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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설극장의 추억

[사진가의 펜으로 보는 세상]

by 데일리아트
개천가에 급조된 가설극장은 그 시절 우리의 낭만이었다.


<가설극장의 추억>

1224_2533_640.jpg 하얀아침, 이용순, 1985년

나는 지금 비토리오 데 시카(Vittorio De Sica)의 1946년 작품인 “구두닦이”라는 영화를 보러 가는 길이다. 작가는 이태리의 신사실주의(Neo Realism)의 대표적 감독이고 이 영화는 우리에게는 “자전거 도둑”으로 널리 알려진 그의 대표작중 하나이다. 나는 기회가 없기도 하고 게으름 탓에 영화를 보지 못했다. 마침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이 작품을 상영한다기에 바로 예매를 했다. 한국영상자료원은 서울 상암동에 위치한 국가 운영 기관이다. 거기에는 두 개의 쾌적한 상영관이 있다. 모두 회원제로 운영하며 예매를 하면 무료로 입장한다. 가끔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이 올라오기에 나는 자주 이 극장의 홈페이지를 열어보곤 한다.


한국영상자료원이 있는 상암동까지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영화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떠오른 생각은 내가 처음으로 영화를 접했을 때의 추억이다. 내가 태어나고 어린 시절에 살던 곳은 지금의 곤지암읍에서 20여리 떨어진 시골이다. 그래도 내가 살던 동네는 그 곳의 중심이어서 다른 마을 사람들도 동네를 축으로 모여들었다. 그래서 초등학교가 있었고 소규모지만 5일장이 서기도 한 곳이다. 그 마을은 몇 개의 작은 부락으로 모인 동네이고 나는 진달래가 피는 작은 동산 앞 1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인 마을에 살았다.


그 시절 예외 없이 마을 사람들은 농업에 종사 했으므로 바쁜 시절도 같고 또 같은 시기에 농한기를 지내기도 했다. 농한기는 봄에는 모내기를 마치는 시기, 가을에는 추수를 끝낸 후부터이다. 그 때가 되면 어김없이 마을을 찾아오는 외지인들이 있었다. 도회적인 이름을 가진, 영화를 상영하는 회사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큰 트럭에 극장을 만들 도구들을 잔뜩 싣고왔다. 전기를 생산하는 원동기까지 갖추고 다녔다.


터를 잡는 곳은 언제나 같은 곳인 제법 너른 동네의 하천, 즉 개울가였다. 당시 마을의 하천은 제법 넓고 돌들이 넘쳐나는 낭만적인 풍경을 갖춘 곳이었다. 트럭에서 짐을 내려 커다란 사각형의 기둥을 설치하고 두꺼운 흰 천을 둘렀다. 그리고 한 쪽 면에 스크린을 설치하면 가설극장은 완성되는 것이다. 의자는 없었지만 대신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하천의 넓적한 돌들이 흰 천막 안에서 의자를 대신했다. 그 시절 어린 나와 친구, 그리고 어른들은 돌을 깔고 앉아서 긴 시간 흑백 영화를 감상했다.


영화를 상영하는 사람들은 모객을 위해 스피커가 설치된 트럭을 타고 종일 마을을 돌았다. 아직도 잊히지 않는 것이 스피커에서 고막을 찢을 듯 쏟아내는 그들의 안내홍보이다. 언제나 같은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ㅇㅇ리 주민여러분” 으로 시작한다. 사실 가난한 동네의 누구도 문화와 예술을 사랑한 적이 없었지만 그들은 고객에게 그렇게 접근해갔다. 초대권이라는 것도 있었다. 흰 천막 안에 무료로 입장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는 초대권은 동네 이장과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의 차지였다.


70년대 내가 곤지암읍으로 중학교를 다닐 때 버스비가 20원이었으니까 아마도 극장 입장권, 돌을 깔고 앉아 영화를 보는 권리는 100원 정도 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가난한 이 동네에서는 작은 액수가 아니었다. 그래서 짓궂은 우리 중 몇몇은 낮에 침투훈련을 하고 실제로 실행하기도 했다. 영화는 어둠에서만 스크린이 보이는 것이니까 낮에는 상영이 불가능한 것이기에 침투가 용이한 측면도 있었다. 그리고 영화회사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직원들이 상영시간 내내 가설극장의 주위를 돌며 무료 입장을 막았다. 막는 자와 돌파하는 자의 추격도 그 시절의 낭만중 하나임이 분명했다.


그렇게 우리는 당시의 유명했던 국산 흑백 영화들을 관람했는데 기억나는 영화가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다.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일제히 박수를 쳤고 환호성을 질렀으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적어도 그때, 가설극장에서 피로에 지친 우리의 부모인 농부도, 놀이라곤 찢어진 축구공을 바늘로 꿴게 전부였던 우리도 모두다 하나가 되었다.


가설극장은 장마가 오기 전에 철수하고 가을 수확이 끝나면 다시 올 것을 약속하며 커다란 천막을 걷는다. 하얀 돌들이 지천으로 널린 곳에 세워진 거대한 흰 천막의 이미지는 아직도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지금 생각해보니 꼭 크리스토(Christo Javacheff)의 거대한 설치작품 같았다.


70년대 중반 마을에는 전기가 들어오고 하나둘씩 TV가 보급되면서 가설극장은 사라졌다. 그리고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동네 사람들'은 오후 6시에 시작하는 TV를 보기위해 가설극장이 아닌 TV가 있는 집으로 모여들었다. 그렇게 가설극장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마치 앞서 언급한 영화에서의 그 '해병'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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