비판적인 시각에도 불구하고 고갱의 원시주의는 미술사적으로도 그리고 현대미술의 맥락에서도 큰 역할을 했음은 분명하다.
고갱이 후대에 미친 영향은 대표적으로 야수파가 있다. 그의 회화는 기존 아카데미즘의 형식을 벗어난 화면 구성과 직관적인 색채 사용을 통해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자유를 제시했다.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앙드레 드랭(André Derain) 같은 초기 야수파 화가들은 고갱의 색채 실험에 영향을 받아 대담한 회화 언어를 펼쳤다. 독일 표현주의 작가들인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와 에밀 놀데(Emil Nolde)에게 고갱은 직접적인 영향보다는 ‘문명 이전’에 대한 동경과 감정 해방이라는 정신적 교집합의 상징으로 남았다. 직접적인 영향을 볼 수 있는 야수파 그 중에 마티스 그리고 간접적이나 그 영향이 일부 발현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독일 표현주의까지 그의 영향은 현대미술의 태동에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황색의 그리스토( Le Christ jaune), 1889, 버팔로 AKG 미술관 소장 /출처: 위키피디아
예술을 넘어 삶의 본질에 닿다
생전에는 외면받았지만 고갱의 예술은 시간이 흐르며 재평가되었다. 문명의 껍질을 벗고 인간 본성을 응시한 그의 삶과 예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본질적 질문을 던진다. 단순한 이국적 미학을 넘어, 원초적 생명력과 영적 울림을 전하는 그의 작품은 현대의 시선에서도 유효하다.
고갱은 현대미술의 지평을 확장한 선구자였다. 그의 원시주의는 예술을 ‘아름다움의 재현’에서 ‘존재의 탐구’로 전환했다. 예술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묻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폴 고갱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현대미술가 열전 ①] 도시를 떠나 원시의 삶으로 - 폴 고갱 < 미술일반 < 미술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