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아뜰리에 ⑤]
뇌출혈은 나를 다시 세우는 계기였다
영은미술관에서 만난 홍준호 작가 탐방기
이번 회부터 종래 [화가의 아뜰리에]를 [작가의 아뜰리에]로 바꿉니다. 화가를 포함하여 더 넓은 범위의 예술가들을 만나보기 위해서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격려를 바랍니다.(편집자 주)
홍 작가를 인터뷰 하러 가는 길, 김포에서 경기도 광주까지 가야 한다. 오랜만에 서둘러 집을 나왔다. 새벽에 집을 나온 것은 퇴직 이후 처음이었다. 밤낮없이 온몸을 던져 직장 생활했던 것이 얼마 전인데 까마득한 옛일처럼 느껴진다. 홍준호 작가는 대기업에서 전산매니저로 생활하다가 갑자기 건강을 잃고 작가의 길로 들어선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그러나 그는 에너지로 충만했다. 직장 생활 할 때보다 하고 싶은 일을 해서일까? 그의 인생과 작품 이야기를 들어본다.
- 홍작가의 이력이 참 흥미롭다. 젊은 시절 뇌출혈로 쓰러져 생사를 오가다가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직장에서 무슨 일을 했나?
단국대 전산통계학과를 졸업하고 하이트 전산실에 2003년에 입사했다. 내가 입사하고 몇 년 지나지 않아 하이트가 진로를 인수했다. 하이트와 진로의 전산 데이터를 통합하는 프로젝트를 마무리했다. 그 과정에서 일에 대한 중압감이 많았던 것 같다. 결혼하고 일 년도 안된 2011년에 뇌출혈로 쓰러졌다. 그것도 5월 1일 근로자의 날에. 그때 내 나이가 서른세 살이었다.
아내는 간호사로 일했고 동생도 의사이다. 쓰러질 즈음 머리가 멍하고 뒷목이 뻐근한 증상이 가끔 있더라. 근로자의 날 연휴라 대구 고향 집에 간 것인데 집사람과 텔레비전을 보다가 갑자기 두통이 오는데 그 고통이 상상을 초월했다. 망치로 내리치는 통증이었다. 아파서 죽고 싶을 정도였다. 혈관이 터진 것인데 터진 부위가 소뇌라서 호흡이 가쁘고 몸이 통제가 안 됐다. 간호사인 아내와 마침 동생이 고향 집에 있어서 빨리 조치가 되었다. 지금은 보는 것처럼 아무런 이상이 없다. 빨리 회복되었다.
- 어릴 적에는 화가나 예술가 꿈은 없었나?
어릴 때 예술에 관한 것들에 대한 기억은 크게 없다. 그림을 곧잘 그리던 기억이 있었는데 그렇다고 진짜 재능이 있지는 않았다. 굳이 관련 기억을 해 보면, 어머니께서 미대에 다니다가 결혼하면서 중퇴하셨다고 들었다. 작가 활동을 하면서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니, 다니던 미대를 중퇴하고 자신의 이름은 잊혀진 채 나를 길러주신 어머니의 꿈을 어쩌면 내가 이어가고 있지는 않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래서 2020년에 《가시 잃은 할미꽃》 전시에서 어머니를 생각하며 설치 작품을 선보였다.
- 그러면 예술가의 꿈을 본격적으로 가지게 된 계기가 있었나?
예술가의 꿈이라고 꾸어본 적이 있었나 싶다. 그냥 마치 운명인 듯 서서히 스며들었다. 대학 3학년 때 교수님의 추천으로 하이트진로에 입사한 2003년에 첫 월급을 받아 디지털 카메라를 샀다. 이후 여러 오프라인 강좌에서 사진 관련 강의도 듣고 홍대 쪽에 있는 상상마당에서 SLAP이란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아마추어 작가 단체전도 참가했다. 그러면서 미술사, 철학 등과 같은 인문학에 관심을 가지며 자연스레 기초를 닦을 수 있었다.
가끔 작가들에게 작가 할 생각 없느냐는 말을 듣곤 했지만, 나와는 무관한 이야기라 생각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모 갤러리에 2주 가량 전시할 기회를 얻게 되어 2015년 10월 첫 개인전 《Digital Being》을 발표하게 되었고 그것이 운이 좋게도 다른 전시로 이어질 수 있었다.
- 건강을 잃기 전에 사진 취미가 상당했던 것 같다.
취미로 사진을 시작하던 것이 매년 휴가 기간에 해외의 미술관, 박물관, 갤러리를 돌아보는 것으로 확장되더니, 어느덧 베니스 비엔날레, 카셀 도큐멘타, 바젤 아트페어, 런던 프리즈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유럽의 벼룩시장을 가서 필름, 사진 건판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건강을 잃고 나서 복직한 지 2년 정도 지난, 2013년쯤 회사에서 희망퇴직 신청을 받았는데 당시 와이프가 내가 해보고 싶은 것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더라. 그래서 용기를 내어 새로운 변화와 출발을 할 수 있었다.
- 첫 작품은 어떻게 하게 되었나?
호기롭게 직장을 그만두었지만 어떻게 작가가 되는 지도 잘 몰랐다. 미술 이론을 가르쳐 주시던 선생님이 제자가 운영하는 갤러리가 비어 있는데 전시할 사람을 찾는다고 해서 내가 해보겠다고 했다. 그것이 작가의 첫 출발이었다.
IT개발 부서에서 일을 했다 보니 프로그래밍 언어나 숫자, 시스템의 구조에 대한 이해가 있었다. 과로로 죽을 고비를 넘겼던 기억 속에 나는 존재(Being)가 아니라 회사의 인사팀(HR팀)에서 관리하는 자원(Resource)이었으며, 나는 국가나 기업 에서 모두 숫자로 표기되고 관리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되었다. 신분증, 여권, 신용카드, 포인트 카드 등을 작업의 오브제로 하고, 직장에서 늘 쓰던 OA기기를 사용해 작업을 시작했다. 카메라를 써서 찍는 사진이 아니라 만드는 사진의 시작이었다. OA기기도 빛, 렌즈, 이미지 센서 등이 있는 카메라와 동일한 작동 원리를 가지고 있었기에 사진이라 할 수 있지 않나? 자원화되고 획일화되는 현대인의 모습을 OA기기를 통해서 표현하자 작품이 되었다.
신용카드나 신분증, 여권을 선택한 결정적인 이유 중 또 다른 하나는 사진 때문이다. 내가 기억하지도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가 기록이 되고 수집되고 있는’ 나의 기록이자 정체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나라는 존재가 지갑 속의 카드와 신분증, 지갑이라는 구조 안에 넣어서 휴대하기 편한 존재로 규격화된 존재, 학교의 책상과 의자와 같은 기분이 들었다.
표면적으로는 어떤 개성도 없고 13자리 숫자 혹은 16자리 숫자로 표기되고 유효 기간이나 세 자리 핀코드로 된 규격화가 우리를 옥죄고 있는 기호들이다. 이 속에는 나임을 증명하는 것이 영수증밖에 없다. 내가 어디에서 뭘 했는지의 기록이 나의 정체성이 되어 버린다. 이것을 작업으로 연결했다.
(좌측) 홍준호, Digital Being – Receipt#01, 2019, Mixed Media(Pigment Print, Receipt, Credit Card), 42 x 30.5cm, (우측) 홍준호, Digital Being – Receipt#02, 2019, Mixed Media(Pigment Print, Receipt, Credit Card), 79 x 28cm
- 반응은 어땠나?
첫 개인전에는 직장 동료들과 지인들이 많이 왔었다. 신분증, 여권, 신용카드의 이미지가 혼란스럽게 중첩된 작품이 걸린 전시에 온 그들은 의아해하는 표정이었다. 아마도 멋진 풍경이나 인물 사진을 기대하고 온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기대를 여지없이 허무하게 만들어 버렸으니, 나로서는 기뻤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사진이라는 고정 관념에 조금은 균열을 일으키는 것 같아서 작은 성과를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미술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운이 좋게도 그 첫걸음을 잘 디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여서 만나 뵙고 배움의 기회를 주신 많은 스승들께서 나의 세포와 감각을 잘 단련시켜 주신 덕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Digital Being》에서 선보였던 작품 중에 의료용 이미지를 가지고 작업한 작품이 확장되어 다음 전시인 《Homo Ludense》로 이어지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홍준호, Homo Ludense #02, 2016, Digital Inkjet Pigment Print(Mixed Medical CT and Water Color on Hanji), 86x76.4cm
이어서 2편으로 이어집니다.
https://www.d-art.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