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상 스스로 권좌에서 물러난 지도자는 손에 꼽을 정도다. 로마제국의 디오클레티아누스,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 청나라 건륭제, 일본의 아키히토 천황, 조선의 태종 이방원, 그리고 사랑을 위해 왕위를 포기한 영국의 에드워드 8세 정도를 사례로 들 수 있다. 이들의 이름이 특별히 기억되는 이유는 단순히 위대한 통치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았다’는 점에서 드물고 특별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군주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반란을 진압하고, 때로는 자식마저 숙청했다. 그렇다면 왜 자발적 퇴위는 역사 속에서 이토록 희귀한가? 그 답은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욕망, 곧 ‘권력의 달콤함에 대한 집착’에서 찾을 수 있다.
왕, 황제, 대통령과 같은 지위는 단순한 책임의 자리가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 방식 자체를 규정한다. 권력을 가진다는 것은 단지 명령을 내리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이들의 시선과 기대, 두려움 위에 올라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카를 5세는 퇴위 후 수도원에서 남은 생을 명상과 기도로 보냈다. 권력을 버린다는 것은 자신이 쌓아온 모든 의미 체계를 뒤로한 채, 무(無)의 자리로 내려오는 것이다. 이는 단지 용기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적 위기의 수용 여부다.
인간의 진화적 본능은 권력을 지향한다. 선사시대부터 식량, 안전, 짝짓기 등 생존에 필요한 모든 자원은 지배 서열에서 높을수록 우선권을 가졌다. 오늘날 정치, 경제, 사회 권력은 이 본능의 현대적 표현이다. 신경과학 연구에 따르면, 권력을 가진 사람은 도파민 분비가 증가하며, 통제감과 성취감에 중독된다. 결국 권력은 뇌에 쾌락을 주는 약물과도 같으며, 이를 자발적으로 버리는 일은 본능에 정면으로 맞서는 고통스러운 행위다.
그럼에도 극히 일부는 권력을 스스로 내려놓았다. 스스로 물러난 이들은 어떻게 욕망을 다스렸을까? 카를 5세는 종교개혁과 제국 내 갈등으로 지친 끝에 수도원에 들어가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택했다. 에드워드 8세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삶을 위해 왕이라는 타이틀을 버렸다. 욕망보다 더 큰 가치에 반응했기에, 그들은 권력을 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예외적 선택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그런 내적 가치를 감각하지 못하거나, 권력의 달콤함을 내려놓을 만큼 자신과의 싸움에 이기지 못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민주공화정의 위대한 발명이 빛을 발한다. 고대 아테네에서 시작된 공화적 전통은 로마 공화정, 근대 시민혁명을 거쳐 현대 헌정체제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권력욕을 제도적으로 견제하려는 시도였다.
선출직 임기의 제한, 삼권분립, 헌법에 의한 권한 제한, 정기적인 선거와 교체, 이 모든 장치는 “권력은 영원할 수 없다”라는 선언이다.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일정 시간이 지나면 권좌에서 내려와야 하며, 누구도 그 자리를 영구히 소유할 수 없다. 이는 인간 욕망에 대한 이성의 제도화된 반격이다. 하지만 이 장치조차 완전한 해결책은 못됐다. 일부 지도자는 임기 연장을 시도하고, 법을 바꾸거나 장기 집권을 꾀하며 권력욕을 드러낸다. 욕망은 제도로 다스려지지 않는다. 다만 제도를 통해 늦춰지고 관리될 뿐이다.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권력을 쉽게 내려놓는 사람은 드물다. CEO, 대학 총장, 정당 대표, 종교 지도자 등 현대판 ‘군주’들은 명예퇴직조차 거부하고 직위를 연장하려 애쓴다. 심지어 퇴임 후에도 '명예 회장', '상임고문'이라는 형식을 통해 간접 권력을 유지하려 한다. 이는 권력의 중독성과 자아 동일시 현상 때문이다. 많은 사람은 자신이 이룬 것이 아니라, 자신이 차지한 지위를 자아로 착각한다. 그 자리를 잃는 순간, 자신도 사라진다고 느끼는 것이다.
스스로 권좌에서 내려온 이들은 인간 욕망의 중력장을 벗어난 자들이다. 스스로 물러난다는 것은 단지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진화적 고비를 상징하는 일이다. 인간은 권력을 쥘 때보다 내려놓을 때 더 많은 내적 성숙을 요한다. 그것은 욕망과 정체성의 분리, 존재에 대한 재해석, 삶의 본질에 대한 회심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권력의 거울 앞에서, 우리는 자신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나는 권력 그 자체가 아니다"라고 외칠 수 있어야 한다. 그 길은 쉽지 않다. 권력은 곧 사라질 수 있다는 전제 위에서만, 건강한 사회는 존속할 수 있다. 그래야 겸손해질 수 있다. 그리고 그 전제를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개인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권력을 넘어선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권력의 달콤함이 주는 중독이 얼마나 무서운지,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일상의 리흘라] 권좌에서 스스로 내려오는 사례가 드문 이유 < 일상의 리흘라 < 칼럼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