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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아트 Dec 16. 2024

[詩 다시 읽기] 19살이 쓴 애절한 사랑 시 황동규

"실패를 견디며, 사랑의 본질에 다가가는 시적 주체가 맛본 ‘진정한 사랑’의 달콤함은 이토록 즐거운 것이다."


즐거운 편지



                                                                                     1.


나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황동규 시인.



이토록 무모한 사랑 


「즐거운 편지」 제목에서 2가지 의문이 든다. 하나는 ‘시적 주체의 상황이 즐거운 상황인가?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것이 ‘누구에게 보내는 편지인가?’ 하는 것이다. 물론 1연의 상황만을 살펴보면「즐거운 편지」라는 제목은 단순히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는” 시적 주체가 “그대”에게 보내는 설렘이 담긴 즐거운 편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2연을 보자. 시적 주체는 갑자기 돌변하여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라는 자조적인 고백으로 나아간다. 만약 이것이 진정 ‘즐거운 편지’가 되려면, 그대와의 사랑에 성공하는 결말이어야 하지 않을까? 사랑을 말하는 시인들은 항상 이렇다. 이제껏 논의 되어온, 통상 받아들여지고 있는 사랑을 의도적으로 무너뜨린다. 그렇다면 황동규가 이 시를 통해 진정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시적 주체는 매일 그대를 생각한다. 이는 매일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일상적이고, 사소한 일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대는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인다” 이제 시적 주체는 생각에서 벗어나 실제로 그대를 “불러본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아무런 성과도 없다. 그대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시적 주체는 이런 일련의 과정이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하듯이 반복될 것을 알고 있다. 마치 나희덕의「푸른 밤」한 구절인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가는 무한한 여정처럼. 시적 주체는 그대에게로 향하는 여정에 실패할 것임을 알면서도 다시 그대에게로 향한다.


시적 주체는 그대에게 다가서지 못한 ‘사랑의 실패’를 동력 삼아 그대를 다시 “불러본다.” 이 불러봄의 끝에는 다시, 응답하지 않는 그대가 있다. 그리고 또 다시 “사소함”으로 그대를 생각한다. 사실,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은 사소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중대한 일이다. 그러나 시적 주체는 이를 “사소하게” 받아들인다. 이는 그대에게로 다가서는 여정에서 마주하게 될 무수한 치욕의 두뢰박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선택한 시적 주체의 의연한 태도를 보여준다. 시적 주체는 이 무모함을 “믿는다.” 황동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토록 무모한 사랑이다. 시를 다시 읽어보라. 이 무모함이 헛되지 않은 것은 시적 주체가 무모함을 의도적으로 ‘선택’하고 있다는 것에 있다.


이 무모한 여정의 대상인 “그대”는 결국 사랑 그 자체로 확장된다. 김병익 문학 평론가는 황동규의 시적 세계를 평하며 “그는 사랑을 사랑하면서 사랑의 종말을 사랑하고 그 사랑들의 무모함을 다시 사랑한다. 그는 기다리면서 그 기다림이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고 그 기다림에 대한 처절한 열망을 몸으로 깨닫고 있다.”라고 쓴다. 그러니까 이 즐거운 편지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시적 주체의 운명이 곧 사랑임을, 그럼에도 대상에게 다가가려는 몸부림이 사랑의 방법임을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이 편지는 “그대”를 넘어 미래의 ‘시적 주체’에게 향한다. 유독 시에 자주 등장하는 “믿는다”라는 표현은 시적 주체가 자신의 무모한 사랑을 굳게 믿고 있음을 설명한다. 그는 이런 믿음을 담아 자신에게 편지를 쓴다. 반복되는 실패에 사랑의 동력을 잃어버렸을 때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도록. 이 편지가 즐거운 편지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실패를 견디며, 사랑의 본질에 다가가는 시적 주체가 맛본 ‘진정한 사랑’의 달콤함은 이토록 즐거운 것이다.


[詩 다시 읽기] 19살이 쓴 애절한 사랑 시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 < 문화일반 < 문화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
출처 : 데일리아트 Daily Art(https://www.d-ar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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