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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의 문화사 ⑫] 손탁호텔, 조선호텔, 반도호텔

by 데일리아트

이토 히로부미는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빼앗은 을사늑약의 원흉이다. 그가 일본의 대표로서 고종과 담판을 짓기 위해 조선에 와서 묵은 곳이 '손탁호텔'이다. 손탁호텔은 손탁(Sontag,1854∼1925)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그녀는 1885년 10월에 부임한 초대 주한 러시아 공사 웨베르의 처형으로 알려졌다. 웨베르와 함께 조선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활약은 대단했다.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등 각국어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어도 재빨리 습득한 수완 좋은 여자이다.


손탁은 궁내부에서 외국인 접대 업무를 담당하면서 고종황제 및 명성황후와 친밀하게 되었고 당시로서 복잡하게 꼬인 국제 관계를 조선의 입장에서 능숙하게 해결해 주었다. 그래서 고종은 1895년 서울 정동 29번지 소재 1,184평 대지의 한옥 한 채(현 이화여자고등학교)를 하사하였다.

2161_5316_5859.png 손탁호텔 /출처: 민속박물관


손탁은 이 집의 실내장식을 서구풍으로 꾸며서 외국 손님을 맞이했다. 그러나 방이 모자랐다.객실 5개는 너무 협소했다. 정부도 외국 귀빈들의 방한이 빈번해짐에 따라 영빈관이 필요하여 2층 양관을 신축하여 손탁으로 하여금 영빈관을 경영하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손탁호텔’이다. 호텔 2층은 국빈 객실, 아래층은 일반 객실, 식당, 커피숍으로 이용했다. 손탁호텔의 자리는 현재 이화여고 프라이 홀 자리인데 1975년 소실되어 공터로 남아 있다.


이토 히로부미는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에게 총탄 세례를 받고 죽었다. 그러고 보니 안중근과 박정희 전 대통령, 박치기 왕 김일의 타계일이 모두 같은 10월 26일이다. 1929년, 이토 히로부미가 죽은 뒤 20주년에 그를 현창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동상을 세우려고 하다가 한일병합의 원흉 동상을 세우면 조선인들에게 반감이 있을 것을 우려해서 남산 한 자락을 헐고 원찰을 세우기로 했다. 원찰의 이름은 박문사(博文寺), 한자 이름 이등박문(伊藤博文)에서 딴 것이다.


남산에 있던 조선신궁을 설계한 이토 쥬타가 만들었다. 본당만 신축했고 나머지는 모두 문화재를 뜯어다가 꾸몄다. 경복궁의 선원전을 뜯어 왔다. 광화문의 석재를 헐어 담을 둘렀다. 정문은 경희궁의 흥화문을 떼어 와서 춘무산 경춘문(春畝山 慶春門)이라 했다. 춘무는 이토 히로부미의 호이다. 조선호텔 자리에 있던 환구단의 부속 석고각을 박문사 종각으로 사용했다. 1988년 경희궁이 복원되기까지 흥화문을 정문으로 사용했다. 신라호텔의 정문과 경희궁의 정문 모양이 같은 이유이다. 경희궁 복원할 때 신라호텔의 정문을 다시 제자리로 가져왔고, 신라호텔의 정문은 흥화문의 모형이다.


1910년 나라가 망했다. 일본이 국정을 수행한 지 5년 후, 일본은 조선시대보다 국정이 잘 운영된다는 것을 알려야 했다. '시정5주년 조선물산공진회'라는 이름으로 왕이 살던 경복궁에서 커다란 행사가 시작되었다.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1일까지 장장 51일이었다. 경복궁의 대부분 전각이 훼손되었다. 자그만치 7만 2천평 부지였다. 전각이 철거되고 전시동 6곳이 건설되어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을 동원했다. 총 관람수 116만 명이었다. 전 국민이 2천만도 안 될 때 백 만명이 넘는 인원이 서울로 몰려 왔다.


일본 병합 이전에 놓여진 경부선을 타고 전국 각지에서 온 사람들은 묵을 장소가 필요했다. 그래서 부랴부랴 호텔을 지었다. 지금의 환구단 자리이다. 1897년 10월 고종이 선포한 대한제국의 상징이었던 환구단은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자 필요 없는 건물이 되었다. 1914년 그 자리에 있던 환구단을 헐고 호텔을 지었다. '조선철도호텔'이다.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관할한 이 호텔은 당시 최고의 호텔이었다. 이 호텔은 해방 후 미군정사령부로 쓰이기도 했다. 미국에서 귀국한 이승만이 돈암장에 거처를 마련하기 전 투숙하기도 했다. 6·25 전쟁 때는 북한군에게 넘어갔다가 서울이 수복된 후 미군의 휴양지로 쓰였다. 지금 소공동에 있는 '웨스틴 조선호텔'이다. 지금 조선호텔 옆에는 환구단의 부속 건물인 '황우'만 남아 있다.

2161_5317_5944.png 조선호텔과 황궁우


수풍수력발전소를 건립하고 함흥에서 기반을 닦아 돈을 번 일본 재계 서열 10위, '사업왕' 노구치 시타가우(1873~1944)가 조선 최고의 호텔 조선호텔에 작업복 차림으로 들어갔다. 안내 데스크에서 난리가 났다. '당신 같은 사람은 이런 호텔에 들어올 수 없다'는 냉대를 받았다.


이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아 반도호텔이 생겼다. 장안에서 가장 큰 9층 건물이었다. 처음에는 '신 조선호텔'로 이름을 붙이려 했다. '조선호텔'의 반대가 심했다. '그러면 우리 조선호텔은 '구 조선호텔'이라는 것이냐?' 결국 이름을 '반도호텔'로 했다. 왜 이름이 '반도'일까? 일본은 본국을 '내지'라 불렀고, 조선을 대륙 끝에 붙어있는 반도(peninsula)라 했다. 반도호텔은 한반도 조선에서 최고의 호텔이라는 뜻이다. 조선호텔에서 반도호텔을 가로지르는 '반도조선아케이드'가 1977년까지 명동에 있었다. 반도호텔은 6·25 전쟁 이후에 초토화되었지만, 다시 복구를 해서 전쟁 이후에는 외국인 전용호텔로 쓰였다.

2161_5318_026.png 반도호텔 전경


이 호텔에는 한국 주재 상사원이나 문정관 부인들이 주로 묵었다. 1956년 이 호텔 커피숍 한 켠에 이승만 대통령의 영부인 프란체스카의 협조로 반도호텔 상설미술전시장이 열리고, 이를 아시아재단이 인계하여 1958년 '반도화랑'이 개설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상업화랑이다. 넓지 않은 벽면 사정으로 6평 반 크기의 ㄴ자형 구조 화랑에 10호 미만의 동서양화 30~40점 정도 걸 수 있는 공간이었다.

2161_5319_11.png 반도화랑 전시 전경


이 화랑을 이용한 화가가 있다. 우리나라 국민화가, 서민화가로 부르는 박수근이다. 반도화랑은 박수근에게 유일한 그림 판매처이자 생계의 근원이었다. 나중에 반도화랑의 관장이 된 화가 이대원은 "박 형(박수근)은 주로 3~4호의 크기가 많았고, 그 당시 2~3만원으로 많은 소품이 소화되었으며 내 기억으로 박 형은 그 당시 작품만을 가지고 생활하는 몇 안 되는 화가 중의 한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박수근은 4시쯤이면 그가 살고 있는 창신동 집에서 전차를 타고 명동으로 나왔다. 화랑에서 자신의 그림이 몇 점이나 팔렸는지를 확인하고, 국내에서 드물게 양변기가 설치된 이곳에서 볼 일을 보았으며, 저녁에는 명동에서 만난 예술인들과 한잔하고 헤어지기도 했다. 황금찬 시인은 「문단사」에서 박수근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어느 날 그는 내게 다음과 같은 말을 영문도 없이 하는 것이다. '황 선생, 내가 죽고 나면 내 그림이 어떻게 될까? 단 한 점이라도 누가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면 어느 날의 낙엽같이 그렇게 쓸려가고 말까?'하는 것이었다." 그의 생각은 기우가 되었다. 우리나라 호당 그림 가격으로 가장 높은 금액을 갱신하는 화가가 바로 박수근이다. 그의 <빨래터>는 2007년 45억 2천만원에 낙찰되었다.


지금 롯데호텔에 가면 반도호텔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얼마 전까지 롯데호텔에 페닌슐라라는 커피숍이 있었을 뿐이다. 대불호텔에서 반도호텔까지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그 이후는 우리가 아는 대로이다. 반도호텔을 헐고 롯데가 들어섰고, 워커힐은 SK의 차지가 되었다. 역사는 쉴 틈 없이 돌아갔다. 그에 따라 많은 호텔이 지어지고 없어지며 역사 속에서 명멸했다. 호텔에서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묵었지만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는 것이 없다. 이것이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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