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 특집]
우리는 이쾌대가 느꼈던 해방의 기쁨을 느끼고 있는가?
광복절이 되면 생각나는 화가가 있다. 우리에게 아직도 낯선 화가 이쾌대이다. 2015년 7월 22일부터 11월1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라는 전시회를 했다. 전시회를 관람하지 않았어도 서울 시민이라면 당시 길거리에 걸린 포스터는 한 두 번 보았을 것이다. 두루마기에 중절모를 쓴 모습으로 붓을 든 이쾌대의 자화상을 포스터로 했다. 자화상의 모습이 이채롭다. 꼭 양복에 고무신을 신은 모습과 흡사하다. 옷은 푸른 두루마기를 입어 한복 차림이지만 머리에는 갓이 아닌 서양 사람들이 쓰는 중절모를 썼다. 그리고 유화를 그리는 파레트에 붓은 붓글씨를 쓰는 서예붓이다. 서양화 기법으로 자신을 그렸지만 두루마기로 인식되는 모습의 자화상을 통해, 민족의 정체성은 버리지 않겠다는 그의 고집이 표현되어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광복 70주년을 기념하여 나라의 해방에 가장 적합한 화가를 골라 전시회를 한 것인데 의도에 가장 적합한 화가가 이쾌대였다.
이쾌대는 누구인가? 사실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회 이전에는 그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왜냐하면 그는 월북 작가였기 때문이다. 반공을 국시로 하던 시절에는 그의 작품은 물론 이름조차도 금기시 되었다. 그러나 해금이 되고 그의 작품이 알려지자 화단에서는 근현대미술사를 다시 써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등 쟁쟁한 화가의 반열에 그의 이름을 올려놓아야 한다는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거론되었다.
이쾌대는 1913년 생으로 김환기와 동갑이다. 박수근 1914년 생, 이중섭 1916년 생, 장욱진 1917년 생 등 지금 우리나라의 화단에서 '블루칩'으로 대접받는 화가들이 1910년대 생들이다. 이들은 나라가 망한 1910년 이후에 태어나 일본 식민지에서 자랐다. 자연스럽게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세대들이다. 미술사에서는 고희동, 김관호, 김찬영으로 이어지는 화가들을 1세대 화가들로 구분한다. 그러나 그들은 일본에서 미술을 배워 귀국했으나 국내에서 화가로서 정착을 못했다. 반면에 1910년대 생 화가들은 일본에서 미술을 배워 서양화 불모지인 우리나라에 서양미술을 접목시킨 사람들이다. 그들은 한참 일할 나이인 30대 초반에 해방을 맞았다. 해방이 될 때 이쾌대의 나이는 33세였다.
그가 복권되기 전까지 그의 이름조차 거론되지 못한 것은 '월북 작가'라는 꼬리표 이전에 그의 작품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이 알려지게 된 것은 남편의 월북 후에도 작품을 잘 보관한 아내 유갑봉 때문이다. 휘문고보를 다닐 때 서양화가 장발(1901~2001)을 담임교사로 만나 그림에 두각을 나타낼 무렵 이쾌대는 유갑봉을 만났다. 1932년 휘문고보 졸업반 시절에 만난 유갑봉은 진명여고 학생이었다. 그는 휘문고보 졸업후 일본의 유명 미술학교 도쿄 제국미술학교에 진학했다. 당연히 유학 시절을 아내와 함께했다. 일본의 전람회인 니카텐(이과전)에 <운명>으로 입선하고 내리 입선하면서 화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귀국 후 돈암동에 '성북동회화연구소'를 개소하여 후진을 양성했다. 성북회화연구소 시절 제자가 '물방울 화가' 김창열이다.
이쾌대, 카드 놀이 하는 부부, 91.2*73cm, 1948년 경. 아내를 모델로 한 것으로 보인다. 카드 놀이를 아내와 하는 사람은 드물다. 얼마나 아내를 사랑했으면 아내와 카드 놀이까지 했을까? 그런 그가 왜 월북을 택했을까?
이쾌대는 서양화에 전통 기법을 도입한 새로운 회화를 선보였다. 아내 유갑봉은 이쾌대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뮤즈'였다. 그의 작품 속 여인들은 모두 아내 유갑봉을 모델로 했다. 그러나 전쟁이 이들을 갈라놓았다. 인민군에 강제 부역한 이유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수감 중에도 그림을 그리고, 화가를 꿈꾸는 사람에게 인체의 해부학 소묘를 지도하기도 했다. 아내를 그토록 사랑한 그가 수감 중 월북을 택한 이유가 명확하게 밝혀지지는 않는다. 친형인 이여성의 월북으로 남한에서 자신이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고 우려했고, 분단이 이처럼 고착화될 것으로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추정할 뿐이다.
그러나 아내는 그의 월북 후 그를 기다리며 작품이 해금되기만을 기다렸다. 결혼 때 받은 패물을 팔아 네 아들을 길렀다. 자신이 살던 신설동 한옥 다락에 숨겨 작품을 보관했다.
자녀들도 다락방에 먼지투성이로 싸인 종이 뭉치가 아버지의 작품이라고는 눈치채지 못했다. 아내 유갑봉은 80년에 세상을 떴다. 마침내 1988년 월북 작가, 화가, 문인들이 해금되었다. 이쾌대가 체포되기 전 태어난 아들이 그의 작품을 세상에 공개했다. 그의 작품을 본 평론가들이 술렁댔다. 미술사를 다시 써야 한다고 했다. 우선 작품의 크기에서 사람들을 압도했다. 우리나라 화가중 누구도 이토록 거대한 크기의 작품을 그리지 못했다. 화풍의 경향성도 독특했다. 그의 작품에서는 르네상스 미술부터 20세기 초 사회주의 리얼리즘까지 다양한 경향성이 나타난다.
그가 해방 후에 그린 <군상> 연작은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이쾌대의 고뇌가 그려져 있다.
가장 유명한 작품이 <군상 1- 해방고지>이다. 작품 명이 '해방고지(解放告知)'이다. 해방의 기쁨을 알려준다는 내용이다.
화면 속 인물들은 다소 생소하게 얽혀 있지만 혼란 속에서도 밝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담았다. 하단의 죽은 사람들은 일제로부터 받은 고난을 상징한다, 오른편 남녀 군상은 일제에 대한 분노와 해방의 열망을 담았다, 그리고 마치 나는 듯 달려오는 왼편의 두 여인은 해방의 기쁨과 감격을 전해주는 사람들이다.
2024년 8월 15일, 광복절인 오늘 우리는 이쾌대를 비롯한 우리 민족 구성원들이 느꼈던 기쁨을 느끼고 있는가. 해방은 민족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는 나라의 반석과 같다. 이 반석 위에 우리나라가 서 있는것이 아닌가? 요즘의 광복절 관련 뉴스를 보며 마음이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