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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아트 Jul 19. 2024

서소문역사공원

[서소문 밖 첫 동네]

서소문역사공원

서소문역사공원

서소문역사공원 내의 현양탑. 정약종,이승훈, 황사영 등 낯익은 이름이 보인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 자는 줄도 모르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심각한 대화를 이어 갔다. 아버지는 목이 잘릴지도 모른다고 걱정하셨다. 아버지는 초등학교에서 물품 관리와 행정적 보조 업무를 담당하는 분이셨는데, 학교에서 발생한 불미스러운 일로 인하여 목이 잘릴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목이 잘린다니.. 아마도 아버지와 관련된 일이라, 학교에서 일을 그만두게 할지도 모른다는 부모님의 한 숨 섞인 대화였다. 해고 된다는 것을 목이 잘린다고 표현한 것인데 살아있는 사람의 생목이 잘린다는 소리로 알아듣고 가슴이 철렁한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직장인들이 자주 쓰는 표현을 조사하면 ‘목이 잘린다’는 표현이 수위에 들 것이다. 아마도 직장생활을 삶의 전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자의건 타의건 직장을 떠나야 하는 현실은, 자신의 목이 날라가는 것과 같은 가장 극단적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직장인들의 현실이다.


서소문 밖 이곳, 서소문 역사공원은 실제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생목이 잘려나갔던 곳이다. 무악재에서 발원하여 내려온 만초천은 이곳에서 아현과 약현의 높은 지형을 넘지 못하고, 이곳 서소문역사공원에서 선회하여 염천교 방향으로 내려갔다. 물이 흐르던 이곳, 평평한 지역은 넓은 모래밭이 형성되어 있었다. 모래밭은 끔찍하게도 사람을 참수(斬首)하기에 더 없이 좋은 곳이다.정확한 위치는 만초천의 여섯 개 다리중 하나인 서소문역사공원내의 ‘이교 건너 만초천변 모래사장’이다,


당시에 천주교를 믿었다하여 바로 참수되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자리에 있던 형조, SC제일은행 자리에 있던 의금부, 동아일보 앞의 우포도청 등지에서 고초를 당하면서도 끝까지 배교를 하지 않으면 마지막으로 이곳에 끌려온다. 참수가 확정된 사형수는 마차로 이곳으로 실려온다. 사형수를 발판위의 십자형의 틀에 매달고 내려오다가 서소문밖의 급한 내리막을 내려올 땐 발판을 빼어 머리가 대롱대롱 매달려온다. 도착할 때는 거의 기절상태로 온다. 형장에 도착한 사형수의 귀는 화살로 꿰뚫고 얼굴은 회를 발라 하얗게 만든다. 귀에 꿴 화살을 잡아당겨 목을 자르기 쉽게 평평하게 만들고 형을 집행 한다. 사형장면을 보기위해 믾은 사람이 몰려오는데, 칠패시장으로 장보러 온 사람, 성문밖으로 나들이 하러 온 사람, 숭례문을 통해 귀성하려는 사람들이 모인다. 사형을 집행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려는 일벌백계(一罰百戒)에는 최고의 장소였다. 단 번에 목이 잘려나가 죄수의 고통이 최소해지기를 바라는 사형자의 가족들은 막걸리로 불콰해진 망나니에게 뒷돈을 찔러주었다. 망나니의 칼춤, 생과 사의 절묘한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바라보는 시선들, 이 모든 광경들이 큰 구경거리였다. 모래밭에 나뒹구는 머리, 칼에 엉겨 붙은 사람의 기름과 피는 흐르는 냇물에서 씻으면 그만이었다. 앞장에서 언급한 두께 우물도 참형에 쓰인 칼자루를 닦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이곳에서 죽어나간 사람들이 몇이던가. 천주교신자들 뿐 아니라 동학농민전쟁의 지도자인 김개남을 비롯한 여럿도 이곳으로 왔다. 1984년 교황 요한바오로 2세는 이곳에서 죽은 순교자들을 시복, 시성했고 천주교는 현양탑을 세웠다. 지금의 현양탑은 1999년에 세워졌다. 탑은 가운데 주탑이 있고 좌우 대칭으로 두 개의 탑이 더 있다. 조선시대 죄인에게 씌웠던 큰 칼의 모양이다. 가운데 탑에는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의 형상이, 오른쪽에는 27위 복자와 30위 순교자의 이름이, 왼쪽에는 순교한 44위 성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66년 병인박해 때의 순교자 44위이다. 현양탑을 올려보니 낯익은 사람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정약용의 일가들이다. 이승훈은 정약용의 큰 매형이요, 정약종은 그의 셋째형이며 신유박해에 순교했다, 정약종의 아들 정하성은 기해박해에 순교했다. 교과서에서 배운 그 유명한 <황사영백서사건>의 황사영의 이름도 보인다, 정약용의 조카사위이다. 한 집안이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하여 무참히도 죽었다. 우리나라의 천주교는 이렇게 피로써 보존되었다. 정작 정약용은 이 죽음의 행렬을 피하여 귀향살이로 대신했다. 그의 배교는 진심이었을까?


조선시대 300년을 참수장으로 쓰였던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또 다른 살생의 현장이 되었다. 형장이었던 이곳의 넓은 모래밭에 경성부는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어류를 유통하는 활어시장을 개설했다. 경성역이 바로 앞에 있어서 각지에서 올라오는 수산물이 모이기 용이하였다, 남산 아랫마을 남촌에서 숭례문까지 형성된 일본 거류민들에게 생선을 공급하기에도 안성맞춤의 장소였다. 1927년 경성부수산시장을 개성하였고, 1937년에는 경성중앙도매시장으로 확대하였다. 싱싱한 선어를 경매를 통해 소매상들에게 공급하는 경성 최대의 도매시장이었다. 수 많은 동태대가리가 어시장 상인 손에 의하여 잘려나갔다. 해방 이후에도 이곳에 도매시장이 존속하여 어류는 노량진 수산시장으로, 채소류는 용산 청과시장으로 분화되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사람과 어류들이 잘려 나간 터가 보통 센 곳이 아니다.

티모시 슈말츠(Timothy Schmalz)의 작품, 노숙자가 된 예수님(Jesus the Homeless)

역사는 돌고 돈다는데 지금의 모습은 어떨까? 비오는 날 우산을 받쳐 들고 공원에 들어섰다. 1997년 IMF 이후에는 삶의 현장, 직장에서 타의반 자의반 쫓겨난 길거리의 천사들이 공원의 벤치에 몸을 의탁했던 곳이다. 무료 급식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넘쳐나던 곳, 인근 허름한 목욕탕은 이들을 구호하기 위한 구세군 자선센터로 바뀐지 벌써 오래되었다. 비는 내리는데 누군가가 벤치에 누워있다. 가까이 가서 깨워 볼까하는데 인기척에 미동도하지 않는다. 누구인가? 예수님이 아닌가. ‘노숙자가 된 예수님’(Jesus the Homeless)의 조형물이다. 이 예수상은 어느 성당 앞에 설치돼 신성모독의 논란까지 일으킨 캐나다 작가 티모시 슈말츠(Timothy Schmalz)의 작품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바티칸 인근에서 얼어 죽은 노숙인을 기리기 위해, 그의 작품을 직접 축복하고 교황청에 설치하였다고 전해진다. 이후 여러 나라에 설치되어 현재 서소문 역사 공원에 설치되어 있다.


아마도 예수님이 지금 다시 이 땅에 오시면 이곳에 이런 모습으로 누워계실까? 신앙의 절개를 지키고자 자신의 아까운 목을 내놓은 사람들이 200여년전 신유박해로 이곳에서 죽었는데... 그후 200여년 후에는 노숙자 예수님이 벤취를 지키고 있다. 어두운 밤에 비는 내리는데.. 그 예수님은 어떤 마음으로 이 자리를 지키실까? 삶의 무게에 찌들어 있는 지친 영혼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계실까? 이 고단한 삶의 벤취에서 인간의 고통에 공감하며 몸을 내려 쉬고 계실까? 돌아오는 길에 신문사 옛 동료들을 마주쳤다. 직장 동료들과 술 한잔 하고 택시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란다. 고단한 삶을 뒤로하고 집으로 가려는 사람들이다. 당신이 가정과 사회의 예수님이요.

참수한 피묻은 칼을 닦을 때 사용한 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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