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격변의 시대, 여성 삶 예술》은 천경자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여성작가 22명을 조망한 전시이다. 한국화의 채색 분야에서 독자적 화풍을 이룬 천경자 화백은 한국의 대표적인 여성 화가로 꼽힌다. 천경자는 1924년에 태어나 일제강점기(1909–1945), 8·15광복(1945), 한국전쟁(1950–1953), 4·19혁명(1960), 5·16군사정변(1961), 군사독재(1961–1979), 12·12군사반란(1979), 5·18 광주민주화운동(1980), 신군부 정권(1980–1993),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계속된 민주화 운동 등으로 이어지는 격변의 시대를 살아냈다. 예술가의 삶과 작품 세계는 분리될 수 없기에 시대 흐름 속에서 작가의 작품은 달라지고, 그를 반영하려는 모습이 보여졌다.
천경자의 경우 대표작으로 자화상을 떠올릴 정도로 작품 속 자신을 녹여내며 꾸준히 작품활동을 하였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길 좋아했던 천경자는 정규 미술학교가 없던 조선을 떠나 도쿄에 있는 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유학을 하며 미술공부를 하게 되었다. 동시에 제22회 제23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상하며 그 실력을 입증받아 왔다. 그러다 광복을 맞이하고 전쟁을 겪으며 남편 이형록의 소식은 끊기고, 여동생 옥희는 영양부족과 폐병 재발로 사망하며 고통스②러운 나날을 보냈었다. 그런 시간들을 견디기 위해 천경자는 <생태>(1951)를 그리게 된다.
<생태>는 산수나 인물 위주의 한국화 화단에 뱀이라는 특이한 소재를 선보이며 신선한 충격을 준 작품이다. “여자가 뱀을 그렸다”는 화제성으로 인해 많은 관객들이 모여 마감시간이 되어도 전시장 문을 닫기 어려울 정도였다. <생태>는 35마리의 뱀이 우글우글거리는 장면을 배경없이 전면에 드러내고 있는데, 이에 대해 천경자는 “뱀을 그린 동기는 오직 인생에 대한 저항을 위해서였다”고 이야기한다. 징그러운 존재를 한 마리 한 마리 직시하며 그려낸 것은 감당하기 힘든 고통과 맞서 이를 극복하려 한 것이었다.
전쟁을 겪은 동양화단은 한국 고유의 특성을 반영한 ‘한국화’ 형성이 당면 과제로 부상하였다. 동양화는 한국적인 재료, 소재, 기법 등을 추구해야만 한다는 틀에 얽매이며 특히 채색화는 곧 일본화라는 편견에 대부분 작가가 수묵화를 그리곤 하였다. 하지만 천경자는 <생태>와 같이 채색화를 주로 그렸다. 천경자는 본인의 작품을 한국화의 틀로써 보는 것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1954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전임강사가 된 후 제자들을 가르칠 때도 어떤 틀을 제시하거나 강요하지 않았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류민자, 이숙자, 오낭자, 이화자의 경우도 천경자의 제자로서 전통적인 동양화의 관습에 침착되지 않고 본인들만의 작품 세계를 보여준 모습을 확인 할수 있다.
이번 전시는 천경자의 현대적 사고방식을 받아들여 작업을 한 작가들의 작품과 그와 동시대를 살았지만, 일본의 화풍에 의해 동양화에 씌워진 굴레를 벗어나기 쉽지 않았던 여성 작가들을 조망한다. 특히 이번 전시에 주목할 것은 촘촘한 작가에 대한 기록을 전시장 벽에 보여주고 있다. 작가의 연보와 아카이브 자료들을 총망라하여 우리나라 근현대 여성 동양화가들을 재조명한 것이다. 이는 전시 소개에서도 언급되었듯이 향후 심화한 연구가 진행되는 단초가 될 것이라 생각된다.
전시 구성에 있어서도 전반적으로 시대 순을 진행되고 있으나 약간의 변주가 있다. 1전시실에서는 격변의시대를 살아온 작가의 작품, 2전시실에서는 《조선미술전람회》(1922~1944) 수상작가, 청전화숙, 낙청헌, 도쿄의 미술전문대학의 연혁과 수상작품이 전시되었다. 3전시실에는 광복 이후 고암화숙, 이화여자대학교, 홍익대학교, 서울대학교, 서라벌예술대학, 수도여자사범대학 등의 전문화된 교육기관이 등장하면서 그를 통해 배출된 작가들의 작품들을 볼 수 있다. 더불어 교육기관의 연혁에 대한 소개와 광복이후 <조선미술전람회>를 대신한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수상작가의 작품들까지 확인 가능하다. 4전시실에서는 동양화 단체에 대한 소개로 작품이외의 아카이브 전시가 되어있다. 마지막 5전시실에서는 여성의 삶과 예술이라는 주제로 전시되었다.
전시를 보다 보면 1전시실과 5전시실에 작가가 겹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격변의 시대를 살아온 작가들과 이들 여성의 삶과 예술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격변의 한국 근현대사에서 여성작가들의 삶은 남성중심 기득권 미술계에서 작품활동을 할 수 밖에 없었고, 가정에 돌아오면 가사와 양육의 의무가 있는 가부장적 인습에 종송도됐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예술은 시대적 난관과 가정적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한 줄기의 빛이었다. 1전시실과 5전시실의 수미상관식으로 마무리된 전시는 근현대 여성작가 중심의 동양화단을 거시적으로 바라보기도 하고, 작가 하나 하나를 미시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천경자 탄생 100주년 기념 《격변의 시대, 여성 삶 예술》은 천경자의 탄생을 기념하며 기획된 전시지만, 전시를 본 관람객들들은 천경자만을 기억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천경자와 동시대를 살아갔던 동료 작가들까지 기억 속에 남게 하며 깊은 여운을 남기고 있다.
출처 : 데일리아트 Daily Art(https://www.d-ar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