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미술관》 오늘은 구본웅 편이다. 몇 달간 이어졌던 프로젝트가 오늘 막을 내린다. 길 위의 미술관이라니... 우리가 늘상 다니는 '길'과 '미술관'은 어떤 연관 관계가 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하나의 작품은 화가의 작업실에서 불현듯이 생성되는 것이 아니다. 작품이 작가의 총체적 결정체라고 할 때, 작가가 연관 맺었던 모든 장소, 살았던 집과 학교, 그 밖에 화가의 행적이 담긴 공간들은 작품과 다각도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우리는 그것에 천착했다.
오늘은 마지막회로 구본웅의 길을 걷는다. 구본웅을 이상의 친구로만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영화 「금홍아 금홍아」에서 꼽추로 분장한 가수 김수철이 구본웅 역을 맡았다. 프랑스의 롤루즈 로트렉에 비견되는 화가 등 그를 수식하는 단어들이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그러나 그는 1930년에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일본의 '이과전'에 입선한 대단한 화가이다. 색이 펄펄 춤추는 그의 작품 앞에 서면 우리가 얼마나 구본웅에 대해 무관심했는지 알게 된다.
오늘은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을지로 4가 전철역에서 모였다. 그런데 굉장히 추웠다. 몇 주전에 만났던 심원보 연구원이 자신이 해설하는 12월 7일이 제발 춥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말이 씨가 되었는지 더 추웠다. 아침 기온이 영하 2.4도라 했는데 바람도 부니 체감 온도는 영하 5도도 더 되는 듯하다. 다행히 심원보 연구원이 몸을 녹일 수 있는 핫팩을 가져왔다. 해설도 하는데 참여자들 추울까봐 이런것까지 다 챙겼다. 마지막 날이라 제법 많이 올 줄알았는데 줄줄이 취소다. 12월이 되니 올 해 가기전에 만날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나라가 비상 상황 아닌가. 한가하게 예술기행이나 따라다닐 맘의 여유가 없기도 하겠다. 그러나 강행이다. 어짜피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하지 않았나. 세상사는 돌고 돌아 늘 제자리 걸음이라도 예술의 수명은 길다고 해두자. 그래야 삭막한 인생 비빌 언덕이라도 있지 않겠는가. 데일리아트라는 이름을 짓기 전에 어떻게 이름을 지을까 고민하다가 아트롱(art long)이라 지을까도 생각했었다. 예술은 길다는 뜻이다. 날이 추워도, 시국이 어수선해도 짧은 인생사 다하더라도 예술을 좇는 사람들은 계속 생겨날 터이니 예술의 수명은 인생사 보다 길다.
심원보연구원이 처음으로 데려간 곳은 천일백화점 자리였다. 이 곳에 백화점이 있었나? 그러고 보니 이름은 들어본 것 같다. ‘천일’ 하늘 아래 첫 번째라는 뜻일 것이다. 이곳에서 구본웅의 유작전이 열렸다. 오늘 답사는 거꾸로다. 그의 타계후에 열린 유작전 열린 공간부터. 백화점의 흔적은 없었다. '천일 상사'라는 간판이 백화점이었다는 것을 대변할 뿐이다.
전쟁중에 유명을 달리한 김중현과 이인성, 구본웅의 작품을 전시했다. 김중현은 54세, 구본웅47세, 이인성은 불과 38세였다.할일 많은 천재화가들이 전쟁통에 유명을 달리했다. 얼마나 안타까운가. 더구나 이인성은 경찰과 사소한 시비 끝에 숨을 거두었다. 유작전의 모든 비용은 천일백화점에서 부담했다. 천일화랑은 구본웅의 태평양미술학교 친구 이완석이 백화점 지배인으로 스카웃되어 백화점에 만든 예술 공간이다. 이곳이 우리나라 근대기 별처럼 빛났던 화가들의 유작전이 열린곳이라니.. 구본웅은 전쟁이 한창이던 1953년 종로구 누하동 자택에서 급성페렴으로 사망했다.
장소를 이동해서 걷다보니 바닥에 동판이 새겨져 있다. 동판에는 '고대생 4.18 피습현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4.19 혁명이 일어나기 하루전인 4월18일 고대학생들은 시위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정치깡패들이 덮쳤다. 이 곳이 말로만 듣던 그 현장이라는 말인가. 시대가 어수선해서 그런지 이런것들만 눈에 들어온다. 오늘의 답사 주제가 '허튼 길을 걷다'인데 걷다보니 허튼 길이 아니다.
그는 고려미술원에서 이종우에게 뎃생을 배우고 기독교청년회관(YMCA)에서 김복진에게 조각을 배웠다. 특히 1927년 제6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얼굴습작'으로 조각부문 특선을 차지하기도 했다. 박영래, 김은호 등의 열성으로 경영하던 고려미술원에서 그는 이종우와 같은 서양 화가에게 그림을 배웠다. 갑자기 심원보연구원이 엽서를 꺼내 들었다. 엽서에는 구본웅의 그림과 장소에 대한 일화와 그에 대해서 소개된 글귀 등이 적혀 있었다. 참여자들이 지루하지 않게 심 연구원은 세심하게도 옆서를 20장이나 준비해서 탐방하는 장소마다 참여자들이 글귀를 읽게했다. 엽서를 받을 욕심으로 너도나도 관련 기사와 싯구를 읽었다.
종로를 거쳐 동아일보에 도착했다. 구본웅은 일본 이과전에서 입선후, 1931년 동아일보 옥상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그런데 광화문 앞 광장에도 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다. 이곳에서는 윤석열 탄핵을 반대하는 시위가 열리고 있다. 구본웅이 살았던 해방 이후의 광경은 지금 서울에서 벌어지는 이런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좌우익으로 갈려 서로 죽고 죽이는 관계. 해방을 맞고 한국전쟁을 겪었다. 수 없이 많은 역사의 질곡을 거쳤음에도 나라는 여전히 이념의 틀에 갖혀 있다.
드디어 구본웅이 살았던 생가 근처에 도착했다. 일제시대에는 다옥정이라 불렸던 다동. 구본웅의 집 근처에 이상도, 소설가 박태원도 살았다. 대부호였던 구본웅의 집에 수많은 친구와 예술가들의 모였다고 하니, 1930년대 경성의 문화사가 이곳에서 더 풍부해 졌을 것이다.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지 않은 이곳, 누가 여기에서 그 때를 기억할 것인가. 구본웅 해설을 맡은 심원보 연구원은 정말 많은 자료를 준비해서 참석한 참가자들이 '구본웅 평전'을 써보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드디어 구본웅편을 마치니 겸재 정선에서부터 시작한 길 위의 미술관의 모든 프로젝트가 끝이다. 천경자, 장욱진, 박수근, 나혜석, 김환기, 구본웅까지 왔다. 서울 곳곳에 숨겨진 화가의 발걸음을 찾는 길이 참 즐거웠다. 천경자 탐방길에는 천경자의 차녀 수미타 김교수도 왔었고, 박수근 편에서는 박화백의 장남 박성남 선생과 현장 통화도 연결했다. 길 위의 미술관프로젝트에 참석한 이승염 선생님은 "앞으로 길 위의 미술관 프로젝트가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과 해외에서도 진행되기를 바란다"는 덕담을 했다. 화가의 길을 찾아 나서는 길, 보람있었다. 화가에 대한 아무런 표지가 없었던 많은 역사적 장소에 조그마한 표석이라도 둘 일이다. 우리나라 근대기의 문화를 활짝 열어졌혀, 후대에게 아름다운 예술의 향취를 남긴 사람들, 그들의 발자취만이라도 알리는 운동을 벌여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길 위의 미술관 대장정을 마무리 한다.
함께 해설한 김경수, 한성희, 최은규,박주형, 심원보 연구원들께 감사를 전한다. 멋진 도안으로 프랭카드와 깃발을 만들어준 김정두 연구원, 스텝으로 참여한 선생님, 매번 참석해서 출석과 명찰을 챙겨준 아내에게도 감사를 전한다. 가장 큰 고마움은 함께 길 위에서 동참해 주신 많은 시민들이다. 내년에는 더 보강된 모습으로 만나기를 기대한다.
《길 위의 미술관 : 구본웅 편》을 마치며 < 답사 < 아트체험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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