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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찬 광복회장의 '한 장의 사진'

[광복절 특집: 서소문 밖 첫 동네]

by 데일리아트
현 이종찬 광복회장과 '참 군인' 이종찬 장군

근현대 우리 역사에는 두 명의 이종찬이 있다. 먼저 소개할 사람은 나라가 망하자 전 재산을 팔아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회영 선생의 손자로 전 국정원장, 현 광복회장인 이종찬이다. 윤 대통령의 정치적 멘토로 알려져 있다. 독립운동으로 잔뼈가 굵은 그는, 2023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일제강점기에 ‘정부는 없어도 나라는 있었다’고 일침을 가했다. 2024년 광복절에는 친일적 인사의 독립관장 인선 문제로 광복절 기념식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나는 이종찬 회장이 다른 문제는 다 넘어가더라도 역사가 퇴행하는 '친일 문제'는 그냥 넘어가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한 장의 사진 때문이다. 1945년 8월 15일 나라가 해방이 되자 얼마 후 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과 함께 국내로 돌아왔다. 이때의 사진 한 장이 남아있다.

1321_2802_282.png 임시정부 요원들이 상하이 교민들에게 축하를 받고 있다. 화환을 목에 건 사람이 김구, 반바지 어린이가 이종찬 광복회장, 중절모를 쓴 노인이 이시영 선생이다

이 사진은 해방을 맞이하고 임시정부 요인들이 상하이에서 교민들의 환영을 받는 장면이다. 환영식 이후 이들은 해방된 조국으로 비행기를 타고 떠났다. 앞의 반바지 차림의 어린이가 이종찬 광복회장이다. 어린 이종찬 옆에 한 노인이 눈물을 훔치고 있다. 작은할아버지 성재 이시영 선생(1869~1953)이다. 성재 이시영의 형이 우당 이회영 선생이다. 그러니 이종찬 광복회장은 우당 이회영의 친손자이다.


모두들 광복의 기쁨에 들떠 돌아갈 고국을 생각하며 밝은 표정인데, 이시영 선생은 어떤 상념에 빠져 있었을까? 나라를 빼앗기자 명동의 그 넓은 땅을 팔아 만주로 떠났던 36년 전을 생각했을까? 1910년 국망 당시, 명동의 땅 판 돈 40만 원은 지금으로는 상상을 초월하는 액수다. 수백 억, 아니 현재 명동의 땅 값을 계산하면 조 단위가 넘을지도 모른다. 이회영 선생은 그 돈으로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우리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6형제가 떠났으나 모두 죽고 혼자만 살아남았다. 이들은 중국에서 어떤 삶을 살았을까? 이회영 선생이 살아계실 때의 이야기이다. 이종찬의 어머니, 이회영 선생의 며느리인 조계진 여사의 증언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쌀이 없어 하루 종일 밥을 못 짓고 밤이 다 되었다. 때마침 보름달이 중천에 떴는데... 아버님(이회영 선생)께서 처량하여 눈물이 절로 난다고 하여 퉁소를 부시니 사방은 고요하고 달빛은 찬란한데 밥을 못 먹어서 배는 고프고, 이런 처참한 광경과 슬픈 일이 어디 있겠는가." (김태빈, 『그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158쪽)


이시영 선생은 해방이 되어 조국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힘겨운 시절을 회상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감격으로 뜰떠 있을 때 눈물을 훔치고 있는것이다. 김구 선생은 임시정부 주석으로 화환을 목에 두르고 있다. 선생은 조국의 앞날이 장밋빛으로 펼쳐질 거라 기대하였을까? 우리 민족은 해방 이후 더 험난한 과정을 겪게 되는데… 2천만 민족 5분의 1이 죽거나 장애를 입는 6·25의 비극이 곧 펼쳐지는데…


이런 어른들 곁에서 자란 이종찬이기에 "일제강점기에 정부는 없었지만 나라는 있었다"고 말했고 올해 광복절을 앞두고 친일적 인사의 독립기념관장 임명을 철회해 달라고 기념식 참석을 거부한 것이다.

1321_2805_4637.png 중림동 155번지 일대에 들어선 중림종합사회복지관

또 다른 이종찬이 1916년 서소문 밖 중림동에 있는 중림동 155번지 중림종합사회복지관 일대에서 태어났다. 이하영 대감의 손자 이종찬 장군이다. 한문으로도 똑같은 李鍾贊이다. 이회영(1867년생)의 손자 이종찬 광복회장은 1936년생이고 이곳에서 태어난 이하영(1858년생) 대감의 손자 이종찬 장군은 1916년생이니 20년 차이다. 이하영 대감의 나이가 더 많기도 하고, 이회영(1867년생) 선생이 결혼을 늦게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태어난 이종찬 장군도 역시 우리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분이다.

1321_2803_327.png 참군인 이종찬 장군


이 동네에 중림종합사회복지관이 들어서기 전에는 잘 지은 한옥이 몇 채 있었다. 붉은 벽돌의 대륙고무주식회사 건물과 관련된 이하영 대감 일가의 건물일 텐데, 여기에서 이종찬 장군이 태어났다. 그에게는 수식어가 붙는다. ‘참 군인’이다. 그는 우리 험난한 역사 속에서 과(過)를 저질렀으나 나중에는 곧은 심지로 그 과를 덮은 사람이다. 난세에 영웅이 탄생한다고 하지만 이는 극히 드문 일이요, 난세에는 수많은 인간 군상이 출현하는데 이종찬이 그러하다.


그는 일제 강점기 일본 육사 출신으로 태평양전쟁에서 공을 세운 사람이다. 일본군 최고 훈장인 '금치 훈장'을 받았다. 아마도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그가 유일할 것이다. 그러나 해방이 도래했다. 벼락처럼 일본이 몰락했다. 그는 사실 일제 강점기에도 할아버지 이하영, 아버지 이규원으로 이어지는 습작(襲爵, 일본 귀족의 작위를 물려받음)을 거부했다. 해방 이후 3년 간 낭인 생활을 하며 일본군 복무에 대한 자숙의 기간을 가졌다. 1948년 대한민국 국군에 진출한 인사들의 거듭된 영입 요청으로 대령으로 특채됐다.


곧이어 터진 한국전쟁에서는 대대적인 인민군 공격에서 형산강 일대를 지켰고, 1951년 육군참모총장으로 한국전을 지휘했다. 1952년 5월 피란지 부산에서 대통령 선거를 직선제로 바꾸려 하는 소위 '부산정치파동' 때 이승만은 계엄을 선포하고 당시 참모총장이던 이종찬에게 군대를 동원해 반대 세력을 탄압하라 지시했다. 이때 이종찬은 이를 거부, 군의 정치 개입에 반대했고 곧바로 해임됐다. 전쟁 전에는 여순사건으로 처벌 위기에 있던 박정희를 구해주기도 했지만, 5·16 군사정변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종찬의 강직한 성품을 매우 존경했다고 전해진다. 이런 인물이 친일파 이하영 대감의 손자이다. 출세로는 할아버지에 못 미쳤지만 강직한 성품은 선대를 능가했다.

1321_2804_3319.png 명동에 있는 이회영, 이시영 선생의 집터

이 동네에는 매국노 이완용의 집이 있었고 이후에는 대륙고무신공장, 또 군의 정치 중립을 지킨 이종찬이 태어났다. 역사적 궤를 달리하는 여러 인물이 살았던 것이다. 중림동을 보면 우리의 근대사가 보인다.


광복절인 오늘 이종찬의 할아버지 이회영 선생이 살아계신다면 어떤 말을 했을까? 광복의 기쁨으로 눈물을 흘렸던 이회영의 동생 이시영 선생의 눈물이 오늘 더욱 마음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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