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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아트 Dec 11. 2024

[길 위의 미술관- 천경자 ③] 꽃과 여인의 화가

여행은 잘 돌아오기 위해서 떠납니다
타히티 / 신문회관 / 베트남

좌)  타히티 고갱미술관에서 ,  1969,  서울시립미술관 /   우)  타히티의 소녀,  1969,  서울시립미술관   

     갑자기 웬 타히티일까요? 1969년 45세의 천경자는 소망하던 파리로 향합니다. 신문회관에서 《도불전》을 열고 유학이라기보다는 긴 여행에 가까운 길을 홀로 떠납니다. 천경자는 미국에 들렀다가 하와이를 거쳐 사모아로, 다시 타히티로 건너갑니다. 곧장 파리로 건너가지 않았어요. 아마 고갱의 자취가 보고 싶었을 겁니다. 싱싱한 원시의 향기가 살아있는 인간의 내면 세계를 표현했던 고갱을요. 고갱은 예술이란 눈에 보이는 세상의 재현이 아니라 상상력과 깊은 사고로 탄생한다고 했습니다. 천경자 자신의 미학과 공통된 부분이 많았지요. 


타히티 고갱박물관에서, 1969. 출처:『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타히티 사람들은 붉은 히비스커스를 귀에 꽂고 인생의 회한, 절망, 굴욕과는 상관없는 해바라기 같아 보였습니다. 비행기 승무원인 야마시다가 머무는 호텔로 옮겨 플루메리아꽃을 머리 가득 장식한 무희들의 춤을 보며 술 한 잔을 합니다. 비를 뿌리는 하늘에 우산을 받치고도 스케치를 하니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답니다. 그때 그린 스케치입니다.



타히티 파페에테-호텔 타하라에서, 1969, 종이에 채색, 34.8×24.2cm

천경자는 왜 그렇게 파리를 소망했을까요? 현재는 세계 미술의 중심지가 미국으로 옮겨갔지만, 그 시절에는 파리가 화가들에게 선망의 지역이었거든요. 한국 미술계는 전쟁 복구 후 1960년을 전후로 세계화를 꿈꿉니다. 그러나 당시 한국 상황으로는 해외 전시나 유학은 꿈꾸기도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파리비엔날레, 상파울로비엔날레, 해외 전시는 언론에서 대서특필 되곤 했습니다. 많은 화가들이 어려움을 뚫고서 세계 중심지로 나가 화업을 이루고자 하였고, 김환기, 이응노, 박서보 등이 이미 진출해 있었습니다. 1969년 45세의 천경자도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여름에 출발해서 1970년 봄까지 8개월이 넘게 타히티, 미국, 이탈리아, 스페인 등을 여행합니다. 파리의 아카데미 고에쓰에서 유화 수업도 몇 개월 정도 받아, 당시 그렸던 유화 누드화가 몇 점 남아있습니다.


귀국하는 비행기에서 하얀 산맥이 무수히 솟은 북극, 백야라 한밤중인데도 산의 그림자가 환한 북극을 내려다보면서 비로소 '썩은 동아줄' 상호와 헤어질 결심을 합니다. 잘 돌아오기 위해서 여행을 떠난다고 합니다. 진정한 자유와 독립을 경험하며 화가 천경자에 집중한 여행은 인생 후반기 천경자를 더욱 성숙되게 합니다.


좌) 1970년 신문회관 ⓒ 이태호/ 우) 현재의 프레스센타 ⓒ김경수《1970년 9월 남태평양 풍물 시리즈 스케치전》 남태평양전으로 신문회관에서 작품들과 함께 관객들을 만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장미 한 송이라도 들고 들어왔다는 천경자의 집 뜰은 꽃향기가 가득합니다. 옥인동에서 파온 라일락이 유난히 꽃이 많이 피어 새로 이사한 서교동 집에도 보라색 구름이 내려앉은 날이었습니다. 좋은 집인지 흉가인지 모를 향기로운 샴푸로 감은 머리 냄새가 온 동네에 풍기던 날이었네요. 그런 날 상호와 크게 싸웠습니다. ‘썩은 동아줄’ 상호는 나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끊기여 나갔습니다. “내 사랑은 끝났다. 상호는 『폭풍의 언덕』의 캐서린이요, 나는 캐서린 아버지가 데려온 집시 고아 히스클리프였다.” 천경자는 인생의 후반은 홀로 고독하게 그림 그리는 삶을 선택합니다.


홍익대학교도 그만두고 작품활동만 집중합니다. 훌륭한 여성 화가들을 키우고도 싶어 화실을 열고 고갱을 기리며 ‘노아노아 화실’이라 이름을 지었네요. 그러나 화실을 운영하기란 쉽지 않아 경제 문제로 곧 문을 닫고 작업에만 전념하였습니다. 이후 천경자의 여인상이 정립되었습니다.


길례 언니, 1973, 종이에 채색,  33.4×29cm.  천경자의 독특한 여인상의 출발점이 되는 작품입니다. 

잠시 베트남으로 떠나보겠습니다. 1972년 베트남전쟁 시기 종군 화가로 20일간 참전합니다. 군용기로 월남 땅에서 투웅투웅 울려 퍼지는 대구경 폿소리가 무섭지는 않았지만 잠 못 이룬 밤들이었답니다. 여행이 좋아서 종군 화가를 지원했다지만 사설 화실과 대학교수도 모두 그만둔 상태에서 새로운 경험과 경제적 문제를 해결할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150호 크기의 두 점의 대작을 모두 국방부에서 사주어 200만원의 큰돈을 받아 경제 사정이 풀리기 시작합니다.


정글 속에서 , 1972,  227 × 162.1cm, 서울미술관

1970년 중반부터 천경자 특유의 여인상이 제작됩니다. <길례 언니>를 필두로 꽃과 여인을 주제로 이국적이고 환상적인 여인상들이 탄생 됩니다. 그렇게 그녀의 작업은 성숙 되어 환상적인 아름다움이 농익어서 보는 이들에게 울림을 전합니다. 원시성이 간직된 아름다운 향기 가득한 작품들은 빛과 채색, 환각, 화려한 슬픔 등 천경자 양식을 설명하는 용어들로 수식되었네요. 화가 이봉상은 ‘동양화의 개척면’에서 앞으로 가장 기대되는 작가라 하였고 혜곡 최순우는 ‘현대와 전통을 배색, 탐구하는 작가’, “그가 체험한 인생의 본질적인 외로움과 슬픔과 황홀함을 모두 신비로운 아름다움으로 되새김질해 화려한 슬픔의 환상을 그렸다.” 평합니다.


황금의 비,   1982,   34×46cm        찬연한 여인은 속된 세상의 여인들이 아닌 듯, 금빛 눈동자를 갖고 우리를 바라봅니다. 

이십대에는 살아내기 위하여 뱀을 그렸던 화가였습니다. 중년의 여성이 되어 그녀의 작품엔 ‘꽃’이 많고 ‘여인’이 많습니다. ‘꽃과 여인을 즐겨 그리는 그’라고 칭찬을 기대했던 천경자의 작품엔 꽃과 여인과 삶의 고독이 화려하게 불어옵니다. 영혼을 울리는 바람이 되어서.


[길 위의 미술관- 천경자 ③] 꽃과 여인의 화가 천경자 < 답사 < 아트체험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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