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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약품 활명수의 탄생

[브랜드의 문화사 ⑥]

by 데일리아트
활명수의 변천은 무죄
궁중비법을 민간에 사용해 대박 나다
1226_2535_5442.png '부채표'는 동화약품이 1910년에 우리나라 최초로 등록한 상표이다.

서소문 평안교회 옆 순화빌딩 주차장은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민씨가 태어난 곳이다. 영조는 아버지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 민씨의 탄생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 비를 세웠다. 인현왕후가 태어난 옛터(仁顯王后 誕降舊基) 에 이 비는 없어진 지 오래이다. 장희빈 때문에 큰 어려움에 처했던 어머니(숙빈 최씨)와 같은 처지의 인현왕후를 기리는 마음으로 이곳에 들러 비를 세웠다. 인현왕후의 본관은 여흥(驪興,여주)이지만 아버지 민유중이 이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순화동에는 민씨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 인현왕후가 폐서인되어 안국동 사가로 내쳐져 감고당에서 살았지만 여전히 이곳은 여흥 민씨의 세거지였다. 지금의 순화동 5-1번지 일대, 덕수궁 롯데캐슬 민영주차장 자리이다.


여흥 민씨 민병호도 이곳에서 살았다. 그는 선전관이었다. 고려시대부터 내려온 직임으로 왕의 지근거리에서 호위를 맡는 업무이다. 왕궁의 숙위는 물론 왕의 거둥 시 최 측근에서 왕을 경호하는 일이다. 일의 경중으로 보아 주로 문관이 맡았으나 나중에는 무관으로 확대되었다. 보통 5품 이상의 높은 관직자들이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대통령 경호실의 고급 장교로 생각하면 된다. 외세에 의해 신변의 불안을 느꼈던 고종은 선전관에게 많이 의지했다.


여흥 민씨인 명성황후도 다른 사람들보다도 인척 관계인 민병호를 특별히 신임하지 않았을까?. 자료를 보니 조선 후기 선전관 중 여흥 민씨가 압도적으로 많다. 그들은 왕의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응급처치 할 정도의 의학 지식은 갖추어야 했다. 특히 민병호는 의약에 관심이 많아 전의들과 친하게 지내며 궁중의 생약 비방을 틈틈이 익혔다. 고종의 지근거리에 있다 보니 서양 주치의인 알렌을 알게 되었다. 그를 통해서 서양 의학 지식을 많이 습득했고 권유를 받아 정동교회도 다녔다. 그곳에서 많은 선교사들을 만났다. 그들은 선교사이기 전에 의사였다. 전의들과 교류하면서 궁중 비방을 습득한 바탕 위에 선교사들을 통해 양의학을 습득하니 자신감이 넘쳤다.


그는 무슨 약을 만들까 고민하다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은 고통을 당하는 소화기 계통의 약을 만들기로 했다. 급체와 토사곽란과 같은 초보적인 병으로 죽는 경우가 많은 시대였다. 많은 양의 식사를 빠르게 먹는 우리나라 식습관 때문이었다. 느긋하게 만찬을 즐기는 서양과 달리 밥상머리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식사에 열중하는 조선인들은 소화불량, 위장병을 달고 다녔다. 심지어 조선의 23대왕 순조의 셋째 딸 덕온공주도 급체로 사망했을 정도였다. 왕실이건 일반 백성들이건 소화기 장애는 조선인 모두에게 큰 고통이었다.

1226_2536_551.png 활명수의 변천

많은 실험 끝에 명약이 탄생했다. 현호색, 창출, 진피, 후박과 같은 전통 약재에 계피 4그램, 정향 3그램, 감복숭아씨 6그램을 침출기에 넣었다. 여기에 적포도주 150그램을 가해 잘 혼합한 다음 3일 간 두었다. 맛을 내기위해 마지막으로 박하뇌0.15그램, 장뇌 0.03그램을 넣고 백설탕 40그램과 증류수 70그램을 가한 후 잘 혼합했다. 탕약은 쓰기만 한데 포도주와 설탕이 약에 맛을 살렸다. 이것을 용해한 뒤 여과시키니 소화 용액이 만들어졌다. 자신이 다니던 정동교회 신도 등에게 용액을 나눠주면서 반응을 살피니 한결같이 반응이 좋았다.


지금도 한국인의 상비약인 활명수의 탄생이다. 약의 이름은 ‘목숨을 살리는 물’이라는 뜻으로 활명수(活命水)라 했다. 누구도 만들 수 없는 동서양 의약의 콜라보로 명품이 탄생했다. 민병호가 개발한 활명수는 소화불량에 효과가 있으면서 복용이 간편해 민간에 널리 알려졌다. 초창기 활명수의 용량은 450㎖였다. 지금의 까스 활명수가 75㎖인 것을 감안하면 큰 용량이다. 처음에는 큰 병에 원액을 담아 판매했다. 이 원액을 물에 타서 1~2시간 가량 희석해서 복용했다. 민병호는 아들 민강(閔橿) 이름으로 1897년 9월 동화약방(현 동화약품, 현재 서울시 중구 순화동 5번지)을 차린다. 대한제국 선포 한 달 전이다. 비싼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활명수는 불티나게 팔렸다. 활명수는 만병통치약으로 통해 지금도 시골 할머니들의 가방 속에는 활명수가 들어 있을 정도이다. 소화는 물론 어디가 아파도 활명수를 복용한다. 당시에 그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1226_2537_5520.png 동화약품 입구에 있던 연통부기념비

민병호는 활명수의 상징이랄 수 있는 ‘부채표’를 1910년 국내 최초의 상표로 등록한다. 부채표는 『시경』에 나오는 지죽상합 생기청풍(紙竹相合 生氣淸風)에서 나온 말이다. 대나무와 종이가 합해져야 비로소 부채를 이뤄 맑은 바람을 일으킨다는 뜻이다. 민족이 합심하면 잘 살 수 있다는 동화약방의 회사 이름과 일맥상통한다.


그는 자신의 아들 민강을 초대 사장으로 세우고 물러났다. 동화약방의 민족적 활약은 민강 때에 절정을 맡는다. 그는 3.1만세 운동을 주도했다. 그러나 일제의 폭압적 저지로 운동이 시들해지자 대동단에 가입해 주요 조직원으로 활약한다. 임시정부 수립에도 관여했다. 이승만을 집정관 총재로 하는 한성임시정부를 만들었다. 당시의 임시정부는 상해와 러시아, 국내에 몇 개가 산재했다. 1919년 9월 상해의 임시정부로 모두 통합되었다. 산재해 있는 많은 독립운동 단체들과 국내에서 자금을 모아 임시정부로 보내야 했다.


임시정부와 국내의 연락 체계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동화약방은 국내의 연락 교두보로서 ‘서울 연통부’로 나섰다. 어찌보면 회사가 거덜날 일이었다. 그러나 국내의 자금과 정보를 누군가는 상해임시정부에 전달해야 했다.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위험이 따르는 일에 회사의 명운을 걸었다. 회사가 커지면서 동화약방은 국내뿐 아니라 중국과의 무역도 활발했다. 모아진 자금과 정보는 무역을 위해 남대문에 설립한 ‘공송운송점’을 이용했다. 그는 운송회사 장부의 빈칸에 대동단과 임시정부의 자금 출납을 기록하고 자금모집줄을 맡았다. 상해임시정부의 연통제 요원 이종욱은 ‘청심환을 사러왔다’ 를 암호로 사용했다. 민강은 ‘박춘식’이라는 가명으로 편지와 문서를 무역품으로 가장하여 중국의 임시정부에 보냈다.


그런데 이런 독립활동은 회사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민강에게 회사는 뒷전이었다. 차츰 독립운동에 더 가담했다. 아버지부터 이어진 애국충정의 길이 몸에 밴 것이다. 아버지 때는 국왕을 지키는 충직한 선전관이 나라를 살리는 길이었다. 새나라 대한제국이 열리니 음식을 소화 못해 죽어 가는 백성을 위해 사람 살리는 약을 개발하는 것이 애국의 길이었다. 자신의 때는 일제에 의해 식민지가 되니 회사를 이용해 나라를 살리고자 한 것이다. 회사일은 뒷전이고 독립운동에 투신하다 결국 상해에서 사망한다.


민씨 문중은 회의를 거듭한다. 회사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을 찾아 나섰다. 민족경제 자립을 목표로 조직한 ‘조선직장려계’를 운영하던 윤창식에게 회사를 넘긴다. 여흥 민씨 중에서 후임자를 찾을 수 있었겠지만 회사를 잘 살릴 수 있는 전문 경영인에게 회사를 넘긴 것이다. 윤창식 일가는 회사를 반석 위에 올려놓는다. 이것이 동화약품이 걸어온 길이다. 지금도 이 회사는 민족기업으로 모든 이들에게 존경과 받으며 탄탄한 회사로 거듭나고 있다.


변화의 시대이다. 시대를 앞서간 이들이 우리 산업사에 등장한다. 그들은 시대의 변화 속에서 사업 아이템을 찾아 성공한 기업인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돈만 추구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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