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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아트 Dec 16. 2024

[스크린 밖으로 나온 악녀들⑭]'대니쉬 걸'의 릴리-1

나쁜 그녀들 세상을 매혹하다

실크 스타킹에 발을 밀어 넣으며 부드러운 감촉에 몸을 맡깁니다. 레이스가 달린 속옷을 입고 거울 속의 자신에게 미소를 짓습니다. 모자 밑으로 늘어뜨린 곱슬머리, 우아한 드레스의 곡선이 드러내는 날씬한 허리. 그 매무새의 주인공은 여성이 아닌 남성입니다. 아니, 그를 여성 혹은 남성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요? 염색체의 조합, 생식기의 형태만으로 남녀를 구분하는 일이 과연 타당한 일일까요? 오늘 등장할 악녀는 영화 ‘대니쉬 걸(2016)’의 주인공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그를 ‘악한’이 아닌 ‘악녀’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영화 '대니쉬 걸' 포스터

                             

영화는 덴마크의 아름다운 풍광을 보여주며 시작합니다.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민 풀들이 바람결에 하늘하늘 흔들립니다. 에이나르 베게너(에디 레드메인)는 고향 바일레의 바닷가에 서 있는 나무들의 앙상한 나뭇가지를 섬세한 필치로 그려나갑니다. 그는 제법 이름이 알려진 풍경 화가입니다. 같은 화가로 일하는 아내 게르다(알리시아 비칸데르)와 결혼한 지 6년 된 남편이기도 합니다. 파티에 참석한 그들 부부는 그들의 첫 만남에 대해 사람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수줍어하고 내성적인 성격인 에이나르를 먼저 유혹한 사람은 아내 게르다입니다. ‘꼭 나에게 키스하는 것 같았어.’ 게르다가 그들의 첫 입맞춤을 떠올리며 이야기합니다. 에이나르 안에 숨겨진 여성성과의 만남을 암시하는 대사입니다. 

초상화가인 게르다는 여성 모델이 오지 못하자 남편 에이나르에게 여장을 시켜 그림을 완성합니다. 스타킹과 여성용 슬리퍼에 발을 밀어 넣은 에이나르는 처음 느끼는 매끈한 감촉에 전율합니다. 마침 방문한 부부의 친구이자 무용수인 울라(엠바 허드)가 에이나르에게 백합꽃다발을 안깁니다. 장난스럽게 그를 ‘릴리’라고 호명합니다. 그때부터였을까요? 에이나르 안에 숨겨진 릴리가 깨어난 것은. 내성적인 에이나르가 파티에 가는 것을 꺼리자 게르다는 엉뚱한 발상을 합니다. 바로 에이나르에게 여장을 시켜 파티에 참석하게 하려는 계획입니다. ‘릴리’라는 여성의 가면을 쓰고 다른 사람을 연기하게끔 하는 것입니다. 

에이나르는 립스틱을 칠하고 아이라인을 그려 넣습니다. 가발을 쓰고 가운을 걸친 에이나르를 남성으로 볼 사람은 없습니다. 파티에 참석한 남성들은 그를 흘긋거립니다. 여성으로서 받는 시선은 기묘하고도 낯설지만 불쾌하지만은 않습니다. 에이나르 안에 있던 릴리가 조금씩 에이나르를 잠식합니다. 파티에서 그를 눈여겨보던 헨릭 산달(벤 위쇼)이 그에게 접근합니다. 에이나르는 ‘릴리’로서 그를 따라나섭니다. 갑작스러운 산달의 키스를 받고 릴리는 코피를 흘립니다. 그 장면을 목격한 게르다는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릴리가 흘린 피는 초경을 상징하며 이제 에이나르의 몸에 갇힌 릴리는 탈주를 시작합니다. 

이제까지 릴리로 변신하는 일은 일종의 역할 놀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릴리는 에이나르가 자신을 감출 수 있는 일종의 ‘부캐’였습니다. 이제 ‘부캐’가 ‘본캐’를 압도하기 시작합니다. 에이나르는 게르다에게 말합니다. 산달과 키스한 이는 에이나르가 아닌 릴리였다고. ‘릴리는 실재하지 않아.’ 게르다가 대답합니다. 그러나 에이나르는 자신 속에 있는 릴리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릴리는 게임 속에서 만들어진 환상을 넘어 점점 그 실체를 갖추어 갑니다. 

이런 일이 갑작스럽게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사실 에이나르는 어릴 때부터 자신의 성별 정체성에 관해 의심해왔습니다. 하지만 아직 시간은 1920년대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일탈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현대적인 성(性)정치담론이 성립되기 전이며, 타고난 성(性)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은 환자로 취급되던 시기였습니다. 

에이나르는 릴리로서 산달을 만납니다. 하지만 릴리와 키스하던 산달은 그를 에이나르라고 호명합니다. 에이나르는 가면이 벗겨진 듯한 기분을 느끼며 그에게서 도망칩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사실 산달은 게이이며 남성으로서의 에이나르에게 호감을 느낀 것뿐입니다. 파티에서 출혈한 이후로 에이나르는 한 달에 한 번 지독한 위경련을 겪습니다. 인간의 마음과 몸은 서로 복잡미묘한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릴리의 정체성은 에이나르의 몸에서 달거리를 재현하고 있습니다. 

에이나르와 게르다는 의사를 찾습니다. 의사는 그의 상태를 ‘비정상’으로 규정합니다. 고통스러운 방사선 치료가 가해집니다. 상태를 묻는 의사에게 에이나르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제 안의 릴리가 괴로워하고 있어요.” 한편 릴리를 모델로 한 게르다의 초상화가 주목받기 시작합니다. 게르다와 에이나르는 함께 파리로 향합니다. 에이나르는 점차 자신 안의 남성성을 부정하기 시작합니다. 홍등가에 찾아간 에이나르는 유리 너머로 여성의 관능적인 몸짓을 흉내 냅니다. 그러나 그의 육체는 여성이 아니라 남성의 그것입니다. 점차 에이나르는 자신이 남성의 몸에 갇힌 여성이라 생각하게 됩니다. 릴리가 그의 존재감을 드러낼수록 에이나르의 존재는 희미해져갑니다. 

한편 남편으로서의 에이나르를 잃은 게르다의 심경은 복잡합니다. 릴리를 버리고 에이나르로 돌아와달라고 남편에게 부탁합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아내의 간청에도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일은 존재의 근거를 부정하는 일이니까요. 게르다는 당차고 독립적인 여성입니다. 유명 화가의 부인 역할에 머무르지 않고 화가로 인정받으려 합니다. 그녀는 사랑하는 남편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게르다는 그런 남편의 모습마저 받아들입니다. 게르다가 사랑한 사람은 남편으로서의 에이나르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남편을 잃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그녀는 전인(全人)으로서의 에이나르를 사랑합니다. 에이나르이건 릴리이건 그녀의 사랑을 받는 이는 동일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상대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의리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에이나르와 게르다는 파리에서 여러 의사를 방문합니다. 의사들의 진단은 제각각입니다. 그를 동성애자로 규정하는 의사도 있습니다. 조현병으로 몰려서 구금당할 위기를 겪기도 합니다. 그러나 에이나르는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게르다도 같은 의견입니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가 견고한 벽처럼 확실한 시절이었습니다. 마침내 에이나르와 게르다는 그들을 도와줄 의사를 찾습니다. 독일인 의사 워네크로스 박사는 에이나르와 같은 환자를 겪어본 일이 있습니다. 그는 과학의 힘을 빌려 그를 여성으로 바꿔줄 수 있다고 말합니다. 1차 수술을 통해 남성의 생식기를 제거한 뒤, 2차 수술로 여성의 성기를 만드는 방식이었습니다. 


https://youtu.be/F-8EnPgvLgU


-2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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