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는 한 개인의 생각이나 의지를 나타낼 수 있는 가장 힘 있는 수단 중 하나다.” 역사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쉽게 낼 수 없었던 여성들은 문자를 통해 자신의 의사를 표현했다. 인천광역시에 소재한 국립세계문자박물관에서 진행 중인 《올랭피아 오디세이 - 문자와 여성, 총체적 예술의 거리》에서는 문자를 활용한 다양한 작품 속에 담긴 여성들의 목소리를 총 3부에 걸쳐 ‘시선’ , ‘확장’ , ‘연결’ , ‘사유’라는 네 가지 키워드를 통해 보여준다. 특히, 이번 전시는 프랑스 샹폴리옹 세계문자박물관과의 첫 번째 교류전으로 동서양을 넘나들며 여러 작가의 작품을 폭넓게 이해해 볼 수 있다.
먼저 첫 번째 키워드인 ‘시선’에서는 미술사 안에서 예술 작품 속의 여성이 어떠한 시각에서 표현되었는지를 탐구한다. 인상주의 아버지라 불리는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1832-1883)는1863년 <올랭피아>를 선보이며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전통적으로 여성 누드화는 신화 속의 여신의 형태로 그려졌다. 그러나 마네는 올랭피아를 통해 신화 속 여신이 아닌 매춘부의 모습을 캔버스에 표현하여 당대 상류사회의 위선을 드러내었다.
아네스 튀르노에(Agnès Thurnauer, b.1962)는 마네의 <올랭피아> 위에 12세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여성을 의미하는 뜻으로 쓰인 단어를 빼곡하게 채워 넣었다. 작가는 이러한 문자와 회화의 공존을 통해 여성들이 특정한 단어의 한계와 그 단어들이 만들어낸 고정관념의 틀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이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1984년 결성된 이후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인 것으로 널리 알려진 게릴라 걸스(Guerrilla Girls)의 작품들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이들은 문화 예술계 내부의 남성 중심의 문화를 비판하면서 다양한 작업을 펼쳤다. 그중에서도 <여성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들어가려면 옷을 벗어야 하는가?>는 그들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이 작품은 유명한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 중 여성 작가의 작품은 5% 미만이지만 누드화의 85%는 여성을 그린 것이라는 사실을 기반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이 작품은 강렬한 문구와 신고전주의 화가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JEAN-AUGUSTE DOMINIQUE INGRES, 1780-1867)의 <그랑드 오달리스크> 속 여성을 패러디하여 관람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게릴라 걸스만의 유머러스함과 통찰력을 잘 보여준다.
한편 키워드 ‘확장'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한 시대와 그 시대의 문화를 나타내는 수단으로서의 문자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이 중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여서(女壻)'다. 여서란 중국 후난성의 소수민족이 사용하던 여성 전용 문자로 과거에 한자를 배우기가 쉽지 않았던 시대에 여성들이 소통과 문학을 창작하기 위해 사용하던 문자이다. 이전에는 여서의 중요성이나 가치가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들이 독자적으로 구축한 문자로서의 의미와 가치를 인정받아 오늘날 다시금 재조명되며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여서로 작성된 글뿐 아니라, 여서가 놓인 자수 손수건이나 부채 형태의 작품 등 여성들의 삶에 녹아든 여서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살펴 볼 기회를 제공한다.
여서와 더불어 다양한 현대 작품들도 만나 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아네스 튀르노에의 작품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앞서 소개한 마네의 올랭피아를 오마주 한 작품을 선보였던 작가는 <실물 크기의 초상화>를 통해 많은 것들을 생각해 보게 한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둥근 원형 모양의 조각 위에 미술의 역사 안에서 널리 알려진 유명한 남성 작가들의 이름을 여성의 이름으로 바꿔 놓았다. 처음에 이 작품과 마주하게 되면 오타가 난 것으로 보여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원형의 조각 위에 박힌 이름들을 관람하다 보면 미술사학자 린다 노클린(Linda Nochlin,1931 -2017)이 1971년 발표한 유명 논문인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었는가?」가 떠오르며 남성을 중심으로 기록된 기존의 미술 역사에서 기록되지 못한 당대의 여성 작가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세 번째 키워드 ‘연결'에서는 다양한 분야에서 사회 변화에 기여한 여성들의 활약이 소개된다. 특히 프랑스 최초의 여성 기자 세베린(Séverine,1855-1929)이 쓴 여성 참정권 초고를 비롯하여 당대 여성 지식인들의 생각이 담긴 글들을 실제로 만나볼 수 있다. 비록 프랑스어를 하지 못해 그 안에 담긴 내용을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세계사를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귀중한 역사적 기록물을 살펴볼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귀중한 경험이었다.
마지막 키워드인 ‘사유’에서는 소피 칼(Sophie Calle, b.1953)의 영상 작품인 <바다를 보다>가 전시된다. 이 작품에서는 고원 지대와 산악 지대에서 태어나 살면서 바다를 본 적이 없는 남녀노소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바다를 보고 각각 다르게 반응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바다’라는 단어를 지식으로만 익혔을 그들이 두 눈으로 직접 마주한 바다의 느낌이 어땠을지 매우 궁금해진다.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는 말처럼 경험을 통해 만난 바다가 그들에겐 어떻게 다가왔을까? 이 작품은 단어와 그 실제 경험에 관해 많은 것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올랭피아 오디세이》는 다양한 작품들을 통해 문자와 여성을 새롭게 이해해 볼 수 있게 한다. 문자로 표현된 여성들의 생각을 통해 역사를 해석하는 여러 관점을 경험해 볼 수 있기를 바란다.
[박정현의 시각] 문자를 통해 여성을 바라보다 < 리뷰 < 미술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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