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영 그림, 향원정의 설경
조선시대의 법궁 경복궁에서 가장 운치 있는 곳을 꼽으라면 아마도 경회루나 향원정이 될 것이다. 겨울철 하얀 눈으로 덮인 경복궁의 향원정과 경회루 주변의 고즈넉한 풍경은 감탄을 자아낸다. 지난주 눈이 내린 날 아침 일찍 이곳의 설경을 보기 위해 설레는 마음으로 경복궁을 찾았다.
멋진 설경은 아침이 가장 보기에 좋다. 이 때 사진을 찍으면 찍는 사람은 사진작가가 되고 찍히는 사람은 일류 모델이 된다. 평일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소복하게 쌓인 설경을 배경으로 아름다움을 누리고 있었다. 특히 외국인 관광객들은 한복까지 입고 와서 고궁의 설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그러고 보니 향원정은 경복궁에서 제일 가는 포토 라인이다.
이곳에서 나도 오래전 사진을 찍은 기억이 난다. 워낙 오래전 일이다. 지금은 마흔이 훨씬 넘은 아들을 낳기 전에 아내와 둘이 이곳에서 나들이를 한 기억이 있다. 1978년 일이니까 지금부터 50년 전 일이다. 신혼여행도 변변히 가지 않던 시절, 아내의 손을 잡고 경복궁으로 나왔다. 독자 여러분의 사진첩에도 이런 사진 한두 장은 있을 것이다. 오늘은 손자들과 함게 나들이를 나오지 못해 허전했는데 과거를 회상하니 미소가 지어진다.
1978년 아내와 함께 향원정에서. 나에게도 이런 꽃다운 시절이 있었다.
현재 나의 모습. 세월은 지나가도 나에게는 식지 않는 열정이 있다.
경복궁은 조선의 법궁이다. 이성계가 왕이 되어 3년 만에 도읍을 옮긴 1395년부터 자리를 지켜온 조선의 으뜸 궁궐이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의 화재로 인해 275년간 방치되다가 1896년에 이르러서야 고종이 국가의 안녕과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중건했다.
그래서 현재의 경복궁은 조선 초기의 궁궐이 아니라 고종의 중건으로 지어진 것이다. 총 건물 수 330여 동, 7,450여 칸의 대단히 큰 궁궐이다. 흔히들 중국의 자금성과 비교해서 우리의 경복궁이 너무 작다고 하는데 실제 넓이를 계산해 보면 그리 작은 것도 아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중국처럼 하나의 궁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시대를 달리하면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등 이궁 체제로 궁궐이 운영되었다. 왕에게 닥칠 위험과 적의 침입을 대비해서 늘 두개의 궁을 두었다. 두 궁궐을 합치면 자금성보다 규모가 더 크다.
우리나라 인구의 10%인 166만명이 찾았던 시정 5주년 조선물산공진회(1915) 조감도
경복궁이 본격적으로 수난을 당한 것은 일제 강점기 때였다. 1915년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한 지 5년이 지나 경복궁 안에서 조선물산공진회라는 커다란 행사를 했다. 이 때 그 많던 전각들이 훼손되었고 빈 자리에 1926년 조선총독부를 지었다. 해방 후에도 경복궁의 훼손은 심해, 1990년 복구 사업하기 전에는 36동의 건물만 남아 있었다. 이는 고종 시기 중건한 규모와 비교하면 겨우 7%에 불과하다.
향원정은 경복궁 북쪽 후원에 조성된 조선시대 2층 육각 목조 정자이다. 경복궁의 후원에 있는 향원지 연못 가운데 섬을 만들고 그 위에 세웠다. 왕과 왕실 가족들의 휴식처로 활용되었으며 일부 변형된 부분은 있지만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
향원정은 설경뿐 아니라 꽃이 피는 봄과 녹음이 우거지는 여름, 단풍이 아름다운 가을 풍경도 빼어나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1894년 고종과 명성황후가 지켜보는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선교사들이 피겨 스케이팅 시연회를 열었던 곳이기도 하다. 생각해 보니 어릴 적 이곳에서 친구들과 스케이트를 타기도 했다.
경복궁 스케이트장 /출처: 국가기록원
경복궁을 둘러보기 위해서는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을 통해 홍례문 앞 쪽으로 들어가 직진하여 근정문을 통과하여 임금이 정치를 논하던 근정전을 먼저 보는 게 좋다. 그 다음에 임금이 나라 일을 논의하던 사정전을 지나 임금이 머무는 강녕전, 왕의 연회 장소이자 외국 사신들을 접대하던 경회루를 본다. 그 후에 왕비가 머무는 교태전 등 전각들을 둘러보면서 향원정으로 이동하는 코스가 좋다.
[손자에게 들려주는 서울 이야기 ⑧] 경복궁의 향원정 < 문화일반 < 문화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