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리흘라]
한 직장에서 35년 생활을 한 어느 직장인의 고백
10월 말이면 정년퇴직이다. 직장 생활은 누구에게나 시한부이다. 나에겐 이제 왔을 뿐이다. 장은 옮겨가는 것이지만 한 장을 끝낸다는 것에는 어떤 매듭이 필요하다. 출근을 안 하는 시간까지의 심정, 그리고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들을 바라보는 심경을 있는 그대로 써 보자.
정년퇴직 카운트다운 - 6일 남았다
생일이 1964년 10월이라 10월 말일까지 근무하고 정년퇴직하는 것이지만 마지막 10월 한 달은 연차휴가를 내고 쉬기로 했다. 그렇다고 뭐 특별한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쉬기로 했다. 쉬면서 월급 받는 마지막 희열을 느껴보고 싶기도 했다. 그래도 "언제 정년퇴직이세요?"라고 물으면 "다음 달말까지요"라고 애써 한 달여가 더 남았음을 강조해서 답변한다. 하지만 나에게 남은 현재 직장에서의 시간은 주말을 빼고 워킹 데이로는 오늘을 포함하여 딱 4일밖에 안 남았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이랍시고 나오는 시간이 그것밖에 안 남았다는 소리다.
정해진 시간이 있다는 것은 두 가지 시선을 끌고 온다. 하나는 그 시간이 오기를 설레며 기다리는 것이요, 또 다른 하나는 그 시간이 좀 천천히 오거나 안 오기를 바라는 시선이다. 어차피 올 시간임에도 그 시간을 어떻게 기다리느냐에 따라 엄청나게 다른 온도 차이를 보인다.
나는 어떤가? 애매하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경계에 있는 듯하다. 시원섭섭하다는 표현이 그나마 적절한 감정의 표현 같다. 이 직장에 입사한 게 1990년이니 올해로 35년째다. 한 직장, 한 부서에서 참 오래 다녔다. 기쁜 마음으로 홀연히 떠날 수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인생의 절반 이상, 아니 한평생을 보낸 곳이다. 얼마나 많은 희로애락이 이곳에 묻혀 있는데 ….
어제부터 천천히 책상 서랍을 정리하고 주변을 조금씩 치우고 있다. 어차피 이번 달 들어서 업무 현업에서 손을 뗐다. 같은 부서에 근무하는 후배들의 너른 아량과 배려 덕분이다.
음, 이 글을 써 내려가면서 조금 울컥하는 마음이 든다. 눈물도 배이는 듯도 하다. 감정이란 참 ….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떠올리고 어떤 단어를 끌고 오느냐에 따라 감정이 정해짐을 아침마다 글을 쓰면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현실로 다가오고 시간으로 다가오니 스멀스멀 올라오는 감정을 숨기기 쉽지 않다. 요즘 부쩍 얼굴에 홍조도 생겨, 7~8월 더운데 운동을 많이 나가서 그런가 핑계를 대 보기도 하지만 갱년기여서 그렇다는 결론이다. TV 인생 다큐멘터리를 보다가도 눈물이 나고 떨어지는 낙엽만 봐도 울컥한다는 그 갱년기가 나에게 온 것일까? 갱년기가 뭔지도 모르고 살아 왔는데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으니 이제야 몸의 변화를 인지하게 된 것일까?
다시 정해진 시간으로 돌아가 보자. '정해져 있다'는 것은 한계를 긋는다. 시한부 날짜를 받아 든 환자가 맞이하는 아침과 비슷한 심정이라고 할까? 눈 뜨면 출근해야 할 곳이 있어 아침 시간을 분초 단위로 써야 했던 수많은 시간들이 타임 슬립처럼 지나가다 정지된 한 컷, 한 컷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출근하기 싫어 꼼지락거리고 이불을 당기던 시간조차 사치로 느껴지고, 전철 놓칠까 봐 부리나케 뛰어가던 뒷모습은 애교가 된다. 술 마시고 늦은 밤 귀가하다 아파트 현관 계단에 잠시 앉아 잠이 들어, 경비 아저씨가 깨웠던 순간조차 추억이 되면 "나 때는 말이야!"를 되뇌는 꼰대가 되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게 직장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세상 속으로 들어갈 채비를 한다. 직장이라는 울타리는 단점보다는 장점이 많다. 보호와 존속의 의미에서는 더욱 그렇다. 개인의 능력에 아우라를 덧씌워 환영으로 작동되기도 한다. 그 문을 나서는 순간, 혈혈단신으로 버티고 이겨내야 한다. 심지어 인터넷 와이파이 연결 비용을 내가 내야 하며, 와이파이 무료로 쓸 수 있는 곳을 찾아다녀야 한다. 볼펜 한 자루, 복사용지 한 장, 커피 포트의 커피 한잔, 점심 한 끼조차도 내가 해결해야 한다. 직장이라는 울타리에서는 생각할 필요도 없던 일들을 해내야 한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 대단한 일로 다가오는 현실을 만나야 한다. 그렇다고 너무 긴장할 필요도 없다. 닥치면 다 하게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