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컬쳐가 온통 세상을 흔드는 시대라고 입을 모은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우리 몸 속에 문화적 DNA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고분 벽화, 어찌보면 흉칙하기도 한 뱀의 모양에서도 아름다운 미의식을 찾아내는 사람들이 우리 선조들이다. 근대로 넘어와, 일제 강점기와 전쟁의 아픔 속에서도 화가들은 아름다움을 찾아 붓을 놓지 않았다. 근대기 역사의 캔버스를 장식한 화가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1900년대 초반에서 1930년대 태어난 미술계의 선각자들이다. 바보 화가라 부르는 한인현 선생의 작품을 만난 것은 친한 지인의 추천을 통해서였다. <기다림>(2021)이라는 소년을 표현한 그림이 울림을 주었다.
한인현, 기다림, 혼합재, 2021.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도대체 알려지지 않은 화가. 1931년 생이니 이제 몸이 많이 불편하시다. 이 분은 어려운 시기를 어떻게 헤쳐나왔을까? 그 속에서 어떻게 이런 아름다움을 그렸을까 궁금했다. 다행히 이 분의 삶을 잘 알고 있는 피카고스갤러리 김성희 관장을 만났다. 가족들, 지인들과의 친분으로, 귀동냥으로 들은 이야기들을 조금씩 맞추기로 했다. '남기고 싶은 이야기' 그 첫번째 순서로 '바보 화가 한인현 선생'을 다룬다. 비록 현재 몸이 불편하지만 완쾌되어 씩씩한 모습으로 인터뷰라도 해 줄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다.(편집자 주)
한인현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 2편
ㅡ 내 사랑하는 몽당연필들아 ; 데셍dessin ! 기본이 힘이다
내 그림 속 주인공은 아니지만 꼭 소개해야 할 식구가 있습니다. 여기 내 보이는 몽당 연필들 입니다."
한인현 화백의 몽당 연필
한인현 화백의 서너 평 남짓한 작은 화실 한쪽 벽에는 그가 직접 크리스마스 그린으로 칠한 작은 상자들이 빼곡하다. 그 상자들에는 크고 작은 스케치들이 가득가득 담겨있다. 간혹 운이 좋으면 그림 뒤에 친필로 남긴 메모들도 함께 읽어볼 수 있다. 그가 애지중지 간직해온 몽당연필들이 담긴 상자들도 의젓하게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몽당 연필이 내 가난한 삶을 증언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이 연필들을 볼 때마다 내 그림 속에 스며들어 있는 몽당 연필의 혼을 생각하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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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변하여 컴퓨터로 그림을 그리고, 연필 몇 자루 없애 보지도 않고 화가의 길을 걷는 사람도 많지만 몽당 연필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가 화가수업의 기본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화가 한인현의 행복한 그림일기 꿈 ; 한인현> 중에서)
2023년 여름 투병 전까지, 하루도 스케치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화가 한인현의 고집과 함께 무한 생성되었던 이 몽당연필의 역사는 해주예술학교 시절에 시작되었다.
해주예술학교의 전신은 해주음악전문학교이다. 해주음악전문학교는 1946년 1월 정률성(鄭律成)에 의해 설립된 북한 최초의 3년제 음악전문학교이다. 1949년에는 1947년 9월 설립된 평양음악전문학교와 함께 5년제 국립음악학교가 되는데, 1948년에 이미 성악과, 기악과, 작곡과 등에 걸쳐 전공자가 백여 명에 이르렀다. 1947년 9월에 미술, 무용 등의 전공과목을 포함하게 되면서 해주음악전문학교는 해주예술전문학교가 된다.
송해 선생님이 해주예술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박창돈 화백이 1948년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1949년 월남하였다. 해주예술전문학교가 1946년 남한에 설립된 경주예술학교와 더불어 명실상부 우리나라 최초의 예술전문학교인 만큼 1945년 이화여자대학교를 시작으로 1946년 서울대학교, 1949년 홍익대학교에 미술대가 생기면서 해주예술전문학교 출신의 화가들이 교수로 임용되게 된다. 한인현 화백에게도 두 번의 제안이 있었으나 교육자이기보다 화가이기를 원했던 그는 모두 고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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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_1987_3_8x25_종이먹색연필
한인현 화백은 해주예술학교에 1948년에 입학하였는데, 해주예술학교에서의 기초 훈련과정은 참으로 혹독했었다고 회고한다.
당시 미술대학에서는 1년에 30명의 학생을 모집하였고 그 중 회화과는 10명이었다. 그러나 혹독한 데생 교육과 반복 훈련에 지쳐 그중 반은 중도 탈락하였다고 한다. 가와바타 미술학교 출신으로 남북한 최고 데생 실력자로 평가받던 박한석 교수를 비롯해 동경미술학교 출신의 박성환, 사재민, 민병재 교수 등이 데셍, 미술사, 경제, 지리, 다윈의 진화론 등을 가르쳤다. 그와 함께 수학한 선배로는 신예윤, 정창화, 김일주, 전기만 등이 있고 동기로는 김일룡, 김춘하, 홍성표 등이 있었다.
해주예술학교 미술대를 수석 입학한 청년 한인현은 전 학년 내내 데셍과 크로키에서 수석을 놓치지 않았다.
무제_1988_4_8x25_종이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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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스승이자 그의 재능을 특히 아껴주었던 사재민 교수는 내복도 사주고, 주말마다 집에서 밥도 챙겨주었다. 방학에도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그림만 그리던 제자가 못내 안쓰러웠던 게다. 고흐의 그림에 감동하여 화가를 꿈꾼 한인현은 의과 대학에 가라는 부모님의 권유를 뿌리치고 화가로서의 삶을 선택하였다. 흥남고등학교를 마치고 고무신 바람으로 가출하여 해주예술학교로 진학하면서 걸어온 길고도 외로운 길에 후회는 없지만, 화백은 부모님께 죄스러운 마음을 아직도 가슴 한편에 걸고 있다. 해주미술학교가 그에게 가르쳐 준 것은, 잔인할 정도의 훈련은 사물의 생김새는 물론 생명력까지 이해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좋은 작품은 보고 또 볼수록 새로운 감동이 넘실대듯이, 제대로 된 그림을 그리려면 혹독한 훈련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가슴 깊이 받아들인 그는 전 생애 걸쳐 이 훈련을 실천하였다.
무제_1986_5_8x25_종이먹
무제_1986_12x16.5_종이먹금가루
화백은 '대상에 대한 완벽한 이해와 표현의 완성'이라는 것이 진실로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일까. 보드라운 이부자리 없이, 너무 푹 자버리는 실수도 없이, 그렇게 70년 넘게 꼬박꼬박 지켜온 그의 성실한 숙제들은 실로 군더더기 없이 아름답다.
"기본은 힘을 줍니다. 힘이 있는 사람은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이유는 해주예술학교에서 가르쳐 준 데셍 훈련의 힘 때문입니다. 그것이 가슴으로 그림을 그리게 만든 것입니다."
[한인현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 ②] 내 사랑하는 몽당연필들아! 데생의 기본은 힘이다 < 인터뷰 < 뉴스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