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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과 결정의 순간을 연결하면 인생이 된다

[일상의 리흘라]

by 데일리아트
내가 선택하고 결정했기에 나와 관계가 맺어지고 그때서야 의미를 갖게 돼

'산다'는 것은 순간순간의 선택과 결정이 이어져 시공을 채우는 현상이다. 인간 개개인은 이 현상을 100년 정도 이어갈 뿐이다. 그러다 보니 80억 명 인류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군상의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인간뿐만이 아니고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은 선택과 결정 속에 있다. 어느 선택과 어느 결정이 맞냐 틀리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살아 있다', '살고 있다'의 명제를 채우는 바탕에는 이런 생물 다양성의 본질이 깔려있고 '살아 있음'의 정의에는 이 선택과 결정의 순간이 이어지고 있음을 나타내는 시간적 범위를 갖고 있는 것이다.


선택과 결정의 주체는 '나'다. '나'는 개미일 수도, 새일 수도, 박테리아일 수도 있다. 내가 선택하고 결정하지 않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선택하고 결정하지 않는 것은 나에게 존재 의미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있을 뿐이지 나에게 의미로 다가오지 않는다. 내가 선택하고 결정했기에 나와 관계가 맺어지고 그때서야 의미를 갖게 된다.


내가 주체가 된 선택과 결정의 순간들을 나열해 보자. 복잡할 것도 없다. 모든 것이 선택과 결정이기에 그렇다. 지금 숨 쉬고 있는 호흡의 순간조차 내가 선택한 것이다. "호흡은 자연스러운 물리적 현상이라고?" "하고 싶지 않아도 횡격막이 오르내리며 공기를 들이마시고 뱉어내는 과정이라고?" 아니다. 이 호흡 한 줌 조차, 내가 숨을 쉬기 위해 결정한 것이다. 왜? 살기 위한 방편의 선택에 의해 이루어진다. 호흡을 통해 에너지를 연소할 산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코와 입을 막고 숨을 참을 수 도 있다.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휴대폰 화면에서 빠르게 전개되는 온갖 짧은 동영상 속에서 눈길을 멈추는 현상조차, 내 시선이 선택한 장면이다. 어느 것을 보고 어느 것을 거를 것인지는 오로지 내 시선의 관심사에 붙잡힌 선택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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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주체는 곧 '의지(意志 ; volition)'다. 선택을 하고 결정을 하게 만드는 마음과 의도다. 인간으로 진화되어 오면서 갖게 된 주체성의 겉보기 현상이다. 본능적 선택과 결정과는 차별되는 자의적 행위다.


이런 선택과 결정의 순간들이 경제활동으로 넘어오면 사업을 포기할 것인지 말 것인지, 프로젝트를 계속 이어갈 것인지 중단할 것인지 정해야 하는 결정적인 순간들과 마주하게 된다. 이때 이미 투자한 비용이 있으면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매몰비용(sunk cost)의 함정에 빠져 선택과 결정을 잘못하는 사례를 보게 된다.

즉 합리적 선택과 결정을 주저하게 만드는 요인들이 곳곳에 있는 것이다. 이 한계를 얼마나 잘 판단하고 넘어갈 수 있느냐가 성패를 좌우한다. 인간은 손해를 피하려는 심리와 자기 합리화 욕구가 결합되어 의사결정을 하기 때문에 이 매몰비용을 무시하기가 쉽지 않다. 투자한 것을 잃는 고통이 새로운 기회를 찾아가는 이득보다 더 크게 느껴지고, 그동안 투자해 온 결정이 옳았다고 생각했기에 중단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지금까지의 결정이 잘못됐다고 인정하는 꼴이 되므로 무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전자제품과 휴대폰으로 세계를 평정하던 소니와 모토로라 같은 기업들이 역사의 뒷길로 물러났고 디지털로의 전환을 빠르게 하지 못한 코닥필름 같은 제품들이 추억을 회상하는 물품으로 전락했다.


선택과 결정이 운명이라면 합리적으로 하는 게 맞다. 그럼 어떤 선택과 결정이 합리적인가? 합리적(合理的 ; rationality)이라 함은 "이치나 논리에 합당하다"라는 소리다. 과연 나는 합리적 의사결정을 하고 있는지?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자기 합리화를 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는지? 어떻게든 현상을 유지하고자 하는 면피성 행위로 일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뒤돌아보고 확인하고 신독해야 한다. 내가 한 선택과 결정이 나 혼자의 삶의 방향을 정하는 것이라면 어떠한 선택과 결정을 해도 상관없지만 내 선택이 가정과 회사와 타인에게도 영향을 줄 수 있는 상태라면 달라져야 한다. 선택과 결정이 신중해야 하는 이유다. 공해에 찌든 호흡보다 피톤치드 향 가득한 숲 속의 공기를 호흡할 선택과 결정을 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행동해야 한다. 떠나는 결정을 해야 한다. 그런 것이다. 산다는 것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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