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홍대 이사회가 해체되어 재정난을 이유로 월급이 나오지 않은 것이 1년 남짓 계속되었다. 궁여지책으로 김향안은 학원을 개원해서 생활비에 보태야겠다고 생각했고 김환기와 함께 ‘서울미술원’이라는 상호로 원효로 90번지에 학원을 냈다. 김환기는 일반인과 학생들에게 미술 지도를, 김향안은 프랑스어를 가르쳤다. 하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접근성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학원을 한 차례 옮기기도 했다.
이 와중에도 김환기는 몸에 밴 성실함과 열정으로 학교와 학원을 오가면서 부지런히 작업했고 꾸준히 개인전을 개최했다. 중앙공보관은 김환기에게는 여러 번의 개인전을 개최한 의미 있는 장소다. 파리에서 돌아왔을 때는 《귀국전》을, 아파트 청약 납부금 마련하고자 《데생전》을 개최하는 등 1959년부터 1963년 미국에 정착하기 전까지 총 4회의 전시회를 중앙공보관에서 열었다. 물론 전시회를 해도 한 점도 못 파는 때도 있었고 큰돈을 마련할 수도 없었지만, 꾸준히 작업한 결과를 보여주고자 전시를 이어갔다.
(좌) 1963년 서울 중앙공보관, ⓒ국가기록원 (우)1962년 서울 중앙공보관(동영상에서 이미지 캡쳐) ⓒ e영상역사관
중앙공보관은 공보실 산하 전시관으로 1957년에 소공동(현재 북창동과 경계면)에 있었으며 여러 문화 행사를 비롯해 정부에서 하는 일을 소개하는 홍보관의 역할을 수행했다. 상업화랑이 부족하던 시절 전시관을 무료로 대여해 주던 중앙공보관은 많은 문화예술인들에게 사랑받는 공간이었다.
일제강점기 이곳은 경성기독교청년회유지재단의 재산이었다. 해방 후 귀속재산으로 취급되어 중앙공보관이 일부 불하받아 사용하던 건물이 법정 공방을 거치면서 패소하여 1968년까지 소공동에 있다가 이후 덕수궁 안쪽 가건물로 이전했다. 3개의 전시실을 운영했으며 거의 매주 새로운 전시회가 열렸다. 연평균 100여 건이 개최되었으며, 많은 문화인이 모이는 문화살롱 역할도 했다.
당시 미술, 공예, 사진 등 전 예술 분야를 대상으로 전시회 공간을 대여해 주었기 때문에 신청을 해놓고도 전시까지 많은 기간을 대기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었다. 전시 장소가 부족해 침체했던 미술시장을 견인하며 10년 이상 문화공간 역할을 했던 서울중앙공보관의 위치를 국가기록원 국무회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현재 소공동 부영호텔 신축 공사가 한창인 그 뒤쪽 골목에 있다. 여러 차례의 전시회로 부산하게 오갔을 김환기의 궤적을 생각하면, 당시 인기 전시 장이었음이 무색하게 주변은 인적이 많지 않다.
(좌) 1936년 경성지도에 파란 네모 표시의 중앙공보관 위치. 녹색 원은 현재 공사 중인 부영호텔 현장 ⓒ서울역사박물관 (우) 최근 위성사진 ⓒ네이버
1951년 창설된 상파울루 비엔날레는 베니스 비엔날레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미술 비엔날레다. 휘트니 비엔날레를 포함하여 세계 3대 비엔날레로 손꼽히기도 한다. 상파울루 비엔날레가 한국을 처음 초청한 건 1963년이다.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이었던 김환기는 1963년 제7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한국을 대표하는 커미셔너로 참석하게 된다. 참가 작가의 선정 문제로 파열음이 생기기도 했지만, 최종적으로 회화 분야에 김환기를 비롯해 서세옥, 김기창, 김영주, 유영국, 조각에 한영진, 판화에 유강열이 한국 대표로 각각 선출되었다. 모든 작가가 각 세 점씩 출품하여 총 21점의 작품이 소개되었다. 김환기는 <섬의 달밤>, <여름 달밤>, <운월(雲月)>을 출품했고 우리나라 화가로서는 처음 비엔날레에 참가해 명예상을 수상했다.
(좌) 동아일보, 1963년 12월 2일, 상파울루 비엔날레 참가기 (우) 전시위원장 소브리노와 함께한 김환기
김환기, 섬의 달밤, 1959, 캔버스에 유채, 95×146cm, 제7회 상파울루 비엔날레 출품작 ⓒ (재)환기재단·환기미술관
(좌) 김환기, 여름 달밤, 1961, 캔버스에 유채, 194×145.5cm ⓒ (재)환기재단·환기미술관 (우) 김환기, 운월(雲月), 1963, 캔버스에 유채, 193×129cm, 제7회 상파울루 비엔날레 출품작 ⓒ (재)환기재단·환기미술관
이 비엔날레를 통해 세계의 추상표현주의를 직접 접한 김환기는 미국 대표로 참가해 대상을 받은 아돌프 고틀리브(Adolf Gottlieb, 1903-1974)의 작품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좌) Adolf Gottlieb, Rolling, 1961, Oil on masonite, 182.8×228.6cm © Virginia Museum of Fine Arts, (우) Adolf Gottlieb, BLAST II, 1957, oil on canvas, 228.9×114.6cm, Private Collection, 제7회 상파울루비엔날레 출품작
"이번 대상을 받은 아돌프 고틀립은 참 좋았다. 미국에서 회화는 이 한 사람만 출전시켰다. 작은 게 백호 정도고 전부가 대작인데 홋수로 따질 수가 없었다. 모두 벽만큼씩 해서. 이런 대작들을 46점이나 쫙 걸었으니 그 장관이야말로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양뿐 아니라 내용도 좋았다. 내 감각과 동감되는 게 있었다. 퍽 애정이 가는 작가였다." (김환기, 「상파울로 비엔날 참가기」(1963. 10. 28).)
이 글에서는 고틀리브의 회화에서 받은 인상과 함께 우리나라의 출품 방식에 대한 아쉬움이 전해진다. 김환기가 점화로 이어지는 대작을 시작하는 계기도 이때 받은 감명에서 비롯된 것 같다.
김환기는 비엔날레 참가를 계기로 뉴욕으로 건너가 미국 화단에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그것이 그토록 그리운 조국과의 마지막이 될 줄은 그때는 짐작도 못했다. 고틀리브와도 좋은 동지로 미국에 있는 내내 인연을 이어가게 된다. 부산에서 만난 브루노 문정관과 파리에서 알게 된 윈스턴 부부의 도움을 받으며 김향안 없이 8개월 정도를 먼저 뉴욕에서 생활하게 된다.
처음엔 아내에게 일상의 안부를 묻는 편지를 보내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빨리 오라고 조르는 내용을 쓰기 시작한다. 김향안이 옆에 있어야 온전한 김환기였다. 경제적 상황은 여전히 좋지 못했다. 그나마 최순우의 도움으로 록펠러 재단의 기금을 알게 되었다. 재단이 미국과 아시아의 문화 교류 촉진을 위한 기금을 마련하고 예술인들을 지원해 준다는 것이다. 신청 결과 1964년 9월에 1년 동안 미국에서 그림 작업을 하는 데 필요한 재정을 지원받게 된다. 뉴욕 73가 160번지 아파트 샤먼스퀘어스튜디오 23호에 입주해 살게 되면서 록펠러 재단이 운영하는 아시아하우스갤러리에서 개인전도 개최하게 된다.
록펠러 재단의 후광으로 일급 화상들의 격찬이 이어졌지만, 뉴욕의 화상이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이라는 냉담한 현실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록펠러 재단의 지원도 끊기고 운이 없게도 타스카(Tasca) 화랑의 사기로 인해 말할 수 없는 생활고가 시작되었다. 제8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출품한 작품 14점의 반송 비용조차 지급할 수 없어 뉴욕항 세관 물류 창고에 보관되었다가 경매당하는 신세가 되기도 한다.
김환기는 무엇이라도 먹고 사는 일에 도움이 될 일을 하려 했지만 결국 포기하고 그림에 몰두한다. 그림이 생업이자 인생인 그에게 다른 일로 돈을 번다는 것은 먼 나라 일인 듯했다. 결국 김환기가 포기한 '재정'은 김향안의 몫이 되었다. 그녀는 백화점의 판매사원으로 일하면서 글도 쓰고, 돈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 했다. 김환기도 열심이었다. 한지나 색지를 이용한 콜라주, 신문지 위에 과슈나 유화로 그리기, 파피에 마셰(PapierMache, 종이나 펄프로 구성된 공예의 한 종류) 등 다양한 시도의 작업을 남기는데 이는 이 시기 경제적 어려움의 발로이기도 하다.
“이 무렵 우리는 재료도, 생활비도 떨어졌다. 그래서 나는 직장엘 나가기로 하고 작가는 종이로 오브제 작업을 시작했다. 색종이로 콜라주도 하고 「뉴욕타임즈」 신문지에 유화를 시도했다. 신문지가 발산하는 기름과 유채가 혼합되어 마치 종이를 다듬이질한 것과도 같은 윤택이 나는 것이 재미난다고 했다.” (김향안,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 우석출판사, 1989, 47쪽.)
(좌) 김환기, 무제, 1967, 신문지에 유채, 58×38cm, ⓒ(재)환기재단·환기미술관 (우) 김환기, 무제, 1967, 신문지에 유채, 58×38cm ⓒ (재)환기재단·환기미술관
(좌) 김환기, 무제, 1966, 종이에 채색, 33×25cm, ⓒ (재)환기재단·환기미술관 (중) 김환기, 무제, 1966, 종이 콜라주, 45×29cm, ⓒ (재)환기재단·환기미술관 (우) 김환기, 오브제, 1967, 파피에 마세(papier-mâché), 63×8×9cm, ⓒ (재)환기재단·환기미술관
김환기, 무제, 1969, 캔버스에 유채, 206×157cm, ⓒ (재)환기재단·환기미술관
뉴욕 시기는 여러 실험 과정을 거쳐 순수 추상으로의 화풍 변화를 이루며 보편적 조형을 모색하는 중요한 기점이 된다. 짧은 선들의 조형, 사각형 구획 화면에 독특한 기호들이 보여지는 ‘플랜츠 시리즈’, 선과 점의 수평적 배열, 사방 구도, 십자구도 등 다양한 실험의 결과, 김환기는 점화에 마음을 기울인다.
“미술은 하나의 질서이다. 점화가 성공할 것 같다.”(1965)
“선인가? 점인가? 선보다는 점이 개성적인 것 같다.”(1968)
1970년 2월 한국일보에서 한국미술대상에 응모해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국전 심사위원까지 지낸 김환기에게는 자존심이 상할 일일 수도 있지만 한국 미술의 발전을 바라는 마음으로 응모에 응했다. 그렇게 작업을 시작한 것이 김광섭의 시 <저녁에>의 한 구절이 작품의 제목이 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이다. 이 작품이 대상으로 선정되면서 김환기는 한국에 전면점화를 소개하며 완전 추상의 화풍 변화를 알렸다. 그리고 당대 유력한 화가들의 찬사가 이어졌다.
꾸준한 실험과 모색은 김환기식 필터를 장착하고 한국적 모더니즘으로 발현되었다. 전면점화는 이렇게 탄생한 보편적 조형 언어로 김환기의 아이덴티티가 되었다.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6-IV-70 #166, 1970, 코튼에 유채, 232×172cm ⓒ (재)환기재단·환기미술관
“김환기 씨의 작품은 대단합니다. 김 화백은 과거 우리나라에서나 파리 시대에나 동양적 체취가 물씬 풍기는 서정적인 작품을 제작해왔는데, 이제 그런 경향에서 완전히 탈피해 화풍이 180도로 달라졌습니다. 젊은 작가라면 모르지만 원로 작가가 이렇게 대담한 변모를 꾀했다는 것은 고귀한 일입니다.” (화가 남관)
“김 화백은 뉴욕 생활 가운데 많은 과정을 거치는 실험 작업을 했습니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도 그 중 한 작품임에 틀림없습니다. 특히 블루 일색으로 표현된 것이 동양화의 담채화를 연상케 하는 김 화백 근래의 역작 중 하나입니다.” (화가 김기창)
김환기, 10만개의 점 04-VI-73 #316, 1973, 코튼에 유채, 263 x 205cm ⓒ (재)환기재단·환기미술관
점화를 구현하는 기법은 밑칠하지 않은 면 캔버스 위에 물감과의 접착 역할을 할 아교칠을 하고 테레빈유(terebene油)에 안료를 풀어서 물처럼 묽은 농도의 물감을 사용한 것으로 동양의 선염(渲染)을 구현하기 위한 작가의 노력의 결과다.
이후에 많은 전면 점화의 대작들이 탄생하며 김환기의 인생을, 그리고 그리움을 대변했다. 그러나 이 힘든 작업은 하루 10시간이고, 16시간이고 할 수 있을 때까지 수십만 개의 점을 찍는 고행을 견뎌야만 했다. 선염 기법으로 캔버스를 바닥에 두고 작업을 했기에 큰 키에 허리를 푹 숙이고 고개를 떨구며 집중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작품이 쌓이는 만큼 건강을 잃어갔다.
김환기의 성실한 노력으로, 기대하던 일급 화랑인 포인덱스터(Poindexter)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게 되었고 이를 취재한 뉴욕타임스에서도 대단한 호평을 내놨다. 대형 그림 한 점이 1년 치 생활비가 해결될 만큼 좋은 가격에 팔렸다. 2,400달러의 50%는 화랑의 몫이고 김환기는 1,200달러를 받았는데 당시 의사 연봉이 1,800달러였다고 한다. 이 순간 뿌듯했을 김환기의 마음을 생각하면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김환기의 또 다른 조력자, 최순우의 기획으로 1971년 9월 《김환기 근작전》을 신세계화랑에서 개최하게 됐다. 뉴욕으로 떠나고 8년 만의 일이다. 작가는 참석할 수 없었지만, 딸들을 비롯해 사위 윤형근이 대신해 자리를 지켰다. 많은 동료 화가와 문학계 친구들, 기자들이 참석했고 그의 작품을 통해 그를 대면했다.
미츠코시백화점 경성지점 전경 ⓒ 서울역사박물관
신세계화랑은 현재 신세계백화점 건물에 있었다. 서울 최초의 백화점이었던 미츠코시(三越) 백화점이 전신이다. 일본인의 자본으로 옛 경성부청 터에 1930년에 세워진 건물로 외관은 현재 그대로다. 1920년대 후반부터 도심의 축이 청계천을 중심으로 남과 북으로 재편되면서 남촌에는 일본인이, 북촌에는 조선인이 거주하며 경제활동을 하는 공간으로 구획됐다. 1930년대 식민지의 부와 권력이 황금정(黃金町: 현 을지로)과 본정(本町: 현 충무로), 명치정(明治町: 현 명동)을 중심으로 하는 남촌에 집중되었다.
이런 배경에 최초의 근대식 백화점으로 탄생한 것이 미츠코시백화점 경성점이고 이후 조지아백화점(丁子屋百貨店), 미나카이백화점(三中井百貨店), 히라타백화점(平田百貨店) 등이 충무로 1가를 중심으로 들어서면서 남촌이 백화점 거리로 변신했다. 이 시기 백화점들은 홍보와 매출 증대 효과를 기대하면서 건물 내에 화랑을 두어 개인전이나 단체전 등의 미술 전시회를 소화하면서 전시장 역할을 톡톡히 했다.
미츠코시나 조지아백화점, 조선인 자본으로 세운 화신백화점 등이 화랑을 운영했고 미나카이백화점 본관에는 특이하게 ‘경일문화영화극장’이 함께 운영되면서 오늘날의 백화점 내 극장 배치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미츠코시백화점은 소설가 이상의 대표적인 작품 「날개」, 채만식의 『탁류』, 박완서의 「나목」 등 우리나라 문학 작품의 배경으로도 자주 등장했다. 박수근이 미군 PX에서 초상화를 그리던 곳으로도 잘 알려진 곳이다. 해방 후 동화백화점으로 바뀌었다가 1963년 삼성의 소유로 넘어갔다. 현재는 신세계백화점 본점으로 이용되며 근대에서 현대를 잇는 소비 공간으로 100여 년을 이어오고 있는 곳이다.
1974년, 김환기는 어느 정도 성공적인 개인전을 마무리하면서 조금 여유가 생기긴 했지만, 문제는 건강이었다. 몸이 계속 나빠지는 상태였고 병원에서 목 디스크 수술을 결정하게 되었다. 수술을 잘 마치고 회복을 위해 입원하는 동안 김환기는 침대에서 뜻밖의 낙상사고로 아쉬운 생을 마감한다. 조국을, 친구를, 고향을 생각하며 화폭에 수도 없이 찍었던 점만큼이나 그리운 마음을 안고 가족의 곁을 떠났다. 그의 마지막 일기다.
"해가 환히 든다. 오늘 1시에 수술. 내 침대에는 ‘Nothing by Muse’라고 쓴 메모가 플라스틱 안에 붙어 있다. 내일이 빨리 오기를 기다린다." (1974년 7월 12일)
김환기는 화면에 담고자 하는 것들이 끝도 없이 떠올라 내일이 빨리 오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꿈은 무한하고 세월은 모자라다’고 했던 것처럼.
김환기 부부가 영면한 곳은 이역만리 뉴욕 발할라(Valhalla) 마을 켄시코 묘지(Kensico Cemetery)다. 이 순간 젊은 시절 김환기의 순박한 소망을 되뇌어 본다. 김환기의 평생 그리움의 원천, 기좌도 안산의 어디쯤 올라 서해의 노을을 바라보는 노부부의 뒷모습이 그려지는 듯하다.
"제주도는 섬이 아닙니다. 울릉도도 섬이라고 부르기에는 좀 크지 않을까요? 섬일 바에야 으레히 작아야 합니다. 기좌섬 쯤이 섬이라기엔 꼭 알맞지 않을까요. 목포서 똑딱선을 타면 섬 사이를 돌아 흘러서 두 시간 후에는 새알같이 작은 기좌섬에 내려집니다. (…) 이 기좌섬을 내 혼자 점령하고 극히 낭만을 사랑할 줄 아는 여인(女人)을 대륙에서 모셔들여 섬 한복판에 성냥갑 같은 집을 짓고, 식물이나 채집하고, 곤충이나 모으면서 하와이에서 보내는 노래를 내 안테나에 받아들여 보았으면 하는 내 생각을 경멸해도 좋습니다. (…) 포근한 흙, 무성한 숲, 갈매기의 날개짓 모두가 강렬한 생리의 환희입니다. 저집 호박 넝쿨, 이집 호박넝쿨 서로 감기어 네것 내것이 있으오리까. 먹고 싶은 대로 다 못 따먹을 것을. 넘치는 샘에선 무도 씻고, 일년감도 씻습니다. 제일 큰놈으로 하나 청해 보세요. 그 큰애기(處女)는 당신이 아무리 낯선 나그네일지라도 대광주리를 송두리째 드릴 겝니다." (조광, 1939년 8월호)
[길 위의 미술관 - 김환기 ④] 보편의 조형 언어로 그리움을 담다 < 체험 < 미술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