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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아트 Dec 17. 2024

94세 한인현의《어느 늙은 바보 화가의 꿈》전시회 리뷰

한인현 화백, 어느 늙은 바보 화가 이야기

"여기, 하루도 거르지 않고 데생을 하며 화가의 기본기를 잃지 않으려 했었던 나의 흔적들, 스케치를 바칩니다." (한인현 『화가 한인현의 행복한 그림일기 꿈』 중에서)

한인현 화백의 《어느 늙은 바보 화가의 꿈, A dream of an old innocent painter》 전시회가 11월 24일 갤러리 피카고스 (Gallery PIKAGOS)에서 종료되었다.

한인현 화백


그림 한 장이 제 곁을 떠나면 마음이 안쓰러워 늘 걱정됩니다. 그래서 그림을 팔지 않습니다. 누군가에게 입양을 보내듯이, 아름다운 사람을 보면 큰맘 먹고 건네줄지언정 그림을 팔지는 않습니다. 돈을 받고 판 그림들을 생각하면 자식을 팔아 치운 것 같아 두고두고 가슴이 미어집니다. 제대로 된 화가의 길을 저버린 것 같아 잠을 설칠 때도 많습니다. 그림만큼은 지금보다 더 열심히 그릴 테니 그림을 내다 팔아야 먹고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세상이 되기만 한다면 나는 기꺼이 내 그림과 함께 숨쉬며 영원히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세상이 되기만 한다면 나는 산골 마을에 집을 한 채 짓고 마당에 내 그림들을 모두 내놓아 새도 구경하고, 다람쥐도 구경하고, 지나가는 바람도 구경하는 그림 세상을 만들고 싶습니다.

1960년 4·19 화재로 9백 80여 점의 작품이 소실되고, 1965년 물난리로 다시 5년 간 그린 작품 80여 점을 모두 잃은 기억은 화백이 작품에 애착을 넘어 집착을 갖게 하였다.

22년 만에 열린 이번 전시에는 한인현 화백의 오랜 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갤러리에서는 이례적으로 전시 기간 내내 오전 10시부터 저녁 7시까지 관람 예약을 받아야만 했다. 갤러리 피카고스가 예약제이고 번화가에 위치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포스터를 보고 이끌리듯 들어온 사람들이 줄을 잇는 이색 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그중에는 한인현 화백의 필력에 감탄하는 화가들이 유독 많았다.

함경남도 흥상읍 출신으로 해주예술학교를 졸업한 한인현 화백은, 장남을 살리고자 했던 부모님의 뜻으로 남쪽으로 피난 온 끝에 혈혈단신 혼자가 되었다. 한인현 화백의 작품에서 시대를 관통하는 주제는 '기다림'이다. 이미 커다란 손을 가진 어른이지만 저 먼 곳을 바라보며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그림 속 소년은 화백의 가슴속 깊이 자리잡아 있는 그 자신의 모습이다.

긴 팔로 아이를 꼭 안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 합장한 두 손을 얼굴에 꼭 붙이고 기도하는 어머니의 간절한 눈시울은 그가 전하고자 하지만 우리 모두가 이미 가슴속에 안고 있는 따스함이자 그리움이다.

화백이 작품에 올곧이 담아온 두 번째 주제는 '민족애'이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광복과 6·25, 민주 항쟁, 코로나 기간 등을 모두 살아낸 그는, 백 년에 가까운 우리 민족의 아픔을 한 점 한 점 작품으로 남기고 있다.

6·25에 참전 지원하면서 함경도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했던 화백은 그때의 트라우마가 작품 곳곳에서 보여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화가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면서  매일 일간지를 정독하고, 스크랩하고, 메모를 남기기도 했던 화가 한인현. 화백이 남긴 그림들은 세상을 향한 그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자 우리 역사의 증거이다.

1931년생인 한인현 화백의 그림은 1920년대 프랑스에서 시작된 초현실주의 사조를 비켜가고 있지 않다. 특히, 그의 풍경화는 구상화 형식을 띠고 있지만, 사람이나 나무나 산의 형상을 한다. 스케치에서도 새가 사람의 다리를 갖고 나뭇잎이 구름으로 그려지거나 하는 초현실적 성향을 보이고 있다. 운명은 이 진실된 화가의 오랜 소망을 지켜보고 있었을까.

도미니크 샤를 얀센(Dominique-Charles Janssens) 고흐문화재단 이사장과 함께한 한인현 화백


고흐가 마지막을 보냈던 프랑스 오베르 쉬즈 우와즈에 있는 고흐미술관 한켠에는, 고흐에게 반한 12살 소년 한인현이  화가가 되어 그린 스케치들과 화구들, 도자기와 종이에 그린 고흐의 자화상, 그리고 『바보 화가 한인현 이야기』가 전시되어 있다. 2019년에는 도미니크 샤를 얀센(Dominique-Charles Janssens) 고흐문화재단 이사장이 직접 화백의 집을 방문하여 고흐의 방 열쇠를 하나 더 헌정하기도 했다. 투병을 시작한 2023년 여름 이전까지, 평생 딱딱한 책 2개를 테이핑한 베개를 베고 두세 시간 남짓 자면서 그려냈던 작품의 가치를 매길 수 있을까.

오직 부단한 붓질만으로 감동을 주는 그는 얼마나 매진했던 걸까. 명예와 화려함을 미루고 스스로를 고립시키면서 꾹꾹 눌러 담아낸 우리 시대의 아픔과 그리움, 행복은 매료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재능 있는 화가가 95세가 되도록 자신의 전부를 걸어 그림을 그린다면 무엇을 이루게 되는지를, 한인현 화백의 그림은 분명하게 말해 주고 있다.

"화가이되, 이 땅의 이름난 화가들 삶과는 전혀 딴판인 삶을 살아오는 동안 가난과 설움을 불편해하지 않고, 이제껏 화가 노릇을 하게 해준 아내와 두 딸에게도 이 책을 바칩니다. 가족의 사랑과 이해가 없었다면 가난한 화가의 길인들 어찌 걸어올 수 있었을까요." (한인현 『화가 한인현의 행복한 그림일기 꿈』 중에서)

아내와 가족, 그리고 사람에 대한 사랑.  온갖 시련 속에서도 평생 지켜냈던 정직하고 곧은 그의 발걸음이 묵직한 울림을 주는 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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