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설원을 바탕으로 한 남성이 쓰러져 있습니다. 남성의 이름은 사뮈엘. 그의 머리 주위로 흐르는 새빨간 피는 흰 눈과 강렬한 대비를 이룹니다. 사뮈엘의 주검을 발견한 사람은 그의 아들이자 시각장애인인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은 급히 엄마 산드라를 부릅니다. 남성의 죽음에는 사고사, 자살 혹은 타살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여러 정황상 사고사의 가능성은 적습니다. 남아있는 가능성은 자살 혹은 타살입니다. 유일한 용의자는 아내 산드라입니다. 사고를 기점으로 일 년이 넘는 지리멸렬한 법정 공방이 시작합니다.
해부를 뜻하는 프랑스어 anatomie에는 여러 의미가 있습니다. 해부학적 구조, 인간의 육체, 나체를 뜻하기도 합니다. 면밀한 분석인 analyser 역시 의미합니다. 추락을 뜻하는 chute에는 실각, 몰락, 붕괴라는 다른 뜻이 있습니다. ‘추락의 해부(2024)’라는 영화 제목은 남편인 사뮈엘의 추락사에 대한 진실을 해부한다는 뜻이며, 사뮈엘과 산드라 부부 관계의 몰락에 대한 분석을 뜻하기도 합니다. 감독인 쥐스틴 트리에 역시 사뮈엘의 추락사를 한 커플의 붕괴에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과연 무엇이 사뮈엘을 죽음이란 파국으로 몰아넣었을까요. 영화 초반, 유명한 소설가 산드라는 문학 전공 여학생 조에와 인터뷰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집은 프랑스 그르노블 지방 설산의 외딴 산장입니다. 같은 소설가로 일하는 남편 사뮈엘이 집필에 몰두하고 싶다고 주장해서 찾아온 곳입니다. 산드라는 조에에게 개인적인 질문을 던지며 화제를 돌립니다. 남편 사뮈엘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크게 음악을 틀어 그들의 인터뷰를 방해합니다. 이 모든 설정에 트리에가 깔아놓은 복선이 숨어 있습니다.
산드라는 남편의 방해 행위에 무반응으로 맞섭니다. 조에에게 다음 기회에 인터뷰하자는 말을 남깁니다. 조에는 황망하게 그의 집을 떠납니다. 회피적이고도 무심한 산드라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시간이 흐른 뒤, 산책에서 돌아온 아들 다니엘이 사뮈엘의 시신을 발견합니다. 사뮈엘의 시신을 검시한 경찰은 그가 죽기 전, 머리를 무언가로 얻어맞았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이제 산드라와 다니엘은 그들이 원치 않는 방식으로 법정 세계에 끌려 들어갑니다.
검사 측은 산드라가 남편의 머리를 둔기로 쳐서 떨어뜨렸다고 주장합니다. 산드라의 변호사는 남편이 추락하면서 밑에 있는 지붕에 머리를 부딪쳤다고 반론합니다. ‘추락의 해부’는 영화 여기저기에서 실체적 진실과 사실은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추락의 해부’는 영화 ‘라쇼몽’식의 이미 진부해진 주제 의식의 변주가 아닙니다. 영화는 줄곧 캐묻습니다. 법정에서 드러난 한 사람의 삶 일부가 얼마나 현실에 가까운지를.
산드라와 사뮈엘의 사이는 이상적인 부부 관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때 뜨겁게 사랑하던 관계였고, 지금도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애씁니다. 결혼 생활을 해본 사람들이라면 공감할 것입니다. 운 좋은 몇몇 부부는 심각한 갈등을 겪지 않고 함께 황혼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많은 부부에게는 좋은 시절과 나쁜 시절이 반복됩니다. 때로 상대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하는 시간도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다만 용기의 부족(?), 윤리 의식, 법적 처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참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 부부에게 애정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요? 부부 관계를 포함한 모든 인간관계란 그토록 쉽게 규정할 수 없습니다. 인간관계에는 필연적으로 애증과 질투라는 미묘한 감정이 동반되는 법입니다. 사랑하는 부부에게도 힘겨운 시간은 있습니다. 소설가인 산드라는 인생사의 복잡함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법정은 다릅니다. 부부간의 사소한 갈등은 확대 재생산됩니다. 산드라가 사뮈엘에게 한 모든 부정적 말과 행동은 살인에 대한 예비 행위가 됩니다.
산드라가 말해온 문학의 언어는 은유와 비유, 상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자전적 소설을 써온 산드라의 문학 세계에서 허구와 진실은 미묘하게 섞여 있습니다. 산드라에게는 그런 방식이 현실 세계를 가장 잘 반영한다고 믿습니다. 반면에 법정의 언어는 ‘사실’만을 다룹니다. 수치화하고 개량할 수 있는 것, 예와 아니오로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산드라의 언어를 밀어냅니다. 언어 밑에 숨어 있는 수많은 포괄적 의미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법정에서는 현실에서 떼어낸 아주 작은 부분만이 죄의 유무를 가늠합니다. 물론 법이란 상식이란 측면도 있기에 드러난 사소한 사실에만 지나치게 치중하는 검사의 태도가 빈축을 사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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