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뜨거운 폭염이 잇따르고 있다. 더운 여름 날씨를 시원하게 만들어 주는 장르는 단연 공포물이다. 이 가운데 한국 고전 설화를 기반으로 제작된 KBS 드라마 <전설의 고향> 시리즈는 오랜 시간 동안 사랑받아 온 대표적인 한국형 공포물이다.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방영한 <전설의 고향> 시리즈는 매해 여름밤을 오싹하게 만들어 주었고, 아이들이 잠 못 이룰 정도로 리얼한 연출력을 선보인 납량특집의 효시이기도 하다. 기성세대라면 누구나 <전설의 고향> 시리즈를 알고 본 기억이 있을 정도로 당시 그 영향력은 지대했다.
전설의 고향 시리즈에 등장하는 구미호의 모습. ⓒ KBS
이 드라마에서 가장 많이 출연한 주인공은 누구일까? 바로, ‘구미호(九尾狐)’이다. 꼬리가 아홉 개 달린 여우인 구미호는 여성으로 둔갑하여 혼인을 맺거나 인간이 되기 위해 간을 빼먹는 등 사악한 요괴 혹은 빌런으로 등장한다. 그렇다면, 구미호는 과연 처음부터 나쁜 이미지였을까? 사실 동양 문화 속 구미호는 매우 다양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 말인즉슨, 구미호가 처음부터 나쁜 존재는 아니었다는 뜻이다. <미술 속 동물 이야기>, 2025년 8월 세 편의 칼럼은 <여름 특집>으로 동양 신화 속 구미호 이야기를 준비하였다.
고대 중국 신화의 구미호
동양 신화의 뿌리인 중국 신화에서 구미호는 어떤 존재였을까? 구미호에 관한 가장 이른 기록의 사례는 『산해경(山海經)』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 최고(最古)의 백과사전인 『산해경』은 동양 판타지 장르의 뿌리이기도 한데 『산해경』 「남산경(南山經)」에는 “어떤 짐승은 생긴 게 여우 같은데 꼬리는 아홉에 그 소리는 어린아이 같으며 사람을 잘 잡아먹는다. 이것을 먹으면 요사스러운 기운에 빠지지 않는다.”라는 기록이 「대황동경(大荒東經)」에는 “청구국(靑丘國)이 있는데 꼬리가 아홉 개 달린 여우가 산다.”라는 내용이 확인된다.
(좌)『산해경』 명대본 구미호도, 중국 명대 16세기. ⓒ 『산해경』 (우)『청궁수보』의 구미호도, 중국 청대 1760년. ⓒ 북경고궁박물원
『산해경』 기록 중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내용만을 가지고 처음부터 구미호가 나쁜 존재가 아니냐는 의견이 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 원시 신앙인 토테미즘(Totemism)에서 여우는 신격화되기도 하였는데, 이를 보여주듯이 동진(東晉)의 학자 곽박(郭璞, 276-324)은 『산해경』 「대황동경」 구미호 기록 밑에 ‘태평성대가 도래하면 출현한다는 상서로운 여우’라는 주석을 달아놓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구미호는 그 탄생부터 양면성을 지닌 성격으로 묘사되고 있다.
고대 여우 신앙 속의 구미호
이후 편찬된 고대 문헌을 살펴보면 구미호의 성격이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는 양상이 보인다. 대표적으로 『현중기(玄中記)』 「설호(說狐)」편에는 구미호의 또 다른 명칭인 ‘천호(天狐)’에 관한 내용이 확인되는데 요사스러우면서도 신비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여우는 50살이 되면 능히 여인으로 변할 수 있으며, 100살이 되면 아리따운 여인이 될 수 있으며, 신통한 무당이 될 수도 있다. 혹은 사내가 되어 여인과 교접하기도 한다. 천 리 밖의 일도 훤히 알며, 사람을 유혹하는 것을 잘하고 사람을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하여 이성을 잃게 한다. 천 살이 되면 하늘과 통하고, 천호가 된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부분은 여성으로 둔갑하는 고전 설화 속 구미호의 뿌리가 무려 천 년 이상의 전통을 지니고 있다는 점과 구미호가 신비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함께 당(唐)나라 때 활동한 장작(張鷟, 658-730)의 『조야첨재(朝野僉載)』에는 “당나라 초기부터 백성들은 여우 신을 많이 섬겼다. 집안에서 제사를 지내면서 복을 빌었으며 사람에게 바치는 것과 같은 음식을 여우에게 바쳤다. 그러나 섬기는 여우 신은 제각각 달랐다. 당시 속담에는 여우 요괴가 없으면 마을이 생기지 못한다는 말이 있었다.”라는 기록이 확인되어 여우 신앙과 함께 구미호가 신령스러운 존재였다는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신선계에 노니는 서수
이처럼 신령스러운 서수(瑞獸)이기도 한 구미호는 고대 중국미술에서 만날 수 있다. 그 사례는 고분미술(古墳美術)인데 주로 한(漢)나라 때 제작된 고분벽화와 화상석(畫像石)에서 그 모습이 확인된다. 고분미술에 표현되는 구미호는 신령스러움을 보여주듯이 신선계(神仙界)에 머물고 있다. 대표적으로 ‘서왕모(西王母)’가 산다는 ‘곤륜산(崑崙山)’에는 옥토끼와 두꺼비, 삼족오(三足烏), 우인(羽人) 등 다양한 서수와 신선이 표현되어 있는데 여기에 구미호가 함께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좌)『고금도서집성』 서왕모도, 중국 청대 1725년. ⓒ 『고금도서집성』 (우)요지연도 병풍의 서왕모, 조선후기. ⓒ 국립중앙박물관
서왕모는 도교 최고의 여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녀가 머무는 곤륜산 정상에는 ‘요지(瑤池)’라는 연못과 함께 먹으면 불로불사(不老不死)의 몸이 되는 ‘반도(蟠桃)’가 지천에 열려 있다고 한다. 이에 예로부터 곤륜산은 도교 문화 속 이상향인 동시에 평범한 인간의 몸으로는 도저히 갈 수 없거나 가기 힘들 정도로 험난한 코스를 거쳐야만 겨우 도달하는 장소였다. 게다가 곤륜산은 도교에서 사후 이상세계이기도 하니, 살아있는 자가 곤륜산에 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사천성 출토 화상석의 서왕모 무리, 중국 후한대. ⓒ 사천성박물관
바로, 이와 같은 곤륜산에 구미호가 노닐고 있다. 구미호와 함께 등장하는 삼족오와 옥토끼, 두꺼비는 고대 동양 문화에서 해와 달 등 천상계(天上界)와 신선계를 상징하는 존재로 알려져 있다. 이는 즉, 구미호를 비롯한 앞서 열거한 동물들은 서왕모의 명을 따르는 전령인 동시에 천상계를 구성하는 영험한 존재이기에 곤륜산에 머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통해 구미호 역시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신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사천성 출토 화상석의 서왕모 무리, 중국 후한대. ⓒ 사천성박물관
미술로 표현되는 구미호는 서왕모를 중심으로 좌우측 혹은 위쪽에 배치되어 있기도 하며 서왕모가 없는 경우는 삼족오와 둘이 표현된 경우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구미호가 삼족오와 짝을 이루는 이유에 대해 아직 정확히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한 가지 추측을 해보자면 아마 음양(陰陽)의 조화를 상징하는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하남성 정주 출토 화상석의 구미호와 삼족오, 중국 후한대. ⓒ 정주시박물관
동양에서 삼족오는 태양과 양(陽)의 상징하는 존재이기에 달과 음(陰)을 상징하는 옥토끼, 두꺼비와 함께 배치되곤 하였다. 그렇다면 구미호 역시 달과 음(陰)을 상징하는 또 다른 존재는 아닐까? 여우라는 동물이 본래 야행성의 습성을 지니고 있고, 주로 달빛에 비추는 모습으로 묘사된다는 점을 보았을 때 이 점 또한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이처럼, 고대 동양 문화 속 구미호는 신비한 힘을 지닌 신앙의 대상으로, 신선계에 머무는 이상세계의 상징으로 표현되었다.
마치며
아득히 먼 고대 중에서 탄생한 구미호, 지금처럼 요괴의 이미지가 아닌 신비한 힘을 지닌 서수, 신선의 전령으로 등장하였고, 이를 보여주듯이 미술 속 구미호는 서왕모가 머문다는 곤륜산에 노니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그렇다면 우리 인식 속에 박힌 요괴 구미호는 도대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이는 다음 글인 일본과 한국의 구미호편에서 더욱 자세히 다뤄보도록 하겠다.
[납량특집]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가 당신을 찾아간다 - 구미호 이야기 1 < 김용덕의 미술 속 동물 이야기 < 칼럼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