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미술관 《민족기록화전》 (1967.7.12.-8.31) 전시자료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서술할 때 일반적으로 1960-70년대는 추상과 단색화가 화단을 풍미했던 시대로 평가된다. 국전 체제의 리얼리즘에 반발하여 박서보, 김환기, 이응노와 같은 화가들이 회화 고유의 가치와 가능성을 목표로 하며 작품활동을 한 시대 말이다. 한편 바로 그 시기에 화단의 또 다른 곳에서는 전혀 다른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추상화가들이 캔버스 위의 서사를 지워나가고 있을 때, 그들은 동시에 500호(3.3×2.5m), 1000호(5.3×2.9m)의 거대한 캔버스에 국가 서사를 그리고 있었다. 1967년 여름 경복궁미술관에서는 큰 규모의 전시가 열렸다. 바로 《민족기록화전》(1967.7.12.-8.31)이다. 전시장을 가득 채운 것은 3·1운동, 6·25 전쟁, 4·19 혁명, 베트남 파병까지 한국 근현대사의 격동을 담은 거대한 그림 55점이었다. 놀라운 것은 이 거대한 국가 프로젝트에 참여한 작가들의 명단이다. 국전 중심의 원로 화가들뿐만 아니라, 추상의 선두에 섰던 화가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박서보, 정창섭, 윤형근, 윤명로 등 당시 가장 전위적이라 평가받던 젊은 추상화가들이 이 민족기록화 제작에 참여했다. 회화의 순수성을 외치며 모든 서사를 거부하던 이들이 어떻게 가장 노골적인 서사와 목적성을 띤 정치 선전 미술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일까?
왜 지금 민족기록화를 다시 이야기하는가
김흥수, '3·1 독립운동' 기념 엽서, 1967 /출처: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2025년은 광복 80주년이다. 지난 80년의 세월 동안 우리는 전쟁의 폐허 위에서 경제 성장을 이룩했고, 민주주의를 쟁취했으며, 세계가 주목하는 문화 강국으로 우뚝 섰다. 그 과정에서 국가는 어떻게 스스로의 역사를 쓰고 기억하려 했을까? 그리고 예술은 그 거대한 서사 앞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까? 이 연재에서는 광복 80주년을 맞아, 1960-70년대 박정희 정부 주도로 진행된 민족기록화 사업을 3회에 걸쳐 조명하고자 한다. 이 기획은 추상과 전위의 조명 뒤에 가려져 있던 한국 근현대미술사의 또 다른 얼굴을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민족기록화는 단순히 독재정권의 선전물로 치부되거나, 작가들의 숨기고 싶은 이력으로만 남겨지기에는 너무나 많은 질문을 담고 있다.
이 연재를 통해 우리는 권력과 예술의 복잡다단한 관계, 국가적 대의와 예술가의 개인적 욕망이 교차하는 지점을 살펴볼 것이다. 또한 거대한 캔버스가 손바닥만 한 엽서로 복제되어 대중의 일상에 파고드는 과정을 추적하며, 이미지를 통해 역사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유포되는지를 성찰하고자 한다. 80년의 역사를 쌓아 올린 지금, 이는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으며, 오늘날의 미술은 시대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되묻는 계기가 될 것이다.
1967년 여름, 미술관을 압도한 거대한 그림들
윤중식, '8·15 해방' 기념 엽서, 1967 /출처: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윤명로, '낙동강 전선 반공전' 기념 엽서, 1967 /출처: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전시가 개최된 1967년 여름의 풍경을 상상해보자. 경복궁미술관 전시장에 들어선 관람객들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압도당했을 것이다. 전시장 벽은 거대한 캔버스로 가득했다. 김흥수의 1000호짜리 <3·1 독립운동>에는 태극기를 든 군중이 묘사되어 있었고, 윤중식의 <8·15 해방>에는 기쁨이 넘쳤다. 전시장 깊숙이 들어갈수록 풍경은 더욱 참혹하고 격렬해졌다. 윤명로의 <낙동강 전선 반공전>, 김영주의 <서울시가전(9·28 수복)> 등 6·25 전쟁을 다룬 작품들은 포탄이 터지고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의 한복판으로 관객을 끌어들였다.
이 전시는 국방부, 문교부, 공보부, 그리고 5·16 민족상이 공동 주최한 관제(官製) 행사였다. 도록 서문은 전시 목적을 “선열들의 위업과 국군 용사들의 정신을 후손 만대에 보존 계승하여 민족적 긍지를 앙양”하는 것이라 밝혔고, 박정희 대통령은 격려사를 통해 “온 겨레가 한마음 한뜻으로 승공(勝共) 통일을 다짐할 것”을 당부했다. 목적은 분명했다. 미술을 통해 민족주의와 반공 이데올로기를 국민에게 각인시키는 것이다.
이에 대한 평단의 반응은 차가웠다. 평론가 이일은 “화가들이 종전에 큰 화폭을 경험하지 못해서인지 드라마틱한 움직임이나 분위기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라고 비판했으며, 오광수는 “대체적으로 데생력이 부족하고 지나치게 평면화된 작품들이 많았다”라고 했다. 실제로 몇몇 작품들은 마치 사진을 어설프게 확대해 놓은 것처럼 경직되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평론가들의 미학적 잣대와 별개로, 이 전시가 일반 관람객에게 주었을 시각적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다. 이일의 언급과 같이 ‘종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압도적인 크기와 전체 전시의 방대한 볼륨, 내용적 통일성은 개별 작품의 형식적, 양식적 완결성을 상대적으로 덜 부각시켰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유화로 그려진 거대한 그림 55개가 연대기 순으로 펼쳐지는 광경은 당시로써는 거대한 스펙터클이었을 것이다. 특히 《민족기록화전》 이후로 비슷한 주제로 1972년 《월남전 기록화 전시회》가 열렸고, 1973년부터 ‘기록화 5개년 계획’이 세워진 것을 감안하면, 정부에서는 《민족기록화전》을 의미 있는 전시로 받아들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모순과 딜레마: 이 작품들은 왜 잊혔는가?
김영주, '서울시가전(9·28 수복)' 기념엽서, 1967 /출처: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이러한 사건이 어째서 오랫동안 미술사의 주된 논의에서 비켜나 있었을까? 여기에는 몇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다. 첫째는 한국 현대미술사의 흐름을 기술하는 데에서의 딜레마 때문이다. 1960-70년대의 미술사는 국전으로 대표되는 권위에 맞서, 예술가들이 회화의 자율성과 순수성을 쟁취해 온 과정으로 그려지는 경향이 강하다. 이런 서사 속에서 전위의 기수였던 추상화가들이 정권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정치적 프로젝트에 대거 참여했다는 사실은 다루기 곤란하고 불편한 진실이 된다. 이 모순을 설명하는 순간, 저항과 순응이라는 이분법적 구도가 무너지며 미술사의 흐름은 한층 더 복잡하고 혼란스러워진다. 그러나 이 혼란을 살피는 것은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더욱 풍부하게 하며 주제에 대한 다면적인 접근을 가능하게 한다.
둘째, 작가와 유족들이 이 이력을 콤플렉스로 여겼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다수 작가들은 자신의 공식적인 연보에서 민족기록화 제작 이력을 의도적으로 누락하기도 했다. 이는 독재정권의 부역자라는 오명이 씌워질 것을 우려한 결과일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주제를 연구하는 것은 작가의 치부를 드러내는 일처럼 여겨져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민족기록화의 제작을 독재정권에의 부역이라는 관점에서만 바라본다면 자칫 평면적인 논의만이 이루어질 우려가 있다. 민족기록화는 화가들의 출세욕과 명예욕, 국가와 사회에 대한 봉사심, 새로운 양식의 시도, 국가적 후원에 대한 관심,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근대성의 경험 등 다양한 층위에서 다루어 질 수 있는 소재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앞서 언급했듯 이 작품들이 예술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목적이 뚜렷한 선전 미술에서 작가의 주체성과 예술적 창의성을 찾기 어렵다는 평이 강했다. 하지만 이 그림들을 단지 작품성이 떨어지는 그림으로만 정의한다면, 우리는 이 프로젝트가 당대 사회와 시각 문화에 미친 영향력을 놓치게 된다. 이 그림들은 미술관에 걸리기 위한 예술품이기 이전에, 국가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강력한 매체였다. 따라서 작품성 못지않게 그것이 담고 있는 메시지와 그것이 유포되는 방식, 그리고 그것이 대중에게 미친 영향력을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전위적인 예술가들을 거대한 국가 서사의 화폭 앞에 세웠는가? 단순한 강압이었을까, 아니면 자발적 선택이었을까? 혹은 그 둘 사이의 경계가 모호한, 시대가 만들어낸 필연이었을까? 다음 회에서는 이 거대한 프로젝트를 기획한 박정희 정권과 김종필의 의도, 그리고 화가들이 이 거래에 응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검토하고자 한다.
[광복 80주년 특집] 붓으로 그린 국가, '민족기록화'-1 < 미술일반 < 미술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