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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아트 Jul 24. 2024

낭만주의 음악과 회화 : 같은 뿌리, 다른 언어①

칼럼

이성에서 감정으로

“겨울에는 모든 사람이 갇혀 있지만, 봄에는 갇혀 있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만 갇혀 있는다.”(김영하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를 갖는다』中)


'창간기획, 해외미술관을 가다 2) 스페인프라도 미술관③'에서 화가 고야의 작품을 낭만주의 회화로 감상했다. 낭만주의에서 현대 회화가 출발했으며, 그 밑바탕에 자유로운 창조가 가능한 인간의 감정을 캔버스에 그려낸 점을 꼽았다.


인간의 감정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회화는 언어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회화는 형태와 색을 기본 언어로 해서 이루어진 결과물이다. 형태의 옳고 그름은 이성으로 즉각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합리성을 중시한 고전주의 회화에서는 색보다는 형(形), 데생을 우선시하였다. 그러나 색은 옳다, 그르다가 이성에 의해 명쾌히 설명되지 않는다. 철수와 영희는 선호하는 색이 다르며 같은 사람도 기분에 따라 파랑과 빨강에 주는 점수가 달라진다. 이 점에서 고전주의의 엄격한 이성을 벗어나서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화폭에 담고자 한 미술 사조가 낭만주의였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를 비교할 수 있는 대표적인 그림을 보도록 하자.


제리코의 <돌격하는 엽기병>(1812, 루브르박물관)과 다비드의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1801, 벨베데레 상궁, 비엔나).

<돌격하는 엽기병>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다비드의 그림은 나폴레옹이라는 유명인을 정말로 저 자세가 가능할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완벽한 포즈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제리코의 <돌격하는 엽기병>은 무명의 병사가 다급한 상황에서, 말과 정반대 시선으로 뒤를 쳐다보는 순간을 표현하고 있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이름 없는 병사를 역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말을 탄 인간이라는 주제는 같지만, 다비드가 위대한 영웅을 통한 애국심과 숭고한 이성을 보여주려 했다면, 제리코는 말 그대로 사느냐 죽느냐 하는 인간 본성에 충실하고 있다.


낭만주의 회화를 대표하는 장 그로의 <야파의 역병환자를 위문하는 나폴레옹>(루브르박물관)이 1804년에 그려졌고, 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루브르박물관)이 1818-1819년, 들라클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루브르박물관)은 1830년에 완성되었다.

<야파의 역병환자를 위문하는 나폴레옹>


<메두사의 뗏목>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이들 작품의 제작 시기에서 보이듯 낭만주의회화는 19세기 초중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퍼진 회화 사조이다.

이 같은 낭만주의 회화는 19세기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어제까지 “이성이 나의 모든 것이야”라 외치던 인간이 다음날, “아! 내가 감정이 있었지”하면서 “오늘부터는 눈에 보이는 대로, 느끼는 대로 살겠어!”하고 외치지는 않았을 거다.


그렇게 외치게 된 배경에는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에 의한 반동, 점차 발전하는 경제하부구조에 상응하는 새로운 사회계층의 등장이라는 거대한 시대적 서사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번 생각해 보자. 지금 21세기 우리들은 출근하면서 넷**스 영화를 ‘보고’, B*S의 노래를 ‘듣는다’.  즉 보고 듣는 것은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의 동시적 표현방식이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우리만 그랬을까? 200년전 19세기 우리 선배들도 그러지 않았을까? 그랬다. 지금 우리보다 더 확실하게 그들은 같은 언어로 같은 감정을 보고 들었다. 따라서 보는 것만으로는 그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이 무엇을 들었는지를 알아야 그들이 봤던 것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19세기 ‘보는’ 언어로 낭만주의 회화를 봤다면 ‘듣는’ 언어로 ‘낭만주의 음악’을 들어봐야 한다. 정확히 보기 위해서라도.


Daily Art는 회화에 국한된 매체가 아닌, 예술 전반을 아우른다는 점에서 회화와 함께 동시대인에게 사랑받은 예술 장르인 음악, 낭만주의 음악을 같이 즐겨봄으로써 좀 더 넓게 우리의 감정을 펼쳐내 보고자 한다.


소설가 김영하가 말한 것처럼 모두가 집에 갇혀 있음을 강요 당한 감정의 겨울이 아니라, 스스로 폭발하듯 확장하는 봄의 감정을 충분히 즐기기 위해서도 확장된 선택이 필요한 계절이다.


낭만주의 음악이 출발한 배경을 살펴보면, 주어를 ‘미술’에서 ‘음악’으로 바꾸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회화에서 낭만주의 이전에 고전주의가 있었던 것처럼 음악에서도 19세기 낭만주의 이전에 고전파 음악이 있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고전파의 대표격인 하이든이 1732년 태어났으므로 이때를 고전파의 시작으로, 베토벤 교향곡 제9번이 초연되는 1824년을 고전파의 끝으로 보기도 한다. (고전파 음악과 고전파 회화의 연관성은 다음 기회에 기사로 소개하겠다)


이후 낭만파라는 음악 사조가 탄생하는데, 시기적으로는 19세기부터 20세기 초 까지가 해당된다.(낭만주의 회화 시대와 유사한)  고전시대 음악은 형식이 중시된 반면, 낭만파 시대에는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이 중시됐다. 작곡가들은 자기 감정에 귀 기울이고 이를 표현하면서 표제음악(구체적인 표제나 주제가 드러나는 음악으로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같은)처럼 무언가를 묘사한 음악이 각광받았다.


고전파 음악과 낭만파 음악을 커피에 비유해 보자. 에스프레소처럼 커피 자체의 향과 맛에 집중한 것이 고전파라면, 카페라테 마끼아또처럼 커피에 다양한 재료를 더함으로써 바리스타의 창의력에 집중한 것을 낭만파 음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낭만주의 회화를 통해 현재의 ‘천재 화가’라는 개념이 생겨난 것처럼 낭만파 시대의 또 다른 특징은 ‘명곡’이 탄생했다는 점이다. 19세기 들어서 좋은 곡은 여러 번 연주되었고 작곡가가 사망한 과거 명곡이, 살아있는 명연주자에 의해 연주되기 시작한 것이다.(여기에는 피아노의 발전이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이제 작곡가들은 적더라도 영원히 남길 곡을 만들었고, 어떤 곡이 명작이고 누구의 연주가 좋은지에 대한 평론이 필요해졌다. 현대와 같은 작곡가와 연주가의 구분, 그리고 평론을 통한 명곡의 등장이 바로 낭만파 시대를 통해서 토대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모든 음악에 서정성과 정감이라는 특성만 있으면 낭만파 음악이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봉착할 수 있다. 서정성만으로 낭만파 음악을 정의한다면 시대와 작곡가를 불문하고 낭만파 음악은 언제나 존재할 수 있다는 모순에 빠질 수 있다.


우리가 낭만파 음악이라고 시대 구분하는 19세기 음악은 낭만파라는 어원에서도 볼 수 있듯이 문학적 내용을 배경으로 하는 특징이 있다. 고전주의 작곡가들이 순수한 음 자체에서 음악의 자료를 찾는 절대음악을 추구했다면, 낭만파시대에는 문학이나 미술 등 음악 외적인 자료에서 찾는 표제음악을 추구하였다.


낭만주의 화가 들라클루아의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1828, 루브르박물관)은 1821년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이 아시리아 왕 사루다나팔루스의 몰락을 주제로 한 시극을 썼는데 들라클루아가 이 시극에 감동을 받아 그린 것이다. 문학에서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낭만주의 회화 작품이다.

<사루다나팔루스의 죽음>


문학과 음악의 결합은 표제음악을 시도하게 하였고, 이에 따라 표제교향곡, 교향시(시적 내용이나 문학 작품에서 영향받은 관현악곡으로 4악장이 아닌 단악장으로 구성, 리스트의 <전주곡>은 Joseph Autran의 시를 배경으로 작곡) 또는 성격  작품들이 새롭게 나타났다.

리스트 <전주곡>

       

마음속에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주관적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 주관성을 특정한 보편성과 규범성을 통해서 수용한다. 주관성이 수용되는 방법은 주로 시대 배경에 따라 결정된다. 수용의 의미는 고정적이지 않으며 그 의미는 환경에 따라 변화한다. 이는 역으로, 환경이 유사하다면 미술이나 음악이라는 미적 가치를 표현하는 방식에 대해 어떤 것이 좋으냐는 우리의 질문에 대한 답이 유사하게 나올 수 있음을 뜻한다.


이 점에서 미술과 음악은 쾌(快)를 추구하는 인간이 던진 질문에 대한 다른 방식의 언어적 표현이며 동일한 시대 배경 하에서 낭만주의라는 같은 갈래에서 출발한 이유이기도 하다.


다음 편에서는 낭만파 음악의 스타 작곡가들을 통해서 이들의 질문에 대해 좀 더 가깝게 다가가 보려 한다.



https://www.d-art.co.kr/news/articleView.html?idxno=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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