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카 이 개인전
향, 박테리아, 곰팡이.. 실험실 같은 미술관
리움미술관 아니카 이 개인전《또 다른 진화가 있다, 그러나 이에는》전시 포스터. 출처: 리움미술관
리움미술관에서는 9월 5일부터 오는 12월 29일까지 아니카 이 개인전 《또 다른 진화가 있다, 그러나 이에는》이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는 2022년 글래드스톤 갤러리 이후 국내에서 하는 작가의 첫 전시이자 아시아 첫 개인전이다.
아니카 이(Anicka Yi, b.1971)는 두 살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간 한국계 미국인 작가로 박테리아, 곰팡이, 냄새와 같은 요소들을 활용한 실험적 작업을 해오고 있다. 《나를 F라 부르세요(You Can Call Me F)》(뉴욕 첼시 ‘더 키친’, 2015), 《생명은 값싸다(Life is Cheap)》(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2017) 등의 전시에서 인간, 비인간의 존재들에 대해 탐구하며 그 경계를 흐리는 흥미로운 작품들을 선보였다. 그는 미술관을 마치 실험실처럼 박테리아, 곰팡이, 곤충 등을 배양하고 통제하는 장소처럼 만드는 작가이다. 2016년 구겐하임미술관 휴고 보스상을 받았고 2021년 테이트 모던에서 '현대 커미션' 작가로 선정되었다. 2016년 광주 비엔날레, 2019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등에 참여하며 전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아니카 이 , 섬의 가능성, 2012. 사진: 김해리
까만 커튼을 거두고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면 코끝을 찌릿하게 만드는 냄새가 퍼진다. 미술관이라기보다 과학 실험실 같다. 과학자의 실험실에서 볼 듯한 유전자가 조작된 박테리아, 움직이는 기계 로봇, 플라스크에 담긴 렌즈 등이 유리 안에 전시되어 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맡게 되는 향은<두 갈래 길을 한번에 걷기>(2023)라는 작품으로 '이솝'의 조향사로 알려진 바나베 피용(Barnabe Fillion)과 협업하여 제작한 것이다. 작가는 과학자, 건축가, 조향사 등 다양한 분야 전문가들과의 협업하며 생물학과 기술 철학, 환경의 정의를 넘나드는 폭넓은 작업을 한다.
아니카 이, 절단, 2024, '생물오손 조각' 시리즈 . 사진: 김해리
<느낌은 기술이다>(2015)는 콤부차를 발효시켜 만든 콤부차 가죽을, 신작 <절단>(2024)은 튀긴 꽃을 굳혀 제작한 조각이다. 부패하는 것들을 통해 삶의 영속성은 무엇인지 제시한다.
2015년 《You Can Call Me F》에 출품된 <너의 손은 전자레인지에 데운 베개 같아>(2015)는 격리를 위한 방역 텐트의 모습이다. 에볼라 바이러스가 유행할 당시의 혼란한 사회적 상황을 표현한다. 보이지 않는 위협에 대한 인간의 노력과 통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우리는 '코로나 바이러스 시절' 보이지 않는 위협에 대해서 혹시 지구가 괴멸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인 적이 있다. 작가는 이미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간파한 듯하다.
<공생적인 빵>(2015)은 공기를 주입시킨 PVC 돔에 빵 반죽을 두고 장내 미생물에 의해 소화되고 배출되는 신진대사를 보여준다. <포개진 허파>(2023~24)는 고생대 캄브리아기에 등장하는 플랑크톤인 방산충을 모티브로 만든 기계 생물체 모습이다. 방산충 시리즈들은 고대에 존재했던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모든 시간대를 끌어들여 인간이 존재했던 전 시기를 조망한다. 너무나 보이는 세계의 의식 속에 갇혀 있는 인간에게 세상은 너희들의 것만이 아니야 말하는 듯하다. 전시를 통해 인간의 좁은 사유의 영역을 확장시킨다.
아니카 이 , '또 다른 진화가 있다, 그러나 이에는' 설치 모습 . 사진: 김해리
아니카 이 , 포개어진 허파, 2023∼2024, 방산충 시리즈 . 사진: 김해리
이번 전시 제목 《또 다른 진화가 있다, 그러나 이에는》은 불교의 수행법 중 하나인 간화선에서 사용되는 화두의 특성을 빌려왔다. 전시에서 소개되는 신작 영상 <산호 가지는 달빛을 길어 올린다>(2024)에서도 작가는 불교 철학 ‘공(公)’의 개념을 가지고 왔다. 죽음 이후에는 모든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존재한다 한들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비어 있음은 존재 이후의 과정임을 작품을 통해서 미리 맛보게 하는 것이 작가의 의도이다.
영상은 죽음 이후를 탐구하는 대규모 프로젝트 <공(公)>에 속하는 첫 작품이다. 자신의 사후에도 작업이 계속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에서 작업을 시작했다. 작가는 AI에게 자신의 축적된 작업 데이터를 기반으로 작가 자신의 작업 형식과 미학을 학습하도록 했다. 영상은 작가가 진행했으나 AI가 제작한 것으로 아니카 이는 이를 '디지털 쌍둥이'라고 말한다. 아니카 이는 자연과 기술 모두 넘나들며 기술의 발전 또한 인간의 생태계 속에 작동하는 한 요소로서 ‘공생’할 수 있도록 연결점을 찾는다.
아니카 이는 우리가 쉽게 인지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비인간적인 사고를 예술에 담는다. 향, 박테리아, 시간 등을 가져와 인간 중심적인 사고에서 탈피하고 비인간의 존재들과 소통함으로서 ‘인간은 어떻게 세상에서 다른 존재들과 공생해야 하는가’ 질문을 던진다. 보이지 않지만 이미 우리와 뗄 수 없는 것들의 존재성. 작가는 작품을 통해 공생과 비어 있음을 보여준다. 관람자는 작품을 통해 의식의 확장을 얻게 된다. 작품들은 관람자들에게 시각적 즐거움만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새로운 관점과 물음을 선사한다.
리움미술관에서는 관람객들을 대상으로 작품 해설이 담긴 디지털 오디오를 제공해 주고 있으니, 오디오를 대여하여 감상한다면 작품 이해에 도움이 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