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손과 엘리스 현
조선의 극장 우미관과 단성사
흔히들 우미관이 조선인에 의헤 설립된 영화관으로 알지만 이는 잘못 알려진 것이다. 단지 극장이 조선인들의 주 활동 무대인 종로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다. 영화 〈장군의 아들〉에서 일본 주먹패 하야시 일당과 겨루는 김두한의 주 활동 거점이 우미관인 이유도 있다. 우미관은 1912년 12월 일본인 하야시다 긴지로와 시바타 미요지에 의해 세워졌다. 동대문활동사진소를 운영하던 박승필을 끌어들이고 경성고등연예관에서 조선인 변사로 이름을 날리던 서상호를 스카우트하기도 했다. 자본과 운영은 일본인이 맡아서 하고 전면에 내세운 것은 조선인이었다. 그래서 경성을 대표하는 조선인 극장이 된 것이다. 제1차세계 대전이 일어난 1914년 이후는 미국영화 제작회사 유니버설에서 수입한 영화를 주로 상영해서 조선인들에게 호응을 얻었다.
조선 최초의 극장은 1907년에 세워진 단성사인데 1914년 흥행업자 안재묵이 건축비 1만 1천 원을 들여 리모델링을 해서 수용 인원을 1천 명까지 확장해 우미관에 맞섰다. 그러나 신축 1년만에 화재로 소실되어 1918년 12월 다시 활동사진관을 신축하고 우미관의 영사기사 박정현을 끌어들여 영업을 정비했다. 박정현은 나운규,이경손,이구영 등 무성영화 시대의 대표적 영화인들을 지원한 대표적 영화인이다.
변사와 연쇄극
무성영화에 맞춰 변사가 목소리로 극을 이어가고 있다. /출처: 군산근대사박물관
활동사진을 상영할 때는 화면만 나오기 때문에 영화의 내용과 흐름을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이 역할을 하는 사람을 '변사'라고 하는데, 변사는 '설명 변사'와 '연극 변사'로 나뉘었다. 설명 변사는 영화의 자막을 읽어주거나 배경을 설명했고, 연극 변사는 스크린 뒤에서 극중 배역의 대사에 맞춰 목소리 연기를 했다. 일종의 성우로 보면 된다. 연극 변사는 영화의 일부를 관객들 앞에서 연기하기도 했다. 설명 변사는 영화의 장면인 서양의 풍속과 역사를 이야기할 줄 아는 사람이라 지식인으로 대우를 받았다. 극영화의 상영이 늘면서 변사라고 하면 주로 연극 변사를 통칭하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필름 가격이 상승하자 새로운 형태의 영화가 등장하기도 했다.. 이른바 '연쇄극'이라는 형태인데 연극과 영화가 결합된 형태의 극을 말한다. 연극의 일부를 활동사진 상영 중간에 삽입했다. 중간에 삽입하는 연극은 극장 소속의 연극 변사들이 참여했다. 필름 속 배우와 무대의 배우가 달랐지만 관람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1923년 1월13일 단성사에서 개봉한 <국경>은 일본 제국주의 침략을 무사도 고취라는 명목으로 합리화한 영화이다. 상영되기 하루 전인 1월 12일 의열단원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투탄 사건이 일어나는 등 민족 의식이 강하게 불고 있던 시기였다. 만주에서 활약한 독립군을 마적으로 격하한 영화 <국경>은 개봉 첫 날 조선인 학생들의 엄청난 야유로 영화 상영이 중단되기도 했다.
최초의 영화 <의리적 구토>
영화 '의리적 구토' 신문 광고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는 김도산 감독의 <의리적 구토(義理的 仇討)>이다. '의리적 구토'는 '정의를 위한 복수'라는 뜻이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우리 자본에 의해 만들어졌다. 지금 영화의 날로 기념하는 10월 27일은 <의리적 구토>가 단성사에서 개봉한 1919년 10월 27일을 기념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연극적 요소가 영화에 삽입된 연쇄극의 형태를 취한다. 기차, 한강 다리 등을 극장 안에서 볼 수 있었던 우리나라 활동사진의 시초다. 간악한 계모 밑에서 주인공 송산은 오로지 가문을 위해서 눈물을 머금고 모든 것을 참는다. 계모 일당의 간교한 흉계는 마침내 재산을 가로채고 가문을 더럽힐 지경에 이른다. 술타령으로 세월을 보내던 송산은 결의한 형제인 죽산, 매초와 더불어 마침내 응징의 칼을 뽑는다는 내용이다.
영화 '밀정'에 나오는 우리나라 최초의 다방 '카카듀'
영화계의 마당발 이경손
이 시절 영화감독이자 제작자인 이경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다방 '카카듀'를 그의 조카 엘리스 현과 함께 개업하기도 했다. 이들이 다방을 개업했다고 해서 돈을 벌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국내로 잠입한 엘리스 현은 이경손과 동업으로 카페를 열어 합법적으로 독립운동을 하려고 한 것이다. 식민지에서 자유로운 세상을 꿈 꾼 이경손은 엘리스현을 통해 외국과 임시정부의 소식을 들었다.
이경손은 개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에 제일고보, 인천상선학교, 서울신학교를 중퇴했다. 그래서 그는 선원 생활도 하고, 교회에서 전도사 노릇도 했다. 다양한 인생 역정의 소유자다. 우리나라 1세대 영화인 나운규, 주인규, 김태진, 정기탁 등에게 영향을 미친 사람이 모두 이경손의 인맥이다. 그는 기생과 명문가 청년의 이야기를 담은 <춘희>를 신파극과는 조금 다르게 예술성 있게 만들었으나 실패하고, 문학과 영화 잡지인 『문예와 영화』를 창간하기도 했다. 연극에도 손을 뻗어 「조선 연극인이 나아갈 길」 같은 논설을 신문에 기고하기도 했다.
그의 인생은 참으로 파란만장하다. 1928년에는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가서 몽양 여운형을 만나기도하고, 이곳에서 영화 <양자강>을 제작한다. 영화는 중국 군벌에게 어머니와 애인을 잃은 중국 청년이 전쟁에서 다리를 잃고 다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전쟁에 나간다는 줄거리다.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그는 3·1절 기념식 연극을 연출하기도 하고, 희곡 등을 창작하기도 했다. 그의 이력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해방 후에 태국에 진출하여 1966년 방콕 거류민단 회장을 맡기도 하다가 1977년 타계했다.
조선총독부 낙성식에 개봉한 영화 <아리랑>과 나운규
영화 '아리랑'의 한 장면
아리랑의 감독 겸 주연으로 활약한 춘사 나운규
함경북도 회령 출신인 나운규는 윤동주가 다닌 간도의 명동중학교를 다니다가 독립군에 입단한다. 일본인이 건설한 청회선 철도를 파괴하려다 발각되어 1년 6개월 동안 수감 생활을 하기도 한다. 우리 민족이 들불처럼 일어난 3·1운동의 열기 속에서 영화 <아리랑>을 제작한다. 당시에 조선 영화들이 대부분이 전래극이나 신파극을 번안한 것인 데 반해 조선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아리랑>뿐이었다. 아리랑도 신파적인 요소가 없던 것은 아니지만 현실의 사회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 영화는 공교롭게도 조선총독부가 신축하고 낙성한 1926년 10월 1일에 개봉하기에 이른다. 고관들과 서울의 내로라 하는 사람들은 총독부 낙성식에 갔겠지만 수많은 민중들은 영화를 보러 갔다. 영화를 상영한 단성사 앞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 아리랑 노래를 읊조렸다. 권번의 기생들도 몰려갔다. 총독부에 대한 말없는 저항이라고 해야 할까?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영화 포스터 '임자 없는 나룻배'(1932년) /출처: 한국영상자료원
임화는 영화 아리랑에 대해 "조선영화 최초로 타자 의존에서 독립해본 성과이며 독립적인 영화정신이 높은 조선 영화"라고 평가했다. 아리랑의 성공 후 나운규는 개성 있고 현실성을 가미한 영화들을 많이 만들었다. 1928년 <사랑을 찾아서>, 1926년 <풍운아>, <오몽녀> 등이다. 그러나 실패를 거듭하다가 다시 명성을 얻은 것은 1932년에 제작한 <임자 없는 나룻배>의 주연을 맡으면서이다.
먹고살기 어려워 서울로 올라와 인력거꾼이 된 수삼(나운규 분)은 아내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물건을 훔치다 옥살이를 한다. 그러나 아내의 불륜을 눈치채고 나룻배 사공이 된다. 강 위에 철다리가 가설되어 배가 필요없게 되자 뱃사공인 수삼은 실직한다. 철다리 기사가 딸을 욕보이려 하자 격투를 벌이고, 그 사이 딸은 불타는 집에서 죽고 임자 없는 나룻배만이 일렁인다는 내용이다. 나운규는 영화를 통해서 조선인의 저항 정신과 울분을 표현했다. 그래서 그를 독립적인 영화 정신의 소유자로 평가한다.
이처럼 식민 시기에 본격 도입된 영화는 자연 발생적으로 조선인들을 결집하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했다. <의리적 구토>가 개봉한 1919년은 3·1만세운동으로 온 나라가 일제에 맞섰던 시기이고, 1926년 <아리랑>이 개봉할 때는 조선총독부의 낙성식이 열렸다. 3·1만세 운동은 고종의 인산일에 맞춰 일어났고, 그 해에 조선 최초의 영화가 개봉했다. <아리랑>이 개봉한 1926년은 순종이 승하한 때이다. 민족적 저항의 시기에 조선 최초의 영화가 시작되었고, 조선의 마지막 왕이 승하할 때에 조선 사람들은 아리랑을 부르며 마음의 한을 달랬다. 영화는 정말 시대를 읽고 대변했던 것일까?
다음 회부터는 우리나라 영화의 황금기인 1960년대에 개봉한 영화들을 소개하도록 한다.
[영화로 시대 읽기 ②]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는? < 영화 < 문화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