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 자크 바전(Jacques Barzun,1907-2012)은 ‘예술작품은 당대 정신의 모자이크'라는 말을 했다. 예술이란 자신의 세계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해석적 사고를 바탕으로 이뤄지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많은 예술가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과 시대의 가치관에 호응하며 일련의 이념을 예술로 대변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사회를 통제하는 수단으로 예술을 다루기도 했다.
기자 또한 최근에 벌어진 일련의 사태들 속에서 떠오른 작가와 작품이 있었다. 바로 19세기 화가 오노레 도미에(Honoré Daumier, 1808-1879)의 <가르강튀아>(1831)이다.
이 작품은 르네상스 시대의 풍자 문학가 프랑수아 라블레(Francois Rabelais)의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1532-1564)에 나오는 기형적 몸집을 한 거인왕 가르강튀아(대식가)를 모티브로 한 석판화 작품이다.
도미에는 한 때 '시민의 왕'이라 불리던 루이-필리프 1세가 관료 및 부르주아와 결탁해 자본주의적 군주정치로 전횡을 일삼자 그를 기형적으로 표현했다. 거대한 몸집을 하고 변기와 같은 왕좌에 앉아 서민들로부터 짜낸 금화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기괴한 가르강튀아의 모습이다.
작품에서 눈여겨볼 만한 것은 군주의 얼굴이다.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화가 프란츠 빈터할터가 그린 <루이-필리프 1세의 초상>(1841)와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더욱 극명하게 다가온다. 빈터할터의 작품 속 루이 필리프 1세(Louis Philippe, 재위 1830~ 1848)는 온화한 표정의 길죽한 얼굴형을 지닌 보통의 외형이지만, 도미에는 뾰족한 두상 아래 통통한 볼살이 아래로 축 늘어진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작품 속 루이 필리프 1세의 얼굴은 우측 하단에 피골이 상접한 채 바닥에 주저앉아 나오지 않을 젖을 물리고 있는 여인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며 한층 더 탐욕스럽게 느껴진다.
도미에는 왜 루이 필리프 1세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한 것일까? 그는 민중의 배반자였기 때문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루이 필리프 1세가 어떻게 프랑스 사회에 등장했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당시 19세기 프랑스는 나폴레옹의 몰락 후 권력을 회복한 부르봉 왕가의 샤를 10세가 노골적 보수 반동 정치를 실시하며, 언론 및 출판의 자유, 의회 해산, 선거자격 등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7월 칙령'을 발표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에 노동자, 학생 등 파리의 민중들이 모두 거리로 뛰쳐나왔다. 이것이 바로 '7월 혁명'이다. 이 혁명 끝에 샤를 10세가 물러나고 은행가 등 부르주아에 의해 '시민의 왕'이라 불리는 루이 필리프 1세가 왕위에 오른다. 그러나 민중의 피로 옹립한 루이 필리프 1세마저도 막대한 부를 지닌 자들에게만 선거권을 쥐어주는 등 사회적 불평등과 가난이 계속 심화되자 민중들은 아연해 할 수 밖에 없었다.
이제는 익명의 예술가들이 일어났다. 이전 정부의 엄격한 통제하에 그동안 간헐적으로 생산했던 풍자화가 주간지에 쏟아져 나온다. 도미에 역시 풍자 신문 『라 카리카튀르(La Caricature)』에 실을 목적으로 삽화 형태의 일종인 만평(Editorial cartoon)을 선보이며 시대의 기록자이자 예술가로서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냈다.
도미에는 루이 필리프 1세의 얼굴을 일종의 알레고리처럼 '서양 배' 의 형태와 유사하게 그려낸다. 당시 서양에서 '배'를 뜻하는 명사 'La poire'에는 속어로 ‘멍청이’라는 의미가 있다는 점에서 화가의 분노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케 한다.
이외에도 <가르강튀아>의 그림에서는 날카로운 사회적 비판을 생생하게 만날 수 있다. 화면의 오른쪽 하단에는 7월 혁명의 영웅들이었으나 다리를 잃고 절망에 빠진 군인부터 굶주린 하층민과 노동자 그룹이 보여주는 참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편 반대쪽인 왼쪽 중경에는 백성의 고열을 짜낸 금화를 루이 필리프 1세에게 바치며 자신의 이득만 추구하는 관료, 부르주아 그룹을 변기처럼 보이는 왕좌 아래 배치하였다.
특히 이 작품에서 눈에 띄는 점은 이들 사이에 놓인 긴 판잣길이 만들어내는 수직적 화면의 공간감이다.정서적, 물리적 거리감이 갖는 현실의 적나라함을 한층 더 예리하게 전하고 있다.
원래 <가르강튀아>는 가브리엘 오베르가 운영하는 베로-도다 갤러리의 쇼윈도에 잠시 전시한 후 『라 카리카튀르』에 실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 내용으로 인해 1831년 12월 16일 정부에 압수되어 일간지에는 실리지 못한 비운의 작품이 된다.
이 작품이 일간지에 실렸다면 어땠을까? 삶에 지친 고달픈 군상들의 모습과 군주의 이미지에 내포된 부조리한 사회 현실이 많은 시민들에게 그 어떤 메시지보다 강렬한 힘을 발휘했을 것이다.
도미에는 이 작품으로 인해 유죄를 선고받고 6개월 간 감옥에 구금되었으며, 벌금형에 처해졌다. 또한 『라 카리카튀르』도 폐간에 이른다. 이는 <가르강튀아>가 이미지를 통해 보여준 '진상(Reality)'과 '진실(Truth)' 속에서 현실을 적나라하게 느끼게 했기 때문이 아닐까?
19세기 프랑스의 극심한 정치·사회적 혼란기 속에서 태어나 실명 작업을 중단하기까지 수백 점의 만평을 선보이며 답답한 민중의 마음을 위로하고 시대의 이면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던 도미에. 최근 극심한 정치적 혼란 속에서 위기를 맞고 있는 오늘의 한국 사회를 돌아보며, 만약 도미에가 살았다면 그의 눈에 우리 사회는 어떤 모습으로 그려졌을지 상상해본다.
한지혜 기자 jhpy25@gmail.com
[저항하는 예술 ⑭] 풍자로 절대 권력을 조롱한 화가 도미에 < 미술일반 < 미술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