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와의 아름다운 동행
나는 신문사에 근무하면서 틈틈이 취미로 그림을 그려왔다. 내가 매일 다니는 서울의 골목들과 인근의 궁궐, 청계천, 문화 유적들에 관심이 많아서 그것을 그림으로 남기다보니 서울에 대해서 조금 알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전 미국에서 거주하는 딸, 사위와 초등학생 손자 둘(형주.주원)이 서울을 방문했다. 이 사랑스럽고 귀여운 손자들에게 어떤 추억을 선사할까?
손자들에게 우리 문화에 대한 견문을 넓혀주고 체험을 하게 한다면 우리나라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줄 좋은 기회가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자들을 역사문화의 현장으로 안내하기로 마음먹고 준비를 시작했다.
사실 서울은 세계적인 도시로 가볼만한 장소와 문화유적이 넘쳐나는 곳이다. 재미있고 즐거운 놀이시설 역시 주변에 산재 해 있다. 그래서 나는 손자들에게 역사적 유물을 소개하기로 마음 먹었다. 어떻게 얘들을 데리고 나갈까? 고심하다가 손자에게 할아버지의 취미이며 특기인 어반(도시풍경)스케치를 함께 하자고 했다. 그림에 관심이 많은 손자들이 망설임 없이 따라 나섰다.
손자들이 직접 현장 체험을 통하여 직접 그린 그림은 사진보다도 더 훨씬 선명하게 오래 기억될 것이 분명하다. 나는 손자들과 함께 서울 곳곳을 다니며 그림을 그렸다. 이것을 데일리아트에 연재를 시작한다. 할아버지와 손자의 도란도란 이야기와 그림들, 조금은 쑥스럽지만 첫 발을 딛는다.기대해 주시기를 부탁한다. (할아버지 이재영)
1.서울(한양) 도성의 정문 – 숭례문 The Main Gate of Seoul City Wall – Sungnyemun Gate
손자들을 데리고 간 곳은 숭례문이었다. 숭례문은 누가뭐래도 국보 1호이기 때문이다. 또 숭례문을 통과해야 서울에 들어올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1392년에 한양(서울)으로 천도하면서 만든 문 숭례문. 그러나 임진왜란과 수 많은 일들을 겪으며 우리 역사의 크고 작은 일들을 목격한 문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때는 왜군이 이 문을 통해 들어왔고 6.25 때 얼룩진 총탄의 흔적이 이곳저곳에 보이기도 한다. 대한제국 시절에는 치열한 남대문 전투가 벌어진 숭례문. 이러한 이야기를 모두 들려줄 수 없다. 조금 더 자라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를 더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하나씩 들려줄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궁궐(경복궁)을 건축하고 이를 보호하기 위한 도성을 쌓으면서 그 남쪽에 생긴 문이 숭례문이라는 원론 적인 이야기만 손자에게 들려주었다. 미국에 거주하는 아이들에게 가장 쉬운 이야기부터 조금씩 해 주어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국보 1호인 숭례문은 조선시대 한양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4개의 문(흥인지문, 돈의문,숭례문, 숙정문) 중 하나로 도성의 정문이며 남쪽에 자리하고 있어서 <남대문>이라고도 한단다
손자 : 할아버지! 그건 우리도 알아요.
할아버지 : 그렇구나. 하지만 아침에 열고 저녁에 닫았던 이 성문에 담겨진 역사는 모를껄.
우리 한 번 예전에 이문을 통과했던 임금처럼 성문을 열고 들어가 볼까?
손자 : 할아버지! 너무 멋져요.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성문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숭례문은 1962년에 국보 1호로 지정되었다. 손자들이 알고 있는 상식은 국보 숭례문이 그냥 '남대문'으로 불린다는 것이 고작이었다. 나는 성문을 여는 시늉을 하고 즉석에서 스케치를 하였다. 그러면서 남대문, 즉 숭례문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건축물로 조선시대 한양(서울)에 입성하려면 반드시 이 문을 통과해야만 했다는 역사를 들려 줬다.
성문을 열고 닫을 때는 종이나 북을 쳐서 알렸단다. 2경(저녁 10시)에 성문을 닫는 것을 인정, 5경(새벽 6시)에 성문을 여는것을 파루라 했어. 그 옛날 한양으로 오는 백성들은 이 문을 보면 아! 이제 서울 다 왔구나 마음이 놓였어. 이 문은 멀리서도 보였지. 왠지 알아? 한양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이 문이기 때문이야.
작은 손자 주원이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고작 2층에 불과한 이 문이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고? 백층이 넘는 건물이 즐비한 미국에서 생활한 아이들이 이해하지 못하는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이 문을 보고 감격한 백성들이 울렁이는 마음으로 감격하여 절을 올렸다는 이야기도 했다. 이는 바로 임금이 머물고 있는 왕도를 상징했기 때문이다. 순박한 백성들이 처음 보게 되는 거대한 성문은 도성 최고의 상징물이었다. 숭례문은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성축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앞면 5칸, 옆면 2칸 크기로 지은 누각형 2층 건물이다.
임진왜란 때도 끄덕 없던 성문이 파괴된 것은 1907년이었다. 일본이 고의적으로 성문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황태자가 서울을 방문한다고 하여 성문 주변의 성곽을 철거한 것이다. 그들은 대일본의 황태자가 고개를 숙이고 성문에 들어올 수 없다하여 성주변의 성곽을 파괴하고 그 곳으로 들어오게 한 것이다.
그리고 한때는 전차가 성문 아래로 다니면서 그 굉음소리와 울림 때문에 성벽의 일부가 훼손되 기도 했다. 우리 나라가 일제 강점기를 벗어나고 나서 성벽을 다시 세우고 예전 모습에 가까운 모습으로 복원되었다는 이야기를 손자들에게 하면서, 문화재 보호의 중요성을 상기시켜 주었다.
그러나 이처럼 귀중한 숭례문이 불과 얼마 전 우리 나라 사람에 의해서 다시 불이 난 사건이 있었다. 2008년 토지 보상에 앙심을 품은 사람의 방화 사건으로 문루 2층이 모두 불에 타는 피해를 입은 것이다. 그야말로 석축만 남기고 나무로 된 모든 것이 무너지고 지붕도 폭삭 내려앉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숭례문에 몰려와 울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표시했다.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았을까?
이후 5년에 걸친 복원 과정을 거쳐 다시 지금의 모습을 되찾았다. 귀중한 우리 문화재를 보호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한 번 설명해 주었다. 손자들도 숙연한 자세로 공감한다. 갑자기 작은 손자가 숭레문의 벽체로 다가 갔다.
작은 손자 : 얼마나 뜨거웠을까?
스케치를 하다 말고 작은 손자 주원이가 성벽을 어루만졌다. 큰 손자 형주도 성벽을 감싸 안았다. 갑자기 콧 등이 시큰거리며 감정이 솟아올라, 문득 성문 위의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숭례문은 월요일을 제외하고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무료로 개방한다. 특히 오전 10시부터 11시 40분까지는 파수 의식을 진행하고 있어, 어린이와 함께 서울 중심을 나들이할 때 눈여겨볼 만하다
[손자와 함께하는 서울이야기 ①] 우리민족의 역사와 함께한 한양 제1관문,숭례문 < 문화일반 < 문화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