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스러운 수술을 거쳐 에이나르는 자신이 혐오하던 남성기를 제거합니다. 덴마크로 돌아온 에이나르는 마음껏 여성의 복장을 하고 거리를 활보합니다. 그림 그리기를 그만두고 백화점에서 화장품 판매직으로 일합니다. 게르다는 그에게 화가로서의 삶을 이어나가라고 권합니다. 릴리가 젠더(gender)로서의 성 역할에만 머무르고 있음에 대한 비판이기도 합니다. “나는 화가가 아니라 여성이 되기를 원해.” 릴리는 대답합니다. “둘 다 할 수 있어.” 게르다는 실제로 여성과 화가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합니다.
하지만 에이나르도 자신의 입장이 있습니다. 비록 기존의 관습적 성 역할에 충실한 방식일지라도 동시대 여성으로서의 겉모습을 우선 획득하고 싶습니다. 릴리는 하루라도 더 빨리 완전한 여성으로 거듭나고 싶습니다. 릴리는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2차 수술을 받으러 독일로 향합니다. 몸을 찢는 날카로운 고통에 릴리는 몸부림칩니다. 이번 수술은 예후가 좋지 않습니다. 많은 출혈과 감염으로 릴리는 서서히 기력을 잃어갑니다.
의식이 돌아온 릴리는 휠체어에 앉은 채, 게르다와 정원으로 나갑니다. “이제 온전히 내가 됐어. 그동안 너무나 과분한 사랑을 받았지. 어젯밤에는 너무나 행복한 꿈을 꿨어. 아기가 된 나를 엄마가 릴리라고 불러줬어.” 이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릴리의 몸이 차갑게 식어 갑니다. 에이나르가 릴리로 거듭나는 순간, 통과의례 같은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에이나르의 오랜 친구 한스와 게르다는 에이나르의 고향 바일레를 찾습니다. 에이나르의 화폭에 담겼던 나무와 바다, 산맥이 화면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릴리가 게르다에게 선물한 스카프가 바람에 날아갑니다. 마치 자유를 찾은 릴리의 영혼처럼 스카프는 바일레의 하늘에서 휘날립니다.
영화 ‘대니쉬 걸’은 세계 최초로 성전환수술을 받은 실존 인물 릴리 엘베(에이나르 베게너)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입니다. 소설가 데이비드 에버쇼프의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합니다. 에이나르 베게너는 1882년 덴마크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내의 모델이 나오지 못하자 여장을 한 채, 아내의 모델이 되었는데, 이때 여자 옷을 입은 자신에게 편안함을 느끼게 되었다고 합니다. 1930년에서 31년까지 총 다섯 번이나 성전환수술을 받았습니다. 다섯 번째 수술에서는 난소와 자궁을 이식받았으나, 거부반응으로 인해 1931년에 사망했습니다. 부인 게르다는 영화에서처럼 그런 남편을 사랑하고 이해했습니다. 남편이 죽은 후에도 릴리 엘벡을 모델로 초상화를 그려 명성을 얻습니다.
영화는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고 황홀한 영상미를 보여줍니다. 몽환적이고도 풍부한 색감이 화면에 일렁입니다. 여성을 연기한 에디 레드메인의 몸짓과 표정은 실제 여성보다 더 ‘여성스럽습니다.’ 자신의 성별 정체성과 다른 몸 안에 갇힌 영혼을 소유한 아픔을 지닌 캐릭터를 섬세하게 연기합니다. 영화에서 눈여겨볼 캐릭터는 적극적이고 자유로운 여성 게르다입니다. 그녀는 당대의 여성에 대한 통념을 거부합니다. 남편을 잃어감에 괴로워하면서도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주는 담대하고 강한 여성이기도 합니다.
영화는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아가는 구도자로서의 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세계 최초로 주어진 성별을 바꾸러 차가운 수술대에 누웠던 에이나르는 얼마나 큰 용기를 내야 했을까요? 그러면서까지 진정한 자신으로 살아가려던 그의 마음은 얼마나 절절하고 진정한 것이었을까요? 첫 성전환수술 이후 백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습니다. 에이나르처럼 성별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사람들은 발달한 의학 기술 덕분에 비교적 손쉽게 성별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여전히 에이나르처럼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혐오에 시달립니다.
섹스와 젠더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일은 자칫 본질주의로 흐르기 쉽습니다. 일부 급진적(근본적) 페미니즘은 트랜스젠더를 여성의 범주에서 배제합니다. 그러나 생물학적 성(sex)은 사람들의 생각처럼 그렇게 엄격하게 구분되는 개념일까요? 생물학적으로 남성과 여성을 규정하는 기준은 그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염색체에 이상이 있는 많은 사람이 남성과 여성의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때로는 남성과 여성의 생식기를 동시에 지니고 태어나기도 합니다. 이들을 남성, 혹은 여성으로 간단히 구별할 수 있을까요? 해부학적 구조로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문제가 있습니다. 병이나 사고로 자궁을 적출하거나 고환이나 음경을 상실한 이들은 어느 범주로 구별해야 할까요?
젠더가 아닌 생물학적 성에도 이토록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합니다. 여성과 남성이라는 간극에는 수많은 정체성을 지닌 많은 사람이 존재합니다. 릴리 엘벡처럼 타고난 자신의 생물학적 성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람도 있는 법입니다. 영화가 끝나며 내레이션이 자막으로 흐릅니다. 릴리 엘벡은 현재에도 트랜스젠더 운동의 귀감이 되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릴리 엘벡은 최초로 자신의 타고난 성을 바꾸는데 도전한 악녀이자,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아 모험을 떠난 용감한 한 명의 인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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