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0년대 조선 말기, 많은 외국인들이 조선 땅을 밟았다. 성경을 들고 온 선교사들, 자국의 잇속을 챙기려는 외교관들, 시장을 개척하러 온 상인들, 여행가들. 목적은 달랐지만 배를 타고 멀리 태평양을 횡단해 제물포(인천)에 내렸다. 그들이 가장 적응하기 힘든 것은 비위생적인 주거 환경이었다. 늦은 밤 배를 타고 제물포에 내린 서양인들은 난감했다. 제물포에서 서울까지는 꼬박 12시간이 걸려, 이른 아침 제물포에서 출발해야 서울의 관문 서대문이나 숭례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당장 인천에서 하룻밤 묵을 장소가 필요했다. 그래서 1888년 이곳에 호텔이 들어섰다.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인 대불호텔(大佛, 다이부츠 호텔)이다. 주인은 일본인 호리 큐타로인데, 풍채가 불상처럼 크다 해서 호텔 이름이 대불이다.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는 '놀랍게도 호텔에서는 일본어가 아닌 영어로 편하게 모셨다'고 비망록에 기록했다.11개 객실은 늘 만원이었다. 객실료는 상등실 2원50전, 일반실 2원으로 비쌌지만 늘 붐볐다.
대불호텔에 묵은 서양인들은 이른 아침 서울로 출발했다. 보통은 가마나 조랑말을 이용했다. 가마는 1시간에 6km를 걸을 정도로 빠르게 이동했다. 한강을 건널 때는 마포나루에서 내려 만리재를 따라 숭례문으로 들어왔다. 김포, 양천을 거쳐 나룻배를 타고 양화진으로 도착한 사람들은 와우산, 노고산을 넘어 대현을 지나, 아현(애오개)을 넘어 서대문으로 들어오거나 아현에서 약현(중림동)을 넘어 숭례문을 통과해 한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1899년 9월 18일 경인선이 개통됐다. 처음에는 제물포에서 노량진까지만 운행했다. 정거장은 제물포역, 유현역, 우각역, 소사역, 오류역, 영등포역. 종착역은 노량진이다. 12시간 걸리던 길이 1시간 40분으로 줄었다. 1900년 7월에는 한강철교가 설치돼 서대문 정거장(서대문역)이 종착역이 됐다. 걸어서 하루 종일 걸리던 길이 수로를 통하면 8시간, 철도 가설 이후에는 2시간이면 서대문 정거장에 도착했다.
이제 제물포에 도착한 서양인들은 굳이 호텔에서 하룻밤 묵을 이유가 없었다. 대불호텔은 문을 닫았다. 건물은 중국인 뢰시 일가에게 넘어가 베이징 요리 전문점 '중화루'로 태어났다. 음식점은 서울에서 경인선을 타고 와서 먹을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경인선으로 인해 문을 닫았던 건물에 그 경인선을 타고 서울에서 온 사람들이 중국 음식을 먹으러 내려온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1960년대에 '청관 거리' 경기가 나빠지자 중국 음식점도 폐업했다. 쓰임새 없는 대불호텔 건물은 월세 주는 집으로 변했다. 결국 건물을 지은 지 90년만인 1978년에 철거되었다. 철거된 지 40년 후 2018년 4월 중국생활사전시관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대불호텔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1관과 1960~1970년대 인천 중구의 생활사를 체험하는 2관으로 꾸며졌다.
경인선 착공으로 대불호텔은 망했지만, 경인선 종착역인 서대문 정거장(서대문역)에는 또 하나의 호텔이 생겼다. 위치는 지금의 이화외고, 농협 일대에 있는 서대문 역 바로 옆이다. 이름도 역 앞이라 ‘스테이션호텔’ 우리말로 하면 ‘역전 호텔’이다. 서대문역은 서대문-청량리 구간의 전차 종점인 경교(서울적십자병원)와도 붙어 있었다. 서대문 밖, 이화외고와 농협, 서울적십자병원 일대가 기차와 전차를 아우르는 교통의 요지였다. 1901년 우리나라를 찾은 미국인 엘리아스 버튼 홈즈가 기차에서 내려 스테이션호텔에 투숙했다.
“이 독특한 도시 서울의 정거장에 막 도착한 기차에서 우리가 내리자, 흰옷을 길게 늘어뜨린 한 젊은이가 카드 하나를 건네주었다. 거기에는 '스테이션호텔 훌륭한 시설, 저렴한 가격, 군대 나팔 소리와는 먼 곳'이라고 적혀 있었다. (중략) 호텔로 따라갔는데 철도역에서는 몇 걸음 떨어지지 않는 거리에 있었다. (중략) 엠벌리 부인의 어머니와 같은 보살핌 덕에 우리가 한국에 머무는 동안 식사와 잠자리 문제는 별걱정 없이 해결되었다.” (이순우, 손탁호텔, 하늘재 50페이지)
역에서 걸어서 2분도 채 걸리지 않는 스테이션호텔은 서양인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마늘 냄새 나는 조선 사람이 아닌 영어를 쓰는 고향 엄마와 같은 여자가 호텔의 주인이었다. 그러나 엠벌리 부인이 처음 오픈한 호텔은 한옥을 개조한 호텔이라서 불편함도 많았다. 마르텡으로 소유가 넘어가며 근사한 서양식 건물로 변했다. 이름도 스테이션호텔에서 ‘애스터 하우스’로 바뀌었다. 이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린 사람에 대한 광고가 대한매일신보 1907년 12월 24일에 실렸다.
“전 한성판윤 배국태씨의 매제 배정자와 일본 유학하여 졸업한 시종무관 박영철 씨가 새문 밖 호텔에서 혼례를 거행하였는데, 예절과 잔치하는 음식을 다 서양법으로 하고 내외국 신사 수백 인을 청하여 대접하였다더라.”
조선의 마타하리, 요화 배정자의 결혼 뉴스이다. 바람둥이로 소문난 배정자의 ‘공인’된 세 번째 남편이 박영철이다. 박영철은 전주 출생으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시류를 읽어 일찍부터 일본어를 배웠다. 부모 몰래 일본에 밀항하여 운 좋게 일본 육사 15기를 졸업했다. 러일전쟁 참전 후 승승장구해 시종무관(황제 경호장교), 함경도지사, 조선 상업은행(우리은행 전신) 두취역(임원)까지 한 인물이다. 본처를 버리고 친구 현영운의 아내인 배정자와 이 호텔에서 호화 결혼식을 했다. 유유상종이다. 세상의 조소 거리가 된 이 결혼 생활은 5년을 넘지 못했지만, 결혼식은 장안의 화제가 되어 신문에까지 실렸다. 수백 명을 초청해 서양 음식을 대접했다고 하니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초호화 결혼식이었다. 배정자의 양아버지가 이토 히로부미이다. 결혼식에 배정자의 양 아버지, 어쩌면 배정자의 정부인지도 모를 이토 히로부미까지 참석했는지도 모른다.
[브랜드의 문화사 ⑪] 왜 서양인들은 대불호텔에서 하루를 묵었을까 < 브랜드의 문화사 < 칼럼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