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곳곳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무심코 지나치던 곳이 역사의 현장이었고, 길 위에 아름다운 예술이 널려 있는데 뭐가 바빠 스치고만 살았을꼬?
8월 22일(목) 오후 5시 30분, 무더위가 한풀 꺽인 서울 한복판. 여기는 광화문역 4번 출구 기념비전 앞이다. 사람들이 속속 도착했다. 서울에 산재해 있는 예술의 현장을 발로 느껴 보고 싶은 사람들이다. 현장 속의 예술성을 강조하는 데일리아트의 창간 목적에 따라 《제1회 서울야행》을 시작했다. 데일리아트는 우리나라 근대기 화가들의 삶의 궤적을 좇는 《길 위의 미술관》 프로젝트에 이어 서울 곳곳에 산재한 예술사의 발자취를 찾아보는 행사를 시작했다. 평일 초저녁 느긋하게 모여 서울의 명소와 예술사의 현장을 둘러보고 함께 서울의 노포나 가성비 좋은 맛집을 찾아 나서는 기획이다. 주요 필진과 독자 십여 명이 함께했다.
비가 오락가락하고 시원한 바람도 불어 올 여름 중에는 가장 괜찮은 날이다. 너무 기분 좋은 날에 모인 사람들은 상기된 얼굴로 오늘 행사에 대한 기대가 가득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순서로 '천변 기행'이다. 청계천의 물 길 따라 예술의 흔적을 찾아나선다. 오늘의 길잡이는 데일리아트 한이수 대표가 맡았다.
시작점은 ‘고종 어극 40년 칭경 기념비’가 있는 곳이다. 교보생명 건물 바로 앞의 전각. 백 번도 더 지나다닌 사거리에 있던 ‘기념비전’ 이란 현판이 걸린 건물이다. 정확한 이름은 '대한제국 대황제 보령 망 육순 어극 40년 칭경기념비전'이다. 이름을 풀이하자면 이렇다. '대한제국 대황제'는 당연히 1897년 10월 12일 황제로 즉위한 고종을 말한다. '보령 망육순' 에서 '보령'은 나이를 높여 말하는 것이고 '망 육순'은 육순을 바라본다는 말이니 고종황제가 51세 되던 해인 1902년이다. 그 해는 고종이 왕으로 즉위한 지 40년(어극)이 되는 해이다. 왜 고종은 이 날을 이렇게나 축하하려 했을까?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고종은 나라를 반석 위에 세워 기틀을 잡으려 했다. 이 날 많은 외국 사절을 초대하여 대한제국의 뻗어나가는 국운을 과시하려 했다. 그러나 기념 행사는 영친왕의 천연두로 전염병이 돌아 돌연 취소됐다.
그 이후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며 러시아가 일본에 패하며 국운은 급속도로 기울어진다. 후손된 입장에서는 많이 안타깝고 속상한 시기였음을 아는지라 씁쓸하다. 남쪽 정면 돌기둥 위에 무지개 모양의 돌을 얹어 ‘만세문’을 만들었는데 만세문 글씨는 어린 영친왕이 썼다고 한다. 비전 안의 '기념비전' 글씨는 순종의 글씨라는 한이수 대표의 설명이었다.
큰길을 건너 동아일보를 지나 클라스 올덴버그(Claes Oldenburg)의 작품 <스프링>(2006) 을 잠시 감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설치 당시 현장의 역사성이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는 비난을 받았던 작품이기도 하다. 한국의 급진적 발전 상황을 반영하여 수직적 상승감을 강조한 작품으로 느껴지지만, 그의 대형조각들 <립스틱>이나 <구운 감자> 등은 사회성을 반영하여 많은 호응을 받았었는데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다.
바람이 분다. 청계천변의 물바람인가? 기분이 좋아지는 바람이다. 천변을 따라 걷다 보니 광통교가 나온다. 한 대표는 이 광통교야말로 서울에서 가장 으뜸으로 칠 수 있는 '최고의 스토리 텔링' 현장이라고 설명한다. 태조 이성계의 사랑, 신덕왕후 강씨가 죽자 그의 숙적 이방원이 묘소를 파내어 현재의 성북구로 옮기고 능 주변에 쓰였던 병풍석과 난간석을 떼어 사람이 밟고 다니라고 다리의 석재로 놓았다는 스토리가 청계천 물바람을 타고 한이수 대표에게서 흘러나왔다. 우리는 그 시절로 돌아간 듯 시간을 잊고 병풍석이 뒤짚여진 이야기 등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었다. 미술사적으로 흥미로운 것은 고려 불화에서 자주 발견되는 '금강저'가 광통교 아래 화강암에 조형되어 있다는 것이다. 제석천이 악
당 아사라를 물리치기 위해 사용한다는 금강저의 모습을 광통교에서 볼 수 있다니... 왜 이런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을까? 이시기는 조선초기라서 고려시대의 예술작품에 보였던 금강저의 모습이 조선초기까지 이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2005년 청계천을 복원하면서 올바르게 복원한다고 석물들을 바로세우지 않은것에 감사했다.
천변의 물소리를 들으며 걷다 보니 <정조대왕 능행 반차도>를 만났다. 정조의 효심은 행차 퍼레이드를 하며 백성들에게 왕권을 과시하기도 하고 구경거리를 제공하여 즐거움을 주려 했을 것이다.
여러 행정기관의 직인 등을 실은 인마와 갑마, 임금을 태운 좌마와 혜경궁을 태운 가마를 포함하여 1,779명이 그려졌고 동원된 말의 수가 779마리였다니, 그 행렬의 규모를 짐작할 수가 있었다. 김홍도의 총감독 하에 이루어져서 그런지 딱딱하고 위엄있는 행차도가 아니었다. 풍속도를 보는 듯하게 살짝 살짝 위트있는 장면이 섞여 있었다. 김홍도의 풍속도는 정조의 후원 하에 발전하였다. 정조는 도화서 화원들에게 '풍속도는 보는 이가 박수 치며 즐길 수 있게 그리라'고 요구하였다. 한참을 재미나게 쳐다보며 정조대왕을 찾아보았는데 찾을 수가 없었다. 왜일까? 조선의 예법으로는 왕의 얼굴을 아무 곳에나 그려 넣을 수 없었기 때문에 정작 정조의 얼굴은 그려져 있지 않다.
무더운 여름날 저녁에 청계천 바람을 맞으며 태조의 사랑 이야기, 태종의 신덕왕후 강씨 복수 이야기와 정조대왕의 능행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새삼 서울의 거리가 정답고 아름다워 감사한 마음이 흐뭇하게 피어오른다. 우리는 삼일빌딩 근처 전집에서 못다한 이야기와 필진들의 집필계획, 개인의 전시회 소개를 들을 수 있었다. 밤은 깊었다. 자문위원 한 분이 건배사를 했다. '아름다운 꽃을' 하고 외치니 함께 모인 사람들은 모두 '나에게'라고 했다. 어렵고 각박한 세상을 감내하며 살아가는 나에 대한 위로요 헌사였다. 그래도 예술이 있어서 우리는 세상을 아름답게 본다. 아름다움으로 세상을 덮는 그날까지... 예술의 길을 동행하는 친구들이 있어서 감사한 시간이었다.
한이수 대표는 다음 달의 두 번째 서울 야행은 '정동 야행'을 기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번에는 데일리아트의 다른 필진이 해설을 한다. 10월, 11월에는 매주 토요일 《길 위의 미술관》 프로젝트가 기다리고 있다. 다음달 추석지나고 좀 더 선선한 시간에 만나자고 약속했다. 정동에는 또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이야기와 예술의 숨결이 담겨있을지 기대가 된다. 좀 더 시원해져 있을 9월에 ‘정동 야행’으로 독자들과 함께하길 기대한다. 서울야행은 무료로 데일리아트 회원이면 참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