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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의 등처럼 나타나는 고전 ③]비용은 당신이 대라

by 데일리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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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바사니오가 포샤의 마음을 얻는다. 안토니오 파올레티 작. Public domain


포샤는 자기 남편이 된 바사니오에게 반지를 주며 말한다. 이 반지를 빼거나 잃어버리거나 다른 사람에게 주는 순간 사랑은 끝나고, 나는 당신에게 모든 손해를 청구하겠노라고. 장차 이 반지를 잃어버릴 일이 생길 암시인 셈이다. 사랑은 상대에게 반지를 끼워 몸을 독점하고, 그 독점성이 상실되면 손해 배상을 청구한다. 그렇게 사랑 이야기는 돈과 몸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경제적 차원의 전개, 그리고 서로의 몸에 대한 배타적 독점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사랑은 존속할 수 없다. 사랑은 현실 속으로 뻗어 나갈 길이 필요하고, 현실 속의 길은 돈을 써서 뚫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험한 현실 속으로 살아가려면 애초에 사랑이 환상 속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진실을 작품은 요령 있게 가르친다.


안토니오가 가진 모든 배가 암초를 만나 난파되었다.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무리한 설정이긴 한데 작품 속에서는 그렇게 진행된다. 샤일록은 계약대로 정의를 구현하려 한다. 반면에 신뢰 자본이 두터웠던 안토니오는 사람들에게 신망을 얻고 있었다. 이탈리아에 사는 그 누구보다 옛 로마인의 기품을 많이 가지고 있는 자라는 평판을 받고 있다. 하지만 계약을 지키지 못했으므로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 포샤는 이런 소식을 전해들은 남편에게 얼른 베니스로 돌아가보라고 보낸 뒤에 만토바에 있는 사촌 벨라리오 박사에게 인편으로 편지를 보내 법복을 빌린다.


그리고 마침내 작품 전체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재판 장면이 이어진다. 계약대로 살 1파운드를 베어내겠다! 1파운드라면 450그램에 해당하는 부피. 샤일록은 베니스를 통치하는 공작에게 어서 공정한 판결을 내려 달라고 외치지만 주변에서 계속해서 방해를 받는다. 다들 샤일록에게 비정하고 냉혹하다고 항의할 뿐 아니라, 판결을 내려야 하는 베니스 공작 역시 강력하게 비난한다. 그러나 다른 이들이 아무리 탄원해도 샤일록은 듣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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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영국 브리스톨 왕립 극장의 [베니스의 상인] 공연 당시.


그는 ‘정의’를 호소한다. 공작은 판결을 위해 벨라리오 박사에게 자문을 구했으니 그쪽에서 소식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한다. 공작이 벨라리오에게 법률적 자문을 의뢰할 거라는 걸 포샤는 어떻게 미리 알았을까? 그 점은 작품에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지만, 벨라리오 박사가 자기 대신에 유능한 젊은 학자 발타자르를 보낸다는 편지와 함께, 발타자르로 변장한 포샤가 등장한다.


샤일록의 요청을 듣고 계약 조항을 살펴본 발타자르는 샤일록의 요구가 정당하다면서도 그런 정의에 대비되는 자비를 요청한다. 샤일록은 끝까지 거부한다. 이에 발타자르는 계약서를 물들이고 있는 문구대로 살 1파운드를 잘라내라는 판결을 내린다. 살을 달아볼 저울까지 미리 준비한 샤일록은 집행하려 한다. 그때 발타자르가 샤일록에게 한 마디 말을 덧붙인다.


샤일록, 의사를 대기시키세요. 비용은 당신이 대고.


그가 피를 쏟고 죽지 않도록 지혈을 해야 하니까.


반격이 시작되는 장면. 판세가 급변한 것을 파악한 샤일록은 돈만 받겠다고 서둘러 입장을 바꾸지만, 발타자르는 정의에 입각해서 계약서에 있는 대로만 집행하라고 말한다. 급하게 입지가 좁아진 샤일록은 돈도 포기한다. 그걸로 그치지 않고, 무고한 시민의 목숨을 위협한 자로서 베니스의 법에 따라 자기 재산까지 몰수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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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류 하우가 그린 [베니스의 상인] 속 재판 장면, Getty Image


당연한 권리도 행사하는데 조심해야 한다. 설령 이미 확정된 권리를 행사하는 마당이라도 세상이 동의하지 않으면 집행할 수 없다. 개인의 행위는 세상과의 조화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한 원하는 바를 달성할 수 없다. 세상 전체와 공명하지 않는 명분을 행사하려 하면 앞을 가로막는 이가 계속 나타나고, 단계가 진행될수록 험난해진다. 두툼한 호의를 덧입지 못한 정의, “마음 속에 품고 있는 미움과 혐오”을 공정으로 정당화하려는 의도는 끝내 폭로된다.


샤일록은 정의를 부르짖지만, 정의를 원했던 게 아니라 앙갚음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엄밀히 따져 보자면, 법의 심판도 일종의 앙갚음이다. 앙갚음 자체는 정의가 실현되는 방식이 아니던가. 다만 앙갚음의 ‘정도程度’를 따져야 한다. 앙갚음의 정도가 과하다면 설령 애초의 약속에 입각한 사항일지라도 사후에 파기될 수 있다. 세상에는 ‘뒤늦게’ 질서를 회복하는 힘이 있다. 한번 밀렸다가 반격하기 때문이다. 세계의 질서를 회복하는 힘은 소방관이 놓친 고무 호스처럼 멋대로 물을 분사하는 난폭한 면이 있으며, 세익스피어는 비극 작품 속에서 이 두려운 힘을 어둡게 다루지만, 희극 작품에 나타나는 질서 회복력은 가지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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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버트가 그린 샤일록, 재판 이후 몰락해 아이들에게 조롱당하고 있다. (출처: 위키피디아)


연극의 첫 장면에 등장하는 안토니오처럼 알 수 없는 이유로 우리 마음은 균형을 잃고 흔들리고 우울에 빠진다. 그 상태에서 위험을 미처 헤아리지 못한 채 계약을 맺기도 한다. 자기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덫인 줄도 모르고 계약을 체결하는 안토니오, 사치를 부리느라 있던 재산을 탕진하고 친구에게 돈을 빌려 생계를 이어가는 바사니오, 아버지가 정한 일견 허술해 보이는 방식에 따라 배우자를 선택하는 포샤처럼 우리는 수심을 모르면서도 바다를 건너는 나비처럼 살아간다. 미숙한 모습 그대로 위험한 세상 속으로 날아가야 한다.


작품이 표나게 내세우는 바, 납궤로 대변되는 포샤는 어떤 인물인가? 그녀 역시 불완전한 인간이지만 그녀에게는 세상의 질서를 바로잡는 힘인 ‘지혜’가 깃들어 있다. 그녀는 자신이 가진 자원 중 돈과 외모를 활용하지 않고, 자신의 판단력을 가동한다. 그녀는 세상을 향해서는 허름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자기 내면을 채우는 일을 중시하며, 정당한 권리라 하더라도 행사하기 전에 자비를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지혜는 ‘조심스럽다.’ 권리를 가지고 있더라도 다 사용하지 않는 감각을 갖고 있다. 무엇보다 그녀가 가진 지혜의 특징은 “반격성”이라 할 만하다. 샤일록에게 의사를 부르되 “비용은 당신이 대라”라는 말로 상황을 뒤집어간다. 일단 밀렸다가 반격하며, 재반격을 허용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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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설리가 그린 [샤일록과 포샤] (1835)


작품에서는 정의와 자비의 대비도 엿보이지만, 보다 본질적으로는 법과 지혜의 대립이 부각된다. [베니스의 상인]에는 세상 질서가 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혜에 의해 성취된다는 고전적인 관점이 깔려 있다. 구약성경학자 존 월튼이 말한대로, 법이란 규정이 모두 성문화되어 있어서 사람들에게 강제적 의무로 부과되는 조항 체계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고대 사회의 법은 융통성이 있었고, 사회는 규범과 관습에 따라 돌아갔다. 고대 사회의 재판관 역할은 사법 시험을 통과한 교육받은 자들이 아니라 경험 많고 통찰력 있는 어른들이 담당했다. 성문법 체계가 확정되어 있지 않았던 시대에 법이란 규범적 법전이 아니라, 서술적인 내용이었다. 다시 말해 그 내용을 보면서 어떤 식으로 판단해야 하는지 미루어 헤아리고 지혜를 익힐 수 있었다. 구체적인 수학 문제를 풀면서 그 원리를 익히듯, 고대의 법은 세상을 다스리는 지혜를 습득하는 역할을 했지, 있는 그대로 적용하면 될 만큼 모든 경우의 수를 담고 있는 매뉴얼이 아니었다. 고대 근동 사회 재판관이나 통치자들은 법 조문에 근거해서 판단하는 자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자신이 가진 통찰과 지혜에 따라 결정했다.


개인 차원과 사회 차원의 질서 모두 지혜를 통해 도달해야 했다. 존재 전체를 잘 튜닝해서 우주와 공명하는 인간, 울림이 있는 자라야 지혜롭다. 재판에서 드러나는 지혜는 터득하는 것이지 규정대로 살아서 이룰 수는 없다. 샤일록이 추구하는 방식대로 규정에만 집착하는 자는 지혜의 필요성을 망각하고 있으며, 그처럼 내적인 조화가 깨진 자는 불협화음을 만든다. 우주 전체적으로 보자면 불협화음 역시 전체 조화에 기여하지만, 불협화음 자체가 주된 모드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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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에 영화로도 나왔다. 알 파치노, 제레미 아이언스 등의 출연한다


조화와 완전함의 세계는 필연적으로 “회복된” 세계이다. 애초부터 조화롭고 완전한 세계가 우리에게 주어지지는 않으니까.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극의 첫 장면부터 우울한 상태로 등장했던 안토니오를 회복시키고, 샤일록으로 인해 깨져 버린 세계의 조화와 균형을 회복하는 일, 여기에 이 작품의 주제 의식이 걸려 있다. 지혜는 외부의 불의와 부조리는 물론이고,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내적 우울과 무기력을 물리치는 힘이다. 앞서 말했듯, 지혜에는 반격하는 힘이 있으니까.


반복하지만, 불협화음의 존재 자체도 전체적 조화에 기여한다. 세계 전체는 조화가 회복되어 울림이 일어나는 지경을 향해 움직인다. 우리 삶의 슬프고 괴로운 현장에서, 서로 모순되는 대립항 속에서, 세계 자체는 스스로 균형을 회복하기 위해 쉬지 않고 움직인다. 그 깊고 아픈 고통의 불꽃이 핥고 지나간 뒤에도 살아남은 진리만이 사람을 구원한다. 은궤 속의 메시지처럼 “실수 없이 정확한 판단이란 불에 일곱 번 단련되어 나오는 법”이니까.


나의 지혜는 인생에 불어오는 세파 속에서 점점 단단해지고 있는가. 포샤가 되어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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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나온 수집용 그릇, 베니스의 상인의 한 장면이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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