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통관은 2002년 3월 5일 서울특별시기념물 제19호로 지정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 점포인 우리은행 종로지점으로 쓰인다. 2층 양옥으로 된 근대적 건물로 1908년 2월에 착공하여 1909년 5월에 준공했다. 대한제국 때 탁지부(度支部) 건축소에서 세운 이 건물은 은행과 어음조합의 사무소, 일본 상공인들의 집회소 등으로 사용되었다. 가까운 곳에 청계천 광통교(廣通橋)가 있어 광통관이라고 불렀다. 벽돌과 석재를 혼합하여 사용하여 이오니아 양식의 벽기둥을 전면에 배치하였고, 건물 양 날개 부분에 바로크 풍의 돔이 설치되어 아름답다.
광통관의 옆에는 신한은행 광교 금융센터가 있다. 이 자리가 신한은행의 전신 조흥은행이 있었다. 조흥은행 옆에는 조흥은행의 전신인 한성은행이 있었다. 이곳에 모인 금융기관의 모습이 당시의 찬란했던 경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금융의 중심지인 명동과 황금정의 모습은 사진으로 보아도 빼어난 외관을 자랑한다. 광통관, 대동생명, 한성은행, 동일은행이 아름다운 외관을 뽐낸다. '경성의 월스트리트'라 불러도 무방하다. 종현(현 보신각)을 중심으로 숭례문까지 쭉 뻗은 길은 한양의 공인된 시전이 집중적으로 몰려 있는 '남대문로'다. 왕이 행차하는 이 길에 일제 강점기에는 유력 금융기관들이 포진해 있었다.
사실 은행 설립으로 치면 신한은행의 모태라 할 수 있는 '한성은행'이 가장 오래된 은행이다. 한성은행은 김종한 등 거물급 재계 인사들이 자본금 20만원으로 1897년 2월에 설립했기 때문이다. 대한천일은행보다 2년 먼저 설립되었다. 한성은행은 처음에 민간인에 대한 환전 및 금융업무를 목표로 영업을 시작했으나, 영업이 부진하자 황실 및 정부 재산의 관리와 금융으로 업종을 전환했다. 1903년 2월 합자회사 '공립한성은행'으로, 은행장에는 황실측근인 이재완, 이 되었다. 실무책임자는 친일파 한상룡이었다.
한성은행이 영업에 성공한 것은 한일병합 후 친일파의 은사 공채를 인수하여 일거에 자본금이 300만원으로 늘었기 때문이다. 1919년 3·1 운동 때에는 한국인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은행장은 이완용의 형인 이윤용이었고 전무는 이완용의 조카인 한상룡이었다. 그래서 예금을 일시에 모두 인출해 가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은행통합정책에 의해 1941년 경상합동은행을 인수하고, 1943년에는 동일은행과 합병하였다. 동일은행은 조선 최대의 거부 민영휘의 장남 민대식이 세운 은행이다. 한성은행은 동일은행을 흡수하여 조흥은행이 되었다. 조흥은행은 1999년 4월 지방은행들을 합병하였고, 2006년 4월 1일 옛 신한은행과 통합하여 (주)신한은행으로 다시 출범하였다.
남대문로 초입에 한성은행과 광통관이 있다면 끝에는 한국은행이 있다. 외관으로 보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은행이다. 일본 건축계의 대부 다쓰노 긴코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2층짜리 르네상스식 건물인 한국은행은 1975년 영화 <바보들의 행진>에서도 등장한다. 주인공 병태(윤문섭 분)의 장발을 경찰이 단속하는 장면이다. 송창식의 '왜 불러'가 나오는 명장면인데 이곳에서 촬영했다. 일제시대 '다다이마 조센진궁 이마데스(여기는 조선신궁앞 입니다). 미나상 모꾸또(모든 사람들 묵념)'라고 이곳을 지나는 전차의 차장이 외쳤던 곳. 70년대까지만 해도 서울의 중심지였다. 북촌의 중심지가 보신각이라면 남촌의 중심지는 단연 한국은행 앞 광장이었다.
이곳은 조선시대에도 전국에서 거둬들인 미곡을 쌓아 놓는 선혜청의 북쪽 창고(북창동) 지역으로 나라 경제의 중심지였다. 조선이 망하고 근대기로 접어들자 쌀과 같은 현물보다는 근대적인 화폐제도가 중시되었다. 돈을 다루는 은행 중에서도 화폐를 관장하는 중앙은행이 가장 중요했다. 중앙은행제도는 1909년 '구한국은행'이 설립되면서 시작되었다. 이름이 '한국은행'이지 임원 전원이 일본인이었다. 1878년 6월 우리나라 최초로 부산에 근대식 은행인 일본의 제일은행이 상륙했다. 이 은행이 은행권을 발행하기 시작했고 일본의 제일은행 지점이 한국은행으로 바뀐 것이다. 나라가 망하자 '한국'이라는 말을 쓸 수 없게 되자 '조선은행'이 된 것이다.
현 건물은 1912년에 완공되었고 아직도 선명하게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글씨가 은행 정면에 남아있다. 조선은행은 지점이 일본에 4개, 만주에 16개, 중국에 4개를 거느린 식민지 수탈은행이었다. 즉, 말만 '조선'이지 일본의 식민지인 조선을 대표하는 범아시아 식민지 수탈은행이었다. 미군정이 물러가고 지금의 조선은행 자리에 진정한 의미의 '한국은행'이 1950년 6월12일 설립되었다. 그 보름 후에 6·25가 발발했다. 은행 지하창고의 순금 260kg, 미발행 화폐는 북한에 넘어갔다. 건물 지붕이 날아가고 내부가 모두 불에 탔다.
현재 남아있는 근대식 건물 중에 인사동에 가면 '농협 종로금융센터'가 있다. 건물에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현재 농협 건물로 쓰이지만 원래는 신문사 건물이었다. 조선중앙일보이다. 조선중앙일보 이전에는 조선일보가 이곳에 있었다. 조선중앙일보의 사장은 여운형, 3·1운동의 시작점인 신한청년단을 조직했고, 8·15 해방 때는 건국동맹을 만들어 미군정이 들어오기 전까지 나라의 치안을 담당했다.
여운형의 조선중앙일보는 우리나라 문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1935년 이 신문사의 학예부장은 월북작가 이태준이었다. 그는 학예부장 시절, 문단의 이단아 이상의 「오감도」를 실어 우리나라 근대 문학의 수준을 끌어 올렸다. 나중에 월북했지만 그가 쓴 『문장강화』는 아직도 글쓰기의 교과서로 인식되고 있다. 당시에 민간 신문사로는 조선일보, 동아일보, 조선중앙일보가 있었고 매일신문은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였다. 조선일보 방응모와 동아일보 김성수가 자동차와 마차를 타고 출퇴근할 때, 조선중앙일보의 여운형은 '뚜벅이'로 걸어서 출근을 했다. 조선중앙일보가 폐간된 것은 '베를린올림픽 손기정 선수 일장기말소사건' 때문이다. 보통 일장기 말소사건을 동아일보가 일으킨 것으로 알지만, 가장 먼저 일장기를 지우고 보도한 것은 조선중앙일보였다. 조선중앙일보가 8월 13일 보도했고 8월 25일에는 동아일보가 보도했다. 이 사건 때문에 동아일보는 정간이 되었지만 조선중앙일보는 폐간되었다.
우리나라의 근대유산은 모두 6·25전쟁으로 파괴되었지만 그래도 곳곳에 흔적들이 남아있다. 자주 가는 은행들도 연원을 살펴보면 모두 대한제국 시기에 생겨난 문화의 산물이다. 세상에 혼자 스스로 살아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 역사의 산물이다. 브랜드는 역사성을 가질 때 그 의미가 살아난다.
[브랜드의 문화사 ⑭] 은행 이야기 2 < 브랜드의 문화사 < 칼럼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