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이른 아침, 날씨는 추웠으나 저마다 상기된 얼굴로 모였다. 초가을에 시작한 행사가 이제 중반을 넘기니 초겨울이 되었다. 겸재 정선에 이어, 천경자, 장욱진, 박수근, 나혜석에 이어 오늘은 김환기 편이다. 길 위에서 우리나라 화가들의 궤적을 좇는다는 본지 프로그램이 좋아 모인 사람들이다. 6회에 접어드니 이제 어느 정도 안면을 튼 사람들이 서로의 안부를 물을 정도로 친밀감이 형성되었다. 미술이 좋아 토요일의 느긋한 휴식을 반납하고 이른 아침부터 부랴부랴 모인 사람들. 오늘은 날씨도 평년보다도 더 추운 4도이다.
사실 김환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김환기에 대해서 말하라고 하면 꿀먹은 벙어리가 된다. 가장 몸 값이 비싼 우리나라의 화가, 점묘추상, 이상의 부인이었던 김향안과 결혼한 모던 보이 등 각자가 알고 있는 조그만 지식들의 편린들을 오늘은 제 모습으로 짜 맞춰 온전히 김환기의 모습을 복원할 것이다. 그러면 행사의 목적은 달성된다.
오늘 해설을 맡은 박주형 연구원은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하고 있는 야무진 미술학도이다. 보통 김환기에 대해서 소개한다면 환기미술관이나 성북동에 있던 수향산방을 찾는데, 오늘의 집결지는 종각이다. 종로에서 김환기의 모습을 찾는다고? 우리가 알고 있는 김환기의 모습이 얼마나 협소했던 것인가? 사실 김환기의 궤적은 서울에 널려 있다.
오늘 3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다. 데일리아트의 게시판 외에는 홍보를 하지 않았는데도 한 두 번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이 지인들을 데리고 나오며 참가 규모가 커졌다. 오늘은 특별히 시내를 관통하기 때문에 해설사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 수 있어서 수신기를 준비했다. 우리는 종각에 모여 실내 강의장인 갤러리 올미아트스페이스로 이동했다. 미리 강의 준비를 한 박주형 연구원과 데일리아트의 정선문 이사가 문 앞에서 일행을 안내한다.
김환기. 한마디로 뭐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에서 가장 몸 값이 비싼 화가? 맞다. 얼마 전까지 우리나라 미술품 경매에서 가장 높은 금액으로 거래된 10개 가운데 8개가 김환기 작품이었다. 그런데 오늘 박주형 연구원의 강의를 들으니 최근에는10개 모두가 김환기의 작품이라고 한다. 김환기는 초대형 작품들이 많다. 190cm에 육박하는 장신의 화가가 종일 달걀 두 알만 먹고 그렸다는 그림들. 이 그림들이 경매에 나온다면 크리스티 경매에서 최고가를 갈아치운 <우주>의 경매가 132억을 쉽게 넘길 수 있을 것이다.
말로만 듣던 점화가 그저 점하나 찍어 완성되는 줄 알았는데, 설명을 들으니 점을 찍고 네모를 그리는 과정이 너무도 고될 것 같다. 그는 이것을 통해 무엇을 표현하려고 했을까?
달 항아리에 매료되어 종로 한복판에 화랑까지 열었고, 6·25 때는 자신이 모은 도자기를 우물에 넣어 보관한 사람. 그는 "세계적이라면 가장 민족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예술이란 강렬한 민족의 노래인 것 같다"고 술회한 바 있다. 그는 민족의 정서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일까?
신안군 안좌도에서 태어나 육지를 그리워하여 목을 길게 늘여, 모가지가 길어져 키가 커졌다는 싱거운 사람. 자신의 호 향안, 멀리 언덕의 고향을 그리워하듯 본다는 호는 그래서 나온 말이다. 자신의 호까지 변동림에게 주었던 낭만 가득한 사람. 그러나 목을 늘여 바라본 것은 안좌도 앞의 신안이라는 작은 고을만이 아니었다. 서울, 일본을 건너 프랑스까지, 상파울로까지, 미국까지 그가 지향한 예술의 지향점은 멀고도 높았다.
박주형 연구원의 강의 후, 전주에서 참가자들에게 줄 도자기 종지를 들고 온 이정우 전북고미술협회장의 소개가 있었다. 이정우 회장은 현재 KBS '우리동네 금송아지'에 고정 패널로 등장하여 미술품에 대해 전문적 감식을 하는 분이다. 시간이 없는데도 데일리아트의 《길 위의 미술관》을 응원하기 위해서 왔다. 알록달록한 종지는 참가자들의 넋을 빼앗았다.
박주형 연구원이 가장 먼저 간 곳은 신사실파 전시회가 있던 화신화랑이다. 화신백화점은 1987년 없어지고 그 자리에는 종각 타워가 서 있다. 김환기를 소환할 수 있는 아무런 흔적이 없다. 아무런 영혼도 없는 건물. '신사실파'의 멤버는 이중섭, 유영국, 이규상 등이었고 김환기가 붙인 '신사실'이란 이름은 "추상을 하더라도 모든 형태는 사실이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라"는 의미에서 나온 말이다. 1948년 12월 7일에서 14일까지 전시한 화신화랑에서 김환기는 <달과 나무>를 전시했다. 박주형 연구원의 설명을 들으니, 미술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김환기의 추상을 쉽게 감상할 수 있었다.
남대문로를 따라 횡단하여 서울의 중심부로 향했다. 서울은 이미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서서히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아! 이제 한 달만 지나면 예수님이 탄생하신 크리스마스구나. 롯데백화점 앞에 있는 대형 트리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김환기로 모인 사람들. '길 위의 미술관'이라는 프랭카드에 앞에 줄지어 서니 우리는 모두 미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인 사람들이다. 데일리아트의 슬로건,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문화공동체'의 의미가 떠오른다. 미술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 김환기는 무수히 많은 점들을 찍으며, 윤동주의 「별 헤는 밤」에 나오는 사람 이름처럼, 고향의 친구들과 무수한 기억의 아름다운 추억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추운 겨울의 초입에 박주형 연구원의 깊은 해설 속으로 우리들은 빨려들어 갔다.
자리를 옮겨 한국은행 주변 갤러리로 향했다. 이름만 들어도 가슴을 울렁이게 만드는 많은 화가들의 작품이 걸려있었다. 두 시간 반이 훌쩍 지나갔다. 모임에 처음 참석한 몇몇 분들은 이렇게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어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이제 한 번만 더하면 《길 위의 미술관》 올해의 행사는 끝이다. 참으로 함께한 사람들이 고맙다. 함께 미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잘난 척할 수 있어서 참 좋았다. 김환기라는 사람이 우리나라 화단의 자존심을 지키고 있어서 더욱 좋다. 김환기도, 오늘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도 참 고마운 사람들이다.
《길 위의 미술관-구본웅 편》 안내
일시: 12월 7일(토)
신청: dart2424@naver.com
참가비 2만원 485-004983-12-002 우리은행 한이수
출처 : 데일리아트 Daily Art(https://www.d-ar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