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에 들어서니 고려청자의 푸른 빛이 전시실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이번 특별전 《푸른 세상을 빚다, 고려 상형청자》는 천 년 전 고려인들이 어떤 세상을 꿈꾸고 사랑했는지 엿볼 수 있는 창이었다.
전시는 <청자 어룡모양 주자>로 시작됐다. 물고기와 용의 형상을 결합한 이 작품은 입체적으로 구현된 조형미와 비색 유약이 만들어내는 생동감이 압도적이었다. 고려인들의 손끝에서 탄생한 살아 있는 예술을 만나는 느낌이었다.
1부 ‘그릇에 형상을 더하여’에서는 삼국시대 신라와 가야의 상형토기와 토우가 먼저 등장했다. 흙으로 빚어진 이 초기 상형작품들은 상형청자의 뿌리를 보여줬다. 고려의 상형청자가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오랜 전통 위에서 완성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2부로 넘어가니 상형청자가 탄생한 배경과 그것을 만들어낸 기술, 그리고 소비된 문화가 흥미롭게 펼쳐졌다. 고려 왕실과 상류층은 개경이라는 국제도시를 통해 다양한 문화를 접했고, 그들은 더 특별하고 완벽한 도자기를 원했다. 상형청자는 그런 욕구를 충족시키며 등장한 작품이었다. 차, 술, 향을 즐기던 문화 속에서 상형청자는 단순히 도구가 아니라 권위와 취향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강진과 부안 가마터에서 출토된 도자기 조각들, 태안과 보령 해역에서 발견된 발굴품들은 그 시대의 제작과 유통 과정을 짐작하게 했다.
2부 전시실을 거닐다가 눈길을 사로잡은 작품이 있었다. 태안 대섬에서 발견된 <청자사자모양향로>. 단번에 시선을 잡아 끈 이 작품은 어디선가 본 듯한 친근함과 독특한 존재감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얼마 전 강화도의 고분군 ‘가릉’을 방문했을 때 봤던 사자 석물이 떠올랐다. 해학적인 표정과 다부진 자세가 묘하게 닮아 있었다. 향로는 이름 그대로 향을 피우는 도구다. 둥근 몸체 위에 사자 모양의 뚜껑이 얹혀 있는데, 실용적인 도구를 넘어 예술품이라 해도 손색 없다. 뚜껑 위의 사자는 웅크린 자세로 앞다리를 세우고 있다. 쫑긋 솟은 귀, 크게 벌린 입, 내민 혀가 인상적인데, 그 모습이 투박하면서도 해맑다. 처음 보면 다소 우스꽝스러울 수 있지만, 보면 볼수록 귀여움이 묻어난다.
이 사자의 표정은 마치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 같다. 태안 대섬의 사자가 던지는 미소는 우연이 아니다. 고려시대 상형청자는 단순한 아름다움에 그치지 않고, 이야기와 감정을 전한다. 이 사자를 바라보고 있으면 당시 고려 사람들도 지금 우리처럼 무언가를 보며 미소 짓고 즐거워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따뜻해졌다.
태안 대섬의 사자향로에서 느낀 해맑은 미소가 채 가시기도 전에 또 하나의 상형청자가 눈에 띄었다. 이번엔 베개다. 하지만 평범한 베개가 아니다. ‘사자모양베개’라니! 이쯤 되면 고려 사람들의 상상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순간, 북송 시대의 베개가 떠올랐다. 중국 북경 자금성의 도자관에서 봤던 북송의 도자기 베개는 어린아이의 형상이 인상적이었다. 이 베개는 단순히 잠을 잘 때 머리를 얹는 도구가 아니라 다산과 자손 번영이라는 깊은 뜻을 담고 있었다. 그래서 아이를 베고 잔다고 생각하면 조금 훈훈해지는 느낌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 전시에 딱 자리 잡은 사자 모양 베개를 보고 있으니 머리가 복잡해진다. 잠자리에서 어린아이를 베고 자는 것과 사자를 베고 자는 것, 둘 중 어느 쪽이 더 나을까? 아이를 베면 다산과 번영이 떠오르겠지만, 사자를 베면 어떨까? 밤새 으르렁대는 꿈을 꾸는 건 아닐까? 아니면 사자의 머리가 좀 딱딱하진 않을까? 어쨌든, 베개 하나로도 이렇게 웃음을 주는 고려 상형청자의 매력은 대단하다. 사자 베개와 어린아이 베개를 번갈아 베고 자던 고려인의 밤은 분명 평화로우면서도 상상력으로 가득했으리라.
3부 ‘생명력 넘치는 형상들’은 전시의 하이라이트였다. 거북, 원숭이, 석류 같은 다양한 동식물을 형상화한 상형청자는 조형적으로 완벽했고, 보는 이의 마음을 빼앗았다.
특히 <청자기린모양향로>와 <청자참외모양주자>는 그 복잡한 형태와 내부 구조가 놀라웠다. 제작 과정에서 흙을 파내고 다시 이어 붙이는 기술은 현대의 3D 프린팅 기법과도 닮아 있어 경외감마저 들었다.
마지막 4부에서는 실용과 예술을 넘어 정신적 세계를 담은 상형청자를 만났다. 불교와 도교적 신앙이 깃든 의례용 도자기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작품들은 사람들의 내면 깊은 곳의 소망과 믿음을 담아냈다.
상형청자는 단순히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신들의 미감으로 창의적으로 변형하고 완성한 결과물이다. 중국 북송대 자기와 나란히 놓인 상형청자들은 고려만의 독창성과 기술력을 더욱 빛나게 했다.
전시를 나서며 마음 한 켠이 따뜻해졌다. 고려의 상형청자는 그저 도자기가 아니라 천 년 전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던 시선과 마음의 기록이었다. 그릇 하나에 깃든 그들의 관찰력과 창의성은 오늘날 우리가 추구해야 할 예술적 태도와 다르지 않다. 푸른 그릇 속에 담긴 그들의 세상을 통해 나도 내 세상을 비춰보는 시간이었다. 전시는 2025년 3월 3일까지다.
푸른 빛으로 빚어낸 고려의 세상, 상형청자를 만나다 < 리뷰 < 미술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
출처 : 데일리아트 Daily Art(https://www.d-ar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