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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가 열전 ➁] 검은 사각형, 예술의 제로 디그

by 데일리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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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지미르 말레비치(Kasimir Malevich, 1878-1935)의 사진, 1925년 촬영 / 출처: 위키피디아

카지미르 말레비치(Kasimir Malevich, 1878-1935)는 기하학적 추상미술의 선구자, 순수한 회화 미술인 절대주의 화가로 일컬어진다. 그가 활동했던 20세기 초 러시아는 새로운 미술 양식과 실험이 넘쳐나던 시기였다. 신원시주의(Neoprimitivism), 광선주의(Rayonism), 입체미래주의(Cubo-futurism), 절대주의(Supre-matism), 구성주의(Constructivism) 등 다양한 흐름이 등장했고, 이 시대를 ‘러시아 아방가르드'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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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지미르 말레비치, 검은 사각형, 1915, oil on linen, 79.5x79.5cm.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출처: 위키피디아

말레비치는 그중에서도 이전의 고전 미술에서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던 ‘완전히 새까만 화면’을 작품으로 구현했다. 캔버스를 가득 채운 이 검은 사각형은 20세기 미술계에 커다란 충격과 질문을 동시에 던졌다. 그는 어떻게 이 단순한 사각형을, ‘예술’이라 말할 수 있었을까? 이는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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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전시 전경, 페트로그라드, 1915 / 출처: 위키피디아

1915년 12월 페트로그라드에서 개최된 《0.10》 전시에서, 말레비치는 흰 벽 모서리의 가장 높은 곳에 <검은 사각형>을 걸었다. 이 배치는 러시아 전통 가정의 성화를 걸던 자리와 같았고, 작품은 마치 새로운 신념처럼 회화의 재현과 구상에서의 결별을 선언처럼 보였다. 기존의 미술 관념과는 달리, 그의 작품에서는 기표(index)라고 불리는 물리적인 대상을 찾을 수 없다. 캔버스에는 오직 ‘검은 사각형’ 하나만이 존재한다. 그 외의 모든 것은 의도적으로 지워졌다. 말레비치는 이를 “어떠한 색채도, 빛도 없는 영도(zero degree)”라고 불렀다. 이는 그 이상의 어떠한 것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회화의 기본 단위로, 어떠한 맥락도 내포하지 않는 순수한 상태를 의미한다. 그는 평평하고 경계가 없는 형태 자체가 작품의 전부라는 새로운 발상으로 구상 예술에 도전했다.

이러한 급진적인 실험은 동시대 사상가들의 담론과도 연결된다. 독일의 미술사학자 빌헬름 보링거(Wilhelm Worringer, 1881-1965)는 저서 『추상과 감정이입(Abstraction and Empathy)』(1908)에서 “추상 충동”이라는 개념을 설명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외부 세계에 두려움을 느낄 때 추상적인 형식에 끌린다. 이러한 관점으로 작품을 보면 <검은 사각형>은 격변하는 시대 속 불안정한 현실을 반영한 심리적 반응이다. 하지만 이 설명은 화가에게 영향을 미친 요인이 오직 자연환경 뿐이라고 결론짓도록 한다. 인간은 총체적 경험 등의 다양한 요인에 영향을 받는데, 이러한 범주를 좁히고 단순화시킨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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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 칸딘스키(Vasily Kandinsky), Sketch for "Composition II", 1909-1910, Oil on canvas, 97.5x131.1 cm, 구겐하임 미술관 / 출처: 구겐하임 미술관

그와 동시대 추상미술 화가였던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는 보링거와는 다른 입장을 가졌다. 그는 추상을 오히려 ‘내적 필연성’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으며, 외부 환경이 아닌 예술가 내면의 소리에 따라 형식이 생성된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있어 추상은 감정의 소리였고, 세계와의 화해였다. 그렇다면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작품들은 어떤 요인으로 인해 탄생하게 된 것일까? 내적 요인으로 인한 외부 세계와의 화해일까, 외부 세계의 거부 반응일까. 그의 절대주의 작품은 외부 세계에 대한 저항이자 동시에 내면의 해방이라고 할 수 있다. 두 관점 중 한쪽으로 치우치기보다는 양쪽에 모두 맞닿아 있다. 분명한 것은, 그가 미술 표현의 본질을 탐구하고자 한 예술가였다는 것이다.

말레비치는 색채를 버리고 의미만을 남기려 했고, 누구보다 빠르게 새로운 회화의 가능성에 다가섰다. 특히 회화의 모방 개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며 ‘회화 언어의 투명성’이라는 개념을 극한까지 밀어붙였다. 이를 위해 그는 두 가지 실험을 시도했다. 첫째는 사물이 재현되어야 할 자리에 단어 또는 제목만을 남기는 방식이었다. 둘째는 실제 사물을 캔버스 위에 그대로 콜라주하는 방식이다. <모스크바 제1사단의 용사>(1914)에서는 온도계나 우표 같은 오브제가 그림에 삽입되며 회화 자체가 하나의 봉투처럼 전환되었다. 구성 중 일부분은 작가가 러시아에서 본 파리의 가장 전위적인 컬렉션이 레퍼런스로 사용된 것으로, 피카소나 브라크의 콜라주를 연상시킨다. 파피에 콜레 기법이나 나무를 문지른 듯한 효과 등이 대표적으로 영향을 받은 요소이다. 굵은 선으로 면을 나누는 방식들도 조각적 입체주의 화풍과 유사한 면이 있다.

이러한 말레비치의 동어반복적이고 반어적인 실험은 후대의 예술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고, 미술사의 흐름을 바꾸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1916년부터 시작된 연작 중 하나인 <흰색 위에 흰색>(1918)은 흰 배경 위에 흰 정사각형을 사선으로 그린 작품이다. 얼핏 보면 모두 흰색 같지만, 안쪽 사각형은 푸른빛을 띤 흰색, 배경은 따뜻한 미색이다. 이 작품이 화이트 큐브의 전시공간에 걸리게 될 때는 작품의 흰 색채 자체로 건축 공간 속으로 소멸되는 듯한 강렬한 시각적 효과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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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지미르 말레비치(Kasimir Malevich), 자화상(Self-portrait), 1933, Oil on canvas, 73x66 cm, 러시아 미술관 / 출처: 위키아트

색채가 사라지고, 흰 캔버스 위의 흰 형태만이 남았던 그의 후기 작품은 예술적 존재론의 끝을 보여주는 듯했다. 하지만 혁명 이후, 말레비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 속에서 점차 자신의 회화적 자유를 잃어갔다. 그의 작업이 1918년 볼셰비키 정부가 무정부주의 반란을 억압한 후 러시아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에게 압력을 가하면서 문제가 된 것이다. 스탈린 체제 아래 추상은 금지되었고, 그의 회화는 점점 과거로부터 빌려온 형식으로 후퇴한다. 그는 국가의 엄격한 체제하에 결국 영웅적이면서 신고전주의적인 비례를 따르게 되었고, 전과 같은 추상적 묘사는 사라진 듯 보였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는 여전히 아주 작은 절대주의의 상징, 가령 벨트나 모자의 기하학적 장식이 묘사되어 있었다. 1933년작 <자화상>에는 구상과 재현을 충실히 이행한 듯한 그의 모습의 오른쪽 아래에 작게 검은 사각형이 존재한다. 작은 크기라 지나치기 쉬운 이 절대주의 기호들은 미약해 보이지만, 마지막 저항의 처절한 흔적처럼 남아 있다. 그가 러시아의 정치적 제약과 검열 속에서도 끝내 추상의 가치를 포기하지 않았음을 자화상에 당당히 드러낸 것이다.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은 더 이상 환원할 수 없는, 회화의 가장 깊고 정제된 형태였다. 모든 형상이 사라진 그 빈 자리에서 그는 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효율과 분업이 지배하고, 알고리즘이 이미지를 자동으로 소비하도록 하는 시대에, <검은 사각형>은 여전히 예술의 본질에 어디에 있는지를 되묻는다. 이 사각형에는 하나의 기하학 도형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회화가 감히 도달한 가장 순수한 사유의 공간이자, ‘형식’이라는 미술의 언어가 침묵에 다다른 순간이다. 이미지와 정보의 홍수 속에 떠밀리는 오늘날의 관객은 이 작품 앞에서 정보 과잉으로부터 벗어나 깊은 몰입과 자유를 경험하게 된다. 말레비치의 작품 앞에서, 우리는 어떤 질문을 던질 수 있을까? 그림이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때, 우리는 스스로 무엇을 말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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