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작가 고영애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미술 작품보다 아름다운 현대미술관 60곳을 프레임에 담아 소개한다. 뉴욕현대미술관부터 게티센터, 바이에러미술관, 인젤홈브로이히미술관 등 현대 건축의 정수를 보여주는, 12개국 27개 도시에서 찾은 미술관들을 생생한 사진과 맛깔스런 건축 이야기로 안내한다.
베를린 중앙역에서 내려 10여 분 정도 걸어가면 길가에 함부르거 반호프 표시판이 나오고, 모퉁이를 돌면 소박한 정원 앞에 신고전주의 양식의 옛 기차역 건물이 서 있다. 19세기에 지어진 오래된 역사(驛舍)를 개조한 이 미술관은 현대미술의 근원지이며 베를린의 명소다.
오래전 ‘베를린에 햄버거 역은 없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함부르거 반호프를 영어 발음대로 읽어 ‘햄버거 역’이라 한 에피소드에서 나온 우스꽝스런 글이었다. 함부르거 반호프는 함부르크 사람을 뜻하는 함부르거와 기차역을 뜻하는 반호프의 합성어로, 함부르크에서 베를린을 오가는 기차역이었다.
1884년 기차역은 문을 닫고 1906년까지 건축과 교통박물관으로 사용되었다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역의 일부분이 파괴되어 40여 년 동안 폐허로 방치되었다. 그 후 독일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건축가인 요제프 파울 클라이휴즈에 의해 오랜 기간에 걸쳐 리모델링되어, 원래 기차역의 거의 두 배 크기로 확장하여 1996년 현대미술관으로 새롭게 개관하였다. 요제프 파울 클라이휴즈는 시카고 현대미술관의 동쪽 윙을 설계하여 미국에도 알려진 건축가다.
함부르거 반호프는 옛 역사 건물의 외관과 기차역을 연상시키는 내부 천장의 구조물은 그대로 보존하였고, 높은 천정의 대합실과 긴 기차역 플랫폼에 해당하는 넓은 공간만을 전시 공간으로 개조하였다. 이 미술관의 특징으로는 1960년대 이후의 작품만을 전문 소장하고 있으며, 매 시즌마다 실험적인 현대미술 기획전이 개최된다.
주요 컬렉션으로는 1968년 이후 작품 위주로 앤디 워홀, 사이 톰블리, 로버트 라우젠버그, 로이 리히텐슈타인, 안젤름 키퍼, 조셉 보이스, 로버트 라이먼, 존 케이지 등의 세계적인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들로 구성된 에리히 막스 컬렉션이 있고, 1980년대 150여 명의 작가들로 구성된 2000여 점의 현대미술 작품들이 주류를 이룬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 프릭 컬렉션이 있다.
상설 전시관에 전시된 독일 현대미술에 획을 그은 개념미술가 조셉 보이스 전시는 연대별로 다양한 작품들을 보여주었다. 조셉 보이스는 ‘지방덩어리는 생명을 주는 에너지를 상징하고, 펠트는 에너지를 보존하는 따뜻함을 상징한다’고 하였다. 그 의미를 알고 작품을 대하니 조셉 보이스의 펠트와 지방덩어리를 소재로 한 설치 작품들에게 더욱 매료되었다.
미국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의 작품도 이제는 진부한 작품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워홀의 모택동 초상화 뒤에 비스듬히 설치한 가벽에 의해 상업회화 개념을 부각시켜주는 전시 기획은 전방위 미술관다운 태도였다.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 프릭은 세계적인 현대미술 컬렉터로 잘 알려져 있고, 그의 소장품 프릭 컬렉션은 세계 주요 미술관 전시에 자주 초대되고 있다. 마침 방문했을 때 프릭 컬렉션을 한정된 기간 동안 무상 대여 전시를 열고 있었다. 현대회화를 비롯해 조각, 사진, 영상뿐만 아니라 실험적이며 난해한 현대미술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상설 전시된 안젤름 키퍼의 대작들은 옛 역사의 뼈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공간과 절묘하게 어우러져 마치 그 공간이야말로 키퍼의 작품들을 위해 꾸며진 전시 공간처럼 느껴졌다. 통로에 설치된 댄 플래빈의 작품 <빛>은 네오 클래식한 옛 복도 공간과 조화를 이루어 신비로운 공간을 창출했다.
매 시즌 기획되는 이번 특별 전시를 관람하던 중 매우 인상적인 작품이 있었다. 연기로 가득 찬 새까만 전시장은 오로지 조형적 형태로 드러난 무형의 빛 조각만 시시각각 변하여 빛의 발광만 존재할 뿐이었다. 이 독특한 전시의 구조적 원리는 솔리드 라이트(solid light)라는 선명한 라인으로 형성된 원뿔 형태나 원형 형태의 조형만 어두움 속에서 발광하여 극적 효과를 노렸다. 어둠에 싸인 전시장은 강렬한 빛에 의해 서서히 밝아졌고, 어둠을 가로지르는 빛과 이 빛에 의해 형성된 조형적 형태로 인해 신비로운 공간으로 극대화되었다. 그 공간에서 관람자는 참여자가 되어, 작품과 더불어 전혀 예상치 못한 독특한 체험을 하게 된다.
마침 전시장에서 한 사진작가가 솔리드 라이트에 의해 투사된 빛 조각 사이로 모델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그 모델은 전시장 바닥에 투사된 둥근 원형의 빛 조각 사이에 누운 채 현란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그 발상이 몹시 흥미로워 한동안 머물렀다.
앤서니 맥콜(Anthony McCall)의 16미터 필름으로 된 <순수한 조각 5분(Five Minutes of Pure Sculpture)>이란 작품이 있다. 이 조각은 빛의 투사로 라인이 형성된 공간 속으로 관객을 참여하게 하여 새롭고 흥미로운 상황이 발생되어 또 다른 이미지 공간 속으로 전복시켰다. 앤서니 맥콜은 영국 태생의 뉴욕에 기반을 둔 작가로 1970년대 영국 아방가르드 영화의 핵심 인물이었다. ‘실체가 있는 빛’을 소재로 한 일련의 작업들은 휘트니 미술관을 비롯해 스톡홀름 현대미술관, 영국 서펜타인 갤러리 등에서 전시하였고, 우리나라에서는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 ‘다 원예술프로젝트 01-무잔향’에서 <원뿔을 그리는 선(Line Describing A Cone)>과 안양 공공예술프로젝트에서 <얼굴에서 얼굴(Face to Face)>을 선보였다.
고 영 애
오랫동안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미술관을 촬영하고 글을 써온 고영애 작가는 서울여대 국문학과와 홍익대 대학원 사진디자인과를 졸업했다. 한국미술관, 토탈미술관 등에서 초대 전시회를 열었고 호주 아트페어, 홍콩 아트페어, 한국화랑 아트페어 등에 초대받아 큰 호응을 얻었다. 한국미술관에서 발행하는 월간지에 글과 사진을 실었던 것이 계기가 되어, 이후 잡지에 건축 여행기를 썼다.
이 연재물은 그의 책 <내가 사랑한 세계 현대미술관 60>(헤이북스) 중에서 <데일리아트> 창간을 기념하여 특별히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미술 작품보다 아름다운 현대미술관을 골라서 내용을 요약하여 소개한다. 그가 15년 넘도록 전 세계 각지에 있는 현대미술관들을 직접 찾아가 사진을 찍고 기록한 ‘현대미술관 건축 여행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