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남기고 싶은 이야기 ① ] 바보 화가 한인현

by 데일리아트

2025년이 열렸다. K-컬쳐가 온통 세상을 흔드는 시대라고 입을 모은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우리 몸 속에 문화적 DNA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고분 벽화, 어찌보면 흉칙하기도 한 뱀의 모양에서도 아름다운 미의식을 찾아내는 사람들이 우리 선조들이다. 근대로 넘어와, 일제 강점기와 전쟁의 아픔 속에서도 화가들은 아름다움을 찾아 붓을 놓지 않았다. 근대기 역사의 캔버스를 장식한 화가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1900년대 초반에서 1930년대 태어난 미술계의 선각자들이다.


바보 화가라 부르는 한인현 선생의 작품을 만난 것은 친한 지인의 추천을 통해서였다. <기다림>(2021)이라는 소년을 표현한 그림이 울림을 주었다.

2252_5709_2456.jpg 한인현, 기다림, 혼합재, 2021.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도대체 알려지지 않은 화가. 1931년 생이니 이제 몸이 많이 불편하시다. 이 분은 어려운 시기를 어떻게 헤쳐나왔을까? 그 속에서 어떻게 이런 아름다움을 그렸을까 궁금했다. 다행히 이 분의 삶을 잘 알고 있는 피카고스갤러리 김성희 관장을 만났다. 가족들, 지인들과의 친분으로, 귀동냥으로 들은 이야기들을 조금씩 맞추기로 했다. '남기고 싶은 이야기' 그 첫번째 순서로 '바보 화가 한인현 선생'을 다룬다. 비록 현재 몸이 불편하지만 완쾌되어 씩씩한 모습으로 인터뷰라도 해 줄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다.(편집자 주)

2252_5706_1756.jpg 바보 화가 한인현


”해질 무렵, 저녁 놀이 너무도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저를 낳았다고 어머니는 종종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는 만삭의 몸으로 어떻게 저녁 놀을 감상하는 여유까지 가졌던 것일까, 화가 아들을 낳으려고 그랬던 것인가 생각할 때도 있었지요.”


1931년 노을이 무척이나 아름답고 유난히도 무더웠던 여름 밤, 화가 한인현은 함경남도 함주군 흥상읍의 부잣집 맏아들로 태어났다. 아홉 살짜리 소년 시절부터 그를 하숙을 시킬 정도로 교육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부친은 아들이 의사가 되기를 희망했지만, 아름다움에 대한 그의 안목과 감성은 이미 어머니를 많이 닮아 있었다.


“내 눈에도 빛이 유난히 기억에 많이 남아 있습니다. 개구리들의 합창이 한창이던 봄 밤의 정경이 지금도 새록새록 합니다. 소박한 꽃 백일홍이 곳곳에 피어났고, 손톱에 꽃물 들이던 봉선화가 울 밑에서 자라났고. 할아버지 댁에는 호박꽃이 넘쳐났습니다. 마을 집들의 아무렇게나 쌓아 올린 흙담들이 벌을 받으며 서 있었고, 길가에는 아름다운 낙엽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습니다.”


온갖 꽃들과 아름다운 낙엽, 개구리들의 합창, 벌을 서는 담장과 함께 자란 이 소년이 훗날 구름과도 새와도 나무와도 이야기하는 화가가 된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마을에서 한달음 달려가면 바다였습니다. 아무것에도 오염되지 않은 모래밭이 하염없이 이어졌고, 그곳의 여기저기에서 등이 후끈거리도록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조개를 줍고 게를 잡기도 했습니다. 학교 공부는 뒷전에 두고 노을 지는 바닷가에 나가 모래밭을 뛰어다니며 시를 이야기하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중략) 다음 세상에서도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 친구가 되어 홍남 바닷가에서 뛰어 놀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나는 가끔 화폭 앞에 앉아서 그 시절의 일들과 그 시절의 이야기들을 꿈꾸듯 그립니다. 그리기는 하지만 이미 꿈이 된 시절의 일이지요.”


그는 30줄의 어른이 되어도 90대의 노인이 되어도, 언제나 흥남 바닷가를 뛰놀던 소년의 꿈을 꾼다. 모래밭에서 줍던 소라 안에는 파도와 손톱달이 담겨있었다. 천 년이 지나면 꿈을 이룬다는 소라의 꿈. 넘실대는 파도 위에 뜬 달님에게 수줍게 건네는 소년의 소원이 소라 속에 담겨 그려지곤 한다. 화백은 북한에 두고 온 어머니와 가족들을 만날 날을 기다리다, 한참 늦은 결혼으로 얻은 귀한 큰딸의 이름을 소라라고 지었다.

2252_5710_2522.jpg 한인현, 소라의 꿈, 종이에 수채, 2008년.


오래 걸리더라도 이루고 싶은 꿈, 희망이 한인현의 소라이다.


“내가 그림에 흠뻑 빠지게 된 것은 흥남공업학교 시절입니다. 그때, 화가가 되려고 그랬는지 공부에는 영 흥이 안 났습니다. 위낙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문학에 심취하여 시를 쓰고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었던 탓입니다. 책방에 갔을 때, 우연히 그림책 한 권을 만나게 됐습니다. 고흐의 화집이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그의 화집이 내 인생을 결정짓게 됐습니다. 고흐의 그림들이 얼마나 황홀했는지, 그날 저녁 집에 돌아오자마자 책값이 될 돈을 슬쩍할 정도로 나를 감동시킨 화집을 사기 위해서 정신을 못 차렸던 것이지요. 비록 부모님께 들켜서 혼쭐이 나기는 했지만 밤새도록 그림들을 보는 맛에 부모님의 꾸지람은 혼이랄 것도 없었습니다. 그날 이후 나는 밤마다 그림들을 보면서 화가의 꿈을 꿨습니다. 나는 고흐가 됐고, 고흐 못지않은 화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니 지금 내가 그림쟁이가 되어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중략) 사람의 일생은 이렇게 한순간에 결정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고흐의 그림을 운명처럼 만났던 12살 소년은 그렇게 영혼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화가의 길을 두려움 없이 선택했다. 고흐 화집을 어떻게든 갖고 싶었던 소년은 맞을 각오를 하고 집에서 쌀을 퍼내다 팔아서 책을 샀다고 한다. 부모님께 흠씬 맞고 화집을, 아니 고흐를 안고 잘 때 너무 행복했었다는 그의 고백이 있다. 지금 투병 중인 95세 소년의 침상 곁에도 항상 고흐가 자리해 있다.


이 두둑한 배짱의 소년은 흥남시립문화학원 원장 방에서 몰래 여행증 도장을 찍고 해주미술학교로 가기 위해 탔던 기차의 기적 소리를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의사가 되라는 부모님의 주문을 피해 가출한 청년 한인현은 부모님의 도움없이 해주미술학교를 장학금으로 공부해야 했다.


“나이 70이 되어서야 고흐의 무덤이 있는 오베르에 갈 수 있었습니다. 오베르에 갔을 때 나는 당당했습니다. 고흐의 무덤에 소주 한 잔을 따르고 절을 올리면서 나는 가슴이 미어져 견딜 수 없었습니다. 드디어 내가 고흐를 만났구나. 그러면서 절을 했는데, 나는 무덤 속의 고흐가 내 목소리를 듣는다는 확신을 했습니다. 그리고 오베르의 고흐기념관에 내 그림을 기증하고 돌아왔습니다. 내 지조에 나 스스로 만족해서 서울로 돌아왔을 때 나는 한없이 기뻤습니다.”

2252_5711_274.jpg 한인현 화백이 헌정한 고흐 자화상


2252_5712_282.jpg 고흐재단에서 받은 고흐의 방 열쇠


고흐가 사랑했고 대표작들을 남기고 생을 마감하기도 했던 프랑스 오베르(Auvers)에는 고흐의 하숙집 ‘오베르즈 라부‘를 개조한 고흐기념관과 무덤이 있다. 이곳에 한인현 화백이 그린 고흐의 자화상과 도자기, 한 화백의 그림들과 화구들, 그리고 <바보 화가 한인현 이야기: 이계진>이 전시되어 있다. 한 세기 전에 잠든 고흐와 한인현 화백의 인연은 이렇게 계획되어 있었다.


(2부가 이어집니다.)


김성희 피카고스갤러리 관장 enfpaos@naver.com


[남기고 싶은 이야기 ① ] 바보 화가 한인현 - 고흐는 어떻게 내 곁으로 왔을까? < 인터뷰 < 뉴스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

keyword
작가의 이전글[청년작가 열전 18] 발칙하거나 현실적, 유장우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