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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아트 Dec 13. 2024

[일상의 리흘라] 세상을 보는 눈높이의 차이

인간의 신체 장기 중에서 엄마 뱃속에서 나올 때에만 작동하는 것이 있다. 엄마 탯속에서 인간은 물고기다. 산소 호흡기를 단 물고기다. 양수 속에서 10개월을 헤엄치고 있다. 그러다 안정적인 엄마 뱃속을 벗어나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 반드시 작동되어야 하는 것이 있다. 첫울음을 통한 호흡인데 바로 폐(肺 ; Lungs), 허파다.


탯속에서 물로 채워져 있던 허파에서 물을 내보내고 공기를 채워야 한다. 인체 내에 하늘의 공간을 만드는 일이다. 울음을 통해 이 시작을 하지 못하면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래서 아기의 첫울음은 액체의 공간을 기체의 공간으로 바꾸는 순간이다. 인간 존재 모두는, 지구 역사 46억 년의 지난한 과정 중에 생물 진화 역사 40억 년의 시간, 그중에서도 4억 년 전 고생대 데본기 때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던 물고기의 기나긴 역사를 모두 간직한 생명의 현신이다.


인간 한 명 한 명이 모두 지구 생명의 역사를 그대로 재현하여 현재 모습을 간직하고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지구 역사 46억 년의 세월을 넘어서거나 건너뛰지 못한다. 수정란 1개의 세포에서 3조 개의 세포로 분화되면서 인간의 형상을 갖추어 나가고 그 형상을 유지하기 위해 기능해야 하는 모든 장기는 생명 진화의 역사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구표층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시기와 질투와 폭력과 사랑조차 그 다음의 일이다. 인간이 사회화를 통해 만들어 놓은 법과 질서와 윤리와 도덕은 더더욱 그 다다음의 일이다.


더구나 작금에 우리 사회에서 벌어진 황당한 해프닝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똑같이 진화해 왔는데 누구는 저렇게 한심한 눈으로 세상을 볼까? 신기하지 않을 수 없다. 보편적 도덕관과 일반적인 상식과 건강한 육체를 지난 일반인이라면 저 정도로 편협하게 세상을 볼 수 없다. 아니, 보려고 해도 볼 수 없을 것이다.


무엇이 그들을 눈멀고 귀 닫게 했는가? 누가, 무엇이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눈을 찔러 세상을 보는 창을 닫았고 귀를 솜틀로 막아 자기들만의 왕국을 꿈꿨기 때문이다.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자기의 눈과 귀를 막고 닫는다고 안 보이는 것이 아니다. 자기 눈에만 안 보이고 자기 귀에만 안 들릴 뿐이다. 자연은 그들밖에 거친 파도의 바다처럼 장대하게 펼쳐져 있으며 활화산처럼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넓게 보고 멀리 보지 못하는 앉은뱅이의 시선으로 어찌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되겠다고 버티고 있는가? 스스로 깨우치지 못하면 깨우치도록, 알도록 만들어줘야 한다. 힘들지만 그 과정을 거쳐야 우리 사회가 뒤로 가지 않을 것이다.


칼 세이건(Carl Edward Sagan)의 '창백한 푸른 점(The Pale Blue Dot)' 문장을 인용해, 세상을 보는 눈높이의 차이를 보자. 부끄러움에 고개를 어디 둘지 모를 지경이다.


"저 작은 점을 다시 보라. 저곳에 모든 것이 있다. 저것이 우리의 고향이다. 저것이 우리다. 이곳에서 당신이 사랑하는 모든 이들, 당신이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 당신이 들어봤을 모든 사람들, 예전에 있었던 모든 가람들이 그들의 삶을 살았다. 우리의 모든 즐거움과 고통, 확신에 찬 수많은 종교, 이데올로기, 그리고 경제정책, 모든 사냥꾼과 약탈자, 모든 영웅과 겁쟁이, 문명의 모든 창조자와 파괴자, 모든 왕과 농부, 사랑에 빠진 젊은 연인들, 모든 아버지와 어머니, 희망에 찬 아이들, 발명가와 탐험가, 모든 도덕의 스승들, 모든 타락한 정치인들, 모든 슈퍼스타, 모든 최고 지도자, 인간 역사의 모든 성인과 죄인들이 여기 태양의 빛 속에 부유하는 먼지 티끌 위에서 살았다.


지구는 우주라는 광활한 공간에 있는 너무나도 작은 무대다. 승리와 영광이란 이름 아래, 이 작은 점의 극히 일부를 단지 잠깐 동안 차지하려고 했던 역사 속의 수많은 장군과 황제가 흐르게 한 피의 강물을 생각해 보라. 이 작은 픽셀의 한 모서리에 살던 사람들이, 거의 구분할 수 없는 다른 모서리에 살던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던 끝없는 잔혹함을 생각해 보라. 우리의 가식들, 우리 안에 존재하는 자만, 우리가 세상의 어떤 위치를 차지했다고 여기는 망상은 이 작고 희미한 빛에 의해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사는 행성은 우주의 거대한 어둠에 둘러싸인 외로운 점 하나일 뿐이다. 이 광대함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그저 미미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줄 어느 외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는 우리가 아는 한 생명의 안식처가 되는 유일한 세계다. 적어도 가까운 미래까지는 우리 인류가 이주할 수 있는 곳이 다른 어디에도 없다. 좋든 싫든 지금으로선 지구만이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곳이다. 천문학이 인간을 겸손하게 하고 인격을 성장시킨다고 한다. 인간의 어리석은 자만을 우리의 작디작은 세계를 머나먼 곳에서 찍은 이 이미지보다 잘 표현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나에게 있어 이 사진은 우리가 서로에게 더 친절하게 대해야 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한 고향인 이 작고 희미한 점을 보존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각인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 (1457)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 (The Pale Blue Dot by Carl Sagan) - YouTube)


우리는 무엇에 연연하고 있는가? 창백한 푸른 점의 시각으로 지구를 보고, 세상을 보고, 자신을 보는 지도자는 없는가? 차가운 보도 위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야속하다. 자신의 능력이 안 되고 그 자리에 있을 깜냥이 안 되는 줄을 자기 자신만 모르고 있는 한심한 사람이 원망스럽다. 보편적이지도, 상식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못한 관점으로 세상을 재단하는 칼날이 무섭다. 세상의 공기를 같이 마시며 숨 쉬고 있는 이 허파의 움직임이 부담스럽다. 그럼에도 용서하고 부둥켜안아야 하는 가슴이 찢어진다.


모르면 알게 해 줘야 한다. 그래야 그나마 나라가 앞으로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지구 밖으로 끌고 가자. 그래서 뒤돌아 보게 하자.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 얼마나 개인적 욕망에 갇혀 있는지를 보여주자. 시선의 거리를 넓혀줘도 이해를 못 할 테지만 그래도 보여주어야 한다. 보여줘도 창백한 푸른 점을 '술상의 땅콩'으로 생각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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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데일리아트 Daily Art(https://www.d-ar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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