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막힌 요즘이다. 분노로, 국민이 모였다. 한 인간의 잘못된 판단이 시대를 거슬러 총칼을 국민에게 돌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의 밤은 화려하게 물들어 간다.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찬란한 국민의 저항은 예술로 피어난다.
저항의 예술로 한국미술사 첫 장에 놓일 작품은 민중미술 <한열이를 살려내라!>(1986)이다. 약 40년 전 한국미술사에 한 획을 그어, 우리 사회를 진일보 하게 한 화가 최병수의 작품이다.
최병수는 1960년 평택에서 태어나 1974년 한광산업전수중학교 2학년을 중퇴한 소년이었다. 20대 중반까지 선반 보조공, 용접공, 보일러 수리공, 목수 등의 일을 해 왔다. 1986년 어릴 적 친구인 김환영의 부탁으로 신촌벽화팀의 정릉 벽화 <상생도>를 그릴 때 쓸 사다리를 만들어 주러 가게 된다. 최병수는 사다리를 후딱 만들고 남는 시간을 이용해 꽃 그리는 일을 도왔다.
그 순간 경찰이 들이닥쳐 현장에 있던 작가들과 최병수를 연행했다. 최병수는 “나는 목수요”라고 항변했으나 경찰은 그를 윽박지르며 심문조서에 ‘화가’라고 적어 넣었다. 졸지에 ‘국가 공인 화가'가 돼 버린 최병수는 ‘남과 북이 서로 잘 살자’는 취지로 그려진 <상생도>가 왜 불온한 것이며, 그것을 그린 화가는 왜 ‘빨갱이’가 되어야 하며, 목수인 자신이 왜 화가가 되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국가가 그를 목수에서 ‘불온한 화가’로 바꿔 놓자, 그는 한동안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심한 혼란을 겪어야 했다. 경찰에 연행되어 국가 공인 ‘제1호 관제 화가’가 되는 과정을 통해 한국 사회의 모순을 온몸으로 체험한 것이다.
미술은 시공간의 미적 환기, 혹은 새로운 소통과 담론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 사건은 국가의 전체주의 이념에 의해 미술을 왜곡시키고 사람의 정신까지 억압했다. 그 일을 겪은 후 최병수는 오히려 1987년 ‘민미협’ 벽화 분과에 가입하고 본격적인 현장 미술가로 붓을 들었다. 그해 6월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걸개그림의 탄생은 ‘정신의 억압’에 맞서는 당당한 자아의 결의이기도 했다. 그는 <장산곶 매>(1981), <반전 반핵도>(1988), <노동해방도>(1989), <백두산>(1989) 등 수 많은 걸개그림을 제작하였다.
최병수는 노동자 출신의 전업 화가로, 1980년대 문화예술운동의 분위기가 소강된 이후에도 전남 여수 등에서 예술환경생태 운동을 지속하고 있다.
“우리가 숨 쉬고 있는 세상이 얼마든지 목수를 화가로 둔갑시키고, 빨갱이로도 뒤집어 씌울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싸워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무기로 미술을 선택했어요.” 최병수의 말처럼 12월 3일의 계엄령은 선한 민중을 순식간에 국가 위협 세력으로 뒤바뀔 수도 있음을 보여준 사태였다.
최병수는 목수의 기술로 현실의 미학을 힘 있게 펼쳐 1980년대 한국미술사에 굵은 획을 긋고 한국 사회의 민주화를 선봉에서 이끌었다. 태어날 때부터 자유민주주의가 당연했던 20~30대 들은 2024년 절대 꺼지지 않을 열정적이고 아름다운 ‘엘이디(LED) 검’을 무기로 민주주의를 지켜내고 있다. 엘이디검을 들기 전에는 촛불을 들었고, 이들의 부모 세대들은 붓을 들어 저항을 기록했다. 저항의 역사는 도구만 바뀔 뿐 게속 이어지고 있다.
[저항하는 예술 ⑧] '한열이를 살려내라' 최병수 화가 이야기 < 미술일반 < 미술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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