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험의 전이 , 80대 '청년 작가'의 예술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곽훈 전시, 한눈에 보는 80대 청년 작가의 예술 여정
운명이 이끄는 거대한 힘일까? 아니면 인간의 사적인 욕망일까? 알래스카 이누이트족의 작은 고래잡이 배를 아래에 두고 검은 바닷물을 뒤집어쓴 채 남보랏빛 고래가 무섭게 하늘을 향해 솟구친다. 이 형상은 우리가 느끼는 감성적 표현 영역 저편에 존재하는 대자연의 숭고함을 보는듯하다. 곽훈(b.1941) 작가가 2019년부터 고래잡이를 화두로 삼아 몰입해 온 <할라잇(Halaayt)> 시리즈 앞에 서면 80을 넘긴 노작가가 내뿜는 에너지와 생동감에 경외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무제 Untitled/ Mixed Media on Canvas/ 163 x 131.5cm/ 1972할라잇 Halaayt/ Acrylic on Canvas/ 228 X 182cm/ 2023
대구문화예술회관은 2008년부터 대구 화단의 발전에 기여한 원로작가를 초청하여 회고전 형식으로 전시회를 개최하고 있는데, 이번에 선정된 곽훈 작가의 《선험의 전이(Transitions of Transcendence)》야말로 그 취지에 맞는 전시로 기억될 것이 분명하다.
작가 곽훈은 서울대 미대를 졸업하고 1969년 김구림, 김차섭 등과 함께 A.G.(Avant-Garde)를 창립, 실험주의 미술 운동을 전개했다. 1970년 당시 프레스센터에서 29세의 나이에 개최한 첫 전시, 《전자예술 전람회》는 전자 장치와 현대음악을 이용한 우리나라 최초의 전시로 기록되어 있다. 이번 전시에 그 영상이 복원되어 50년 만에 새롭게 선보이고 있어 큰 의미를 주고 있다.
'전자예술 전람회' 영상 캡쳐/ 1970년 12월 27일 전시/ 신문회관 화랑
이 전시는 스크린, 조명 장치, 그리고 거울 설치로 이루어진 설치 작업으로, 작곡가 벨라 바르톡(1881-1945)의 '현과 타악기, 첼레스타를 위한 음악 (Music for Strings, Percussion and Celesta)'을 조명과 화면으로 인터랙티브하게 출력하는 작품이다.
'전자예술 전람회' 전시 당시 29세의 곽훈 작가 모습
그 후 1975년 미국으로 건너가 당시 유행하던 히피 문화, 반문화 정서 등의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생계를 위해 광고회사에서 일하며 접하게 된 거대 상업미술의 세계는 작가를 새롭게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 안에서 작가의 선험적 기질과 이국적 문화의 충돌이 있었을 것이다. 1980년대 초 이러한 예술적 성찰을 통해 작가만의 독보적인 화업이 서서히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기>, <찻잔Teabowl> 연작 시리즈이다.
무제 Untitled/ Mixed Media on Canvas/ 163 x 131.5cm/ 1972
작가는 자신이 느낀 문화적 이질감을 동양의 기와 우리 고유의 찻잔으로 승화하고자 한 것인데, 1970년대 이미 서구 예술계는 선(禪), 일본 미술, 불교 등 동양적인 소재가 널리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의 우려와는 달리 현지의 호평을 끌어낼 수 있었다.
'기'(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랜드 사이)/ Acrylic on Canvas/ 204 x 312cm/ 1988
이번 전시에는 귀국 후 이천 지역에 가마를 설치하고 제작한 100여점의 <찻잔 Teabowl> 설치 작품도 함께 선보이고 있다. 작가가 담아내는 찻잔은 그 형태 자체가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일체 만물이 직접적 원인인 인(因)과 간접적 원인은 연(緣), 두 가지에 의해 태어났으며 모든 것은 그 인연에 의해 변할 뿐 관념적인 실체가 없다는 불교의 근본 교리를 표현하고 있다.
100여 점의 '찻잔' 설치 작품과 드로잉
찻찬, 가마, 흙에서 흙으로/ Oil on Canvas/ 101.5 x 76cm/ 1980
1990년대 들어 시작한 <겁 Kalpa>과 <겁/소리 Kalpa/Sound>는 우리나라는 물론 유럽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화면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흑과 백, 회색 계통의 물감이 층을 이루고 의도적으로 긁어내어 문지른 흔적도 보인다. 오랜 세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되는 만물의 형상을 표현한 것이다. 또한 <겁/소리 Kalpa/Sound> 연작에서는 소리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것은 모든 샤머니즘적 의식에서 필수적이라 할 수 있는 선율, 리듬 등 음악적 요소를 활용하여 주술적이고 종교적인, 또는 초월적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겁' Kalpa/ Acrylic on Canvas/ 183 x 227cm/ 1990
1995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선보인 작품과 소리(전통 음악)의 조합은 사운드가 미술 전반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오늘날의 미술계 동향을 볼 때 30년이나 앞서갔다고 할 수 있다. '겁(劫)'은 고대 인도에서 가장 긴 시간을 나타내는 단위이다. 작가는 생명의 생성과 소멸이 끝없이 반복되는 세상의 흐름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 오랜 흐름 안에서 우리는 새롭게 태어난 것이 아니라 수백, 수천 년 역사 속에서 ‘선험적’인 성질이나 기질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이다.
'겁, 소리' Kalpa, Sound/ Acrylic on Canvas/ 202 x 156cm/ 1996
최근 곽훈 작가가 몰입하고 있는 <할라잇 Halaayt> 연작은 작가가 알래스카를 여행하다 우연히 고래 뼈 더미를 보고 예술적 영감을 받아 작업하기 시작한 것이다. 북극지방의 이누이트족은 고대 시대부터 고래를 사냥했다. 그것은 단순한 사냥의 개념을 넘어 거대한 운명에 대항하는 인간의 샤머니즘적 의식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를 인지한 작가는 울산 장생포의 반구대 암각화가 갖고 있는 약 7천만 년 전 고래 사냥 기록과 연결하여 고유의 한(恨)을 작품에 투영시키고자 했다.
할라잇 Halaayt/ Acrylic on Canvas/ 228 x 182cm/ 2023
할라잇 Halaayt/ Acrylic on Paper/ 76 x 56cm 45pcs/ 2024
어떤 것이든 이루어 내는 인간의 도전적이고 진취적인 본성, 그 근원은 인간의 욕망이다. 이는 오늘날 환경 문제 및 기후 위기 등 심각한 문제를 만들고 있지만 작가는 신의 가호 아래 사는 인간과 역시 신의 범주에 있을 고래의 만남을 통해 이 세계가 <겁Kalpa>으로 연결되는, 그래서 선험적 전이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세상의 이치를 표현하고자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본 전시는 9월 26일까지 대구문화예술회관 제1~5전시실에서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