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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아트 Jul 24. 2024

김홍도가 사진가였다면 골목 안 풍경을 찍었을 것이다

[서소문 밖 첫 동네]

김홍도가 사진가로 태어난다면 김기찬처럼 골목 안 풍경을 찍었을 것이다
출처 김기찬 사진집, 골목안 풍경

“중림동은 참으로 내 마음의 고향이었다. 처음 그 골목에 들어서던 날, 왁자지껄한 골목의 분위기는 내 어린 시절 골목길을 연상시켰고 나는 곧바로 내 사진의 테마는 골목 안 사람들의 애환, 표제는 골목 안 풍경, 이것을 곧 내 평생의 테마로 결정해 버렸다.”


1968년부터 2001년까지 중림동의 골목 안 풍경을 찍은 김기찬 사진작가의 말이다. 그의 사진집, <골목 안 풍경>은 6집까지 발간되었다. 사진집에는 자신이 평생의 테마로 설정한 중림동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애환이 풍속화처럼 펼쳐진다. 풍속화가 김홍도가 지금 시대에 사진가로 태어난다면 김기찬의 작품과 같은 사진을 찍었을 것이다. 그는 어떻게 사람들의 일상을 자연스럽게 담을 수 있었을까? 처음부터 카메라를 들이대지는 않았다고 한다. 카메라를 갖다 대면 누구나 긴장하기 마련이다. 그가 자연스러운 화면을 얻기까지는 수 년 간의 기다림이 필요했다. 늘 조심스러워했다. 그들을 찍기 위해 그들과 같아져야 했다. 그는 부지런히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농담하고 웃고 하면서 점차 그들과 동화되어 갔다. 만 2년이 되어서야 덩치 큰 그가 대문을 열고 들어가 카메라를 들이대도 사람들이 긴장하지 않았다. 그가 지나가면 기름 냄새 풍기며 부침개를 먹던 사람들이 ‘아직도 뭐 찍을게 있냐?’며 먹던 부침개도 나눠 주었고, 김치 부스러기에다 막걸릿잔을 기울이던 아저씨들이 잔을 내어 주기도 했다. 더 이상 그는 낯선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준 것은 삶의 공간만이 아니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그를 붙잡고 집안의 대소사를 의논했다. 장장 33년의 세월이다.

중림동 1978년. 출처 김기찬 사진집 골목안 풍경

그는 왜 중림동을 사랑한 것일까? 그의 집이 중림동일까? 그가 사는 곳이 중림동이라면 퇴근하면서 살짝 카메라를 댈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의 집은 사직동이다. 사직동은 그가 중림동을 다니기 전에 이미 망가지기 시작했다. 김현옥 서울 시장이 미친 듯이 추진한 개발의 신호탄이었다. 서울의 첫 지하 터널인 사직터널이 착공 되면서 그가 살던 사직동은 개발의 부작용을 톡톡히 치렀다. 추억의 상실이었다. 개발은 골목길이 없어지는 것을 의미했다. 골목길이 없어지자 함께 뛰놀던 친구들의 모습이 기억에서 사라졌다. 유년의 실종이다. 삶은 편해졌는데 뭔가 허전했다. 공동체의 해체였다. 밥 먹고 나면 골목에 나와 바람도 쐬고, 수다 떨어야 하는데 골목이 없어지니 만남이 줄었다. 아이들도 형편은 마찬가지, 딱지치기, 고무줄놀이 할 공간이 사라졌다. 서울은 이미 삭막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많던 골목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그가 중림동에서 발견한 것은 골목이었다. 중림동은 골목이 있으으로 공동체는 유지되었다. 사진 작업의 테마를 중림동에서 발견한 것이다.


“골목 안은 가난해 보였지만 사람 사는 냄새와 온기가 가득 차 있었다. 고향을 잊었던 나에겐 마음속에 그리던 어릴 적 아름다운 고향을 되찾은 기분이었다.”


중림동 1980년, 출처 김기찬 사진집 골목안 풍경

그가 처음부터 골목길을 찍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서소문에 있던 동양방송 카메라맨으로 사회성 있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 서울역을 찍었다. 청소하는 사람들, 물건을 나르는 지게꾼, 서울역에서 염천교까지 이어지는 행상하는 사람들을 찍다가 서울역에서 가까운, 그들이 사는 동네까지 따라온 곳이다.


중림동은 사대문과 가깝지만, 서울역 서쪽에 위치한 동네이다. 서울로 7017에 올라서면, 철길의 동쪽은 고층빌딩이 많은 반면 서쪽은 변변한 빌딩 하나 없는 낙후된 동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이곳은 서부 지역의 치열한 전투로 인해 많은 건물과 집들이 대파되었다. 전쟁 이후, 집 없는 사람들, 서울에서 오갈 곳 없는 사람들이 중림동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폭격으로 담벼락만 남은 곳에 시멘트를 바르고 유리로 창을 내었다. 기와가 없어 함석을 덧대어 지붕을 이었다. 가장 비친화적인 소재들이 온기가 가득해야 할 집의 재료가 되었다. 집과 집 사이에 공간이 생겼다. 비좁은 주택에서 할 수 없는 것을 집과 집 사이의 공간, 골목에서 하는 것이다. 집안은 답답하고 더운데 골목은 시원하다. 거기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 숙제하는 아이들, 동네 여인네들은 모여서 국수를 말아먹었다. 때로는 악다구니를 하며 험한 소리로 싸우기도 하지만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어울리는 공간이 되었다. 가난하지만 삭막하지 않은 공간, 비친화적인 공간의 골목이 온기 넘치는 공간으로 탄생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가족이며 형제였다. 아파트의 닫힌 공간, 너와 나만이 존재하고 우리가 없는 시대에서 소박한 골목은 사람 사이의 벽을 허물어 주었다. 삭막한 서울 생활에서 골목은 그들이 살아갈 힘의 원천이 되었다. 공동체의 발견이었다. 김기찬이 발견한 ‘골목 안’은 어떤 세상보다도 넓고 깊은 세계였다.

충정로 역 뒷편 중림동의 집들, 김기찬은 이런 집 골목의 정겨운 풍경을 사진으로 남겼다.

사진집을 들고 중림동을 돌았다. 사진에 포착된 장소가 남아있는지 비교해 보고 싶었다. 중림종합사회복지관에 호박마을 쉼터가 보인다. 복지관의 경비실을 마을 쉼터로 제공한 것이다. 이 마을의 애칭이 호박마을이다. 반찬거리가 없어 누구나 할 것 없이 호박을 심었다. 호박잎에 된장을 듬뿍 넣어 옹기종기 둘러 앉아 입을 크게 벌리고 먹었을 것이다. 사진 속에 등장하는 비슷한 집들이 모두 붉은 글씨로 ‘철거’라고 적혀 있다. 수년 전부터 추진한 재개발 사업이 지지부진하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사진 속에 등장하는 똑같은 집은 없다. 김기찬은 중림동 어디를 찍은 것인가? 그가 찍은 골목길은 이미 철거되어 아파트로 변한 것이다. 지하철 2호선 충정로역 아래, 삼성 사이버 빌리지로 변한 동네이다. 거대한 아파트 타운으로 바뀌었다. 아파트의 입주와 그가 마지막 작업을 한 시기와 겹친다. 그의 사진 속 주 무대는 아파트가 개발되기 전의 중림동 모습이었다. 거기까지였다. 중림동의 골목이 파괴되면서 더 이상 찍을 피사체들이 사라졌다. 골목이 없어졌고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더 많은 사람이 아파트에 입주했을 텐데 그가 찾는 사람들은 이제 없었다. 그는 아마도 골목을 찍을 때처럼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가 사진을 찍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골목 안 사람들은 대문의 빗장을 열어주었지만 아파트는 비밀번호를 모르면 자기 집도 들어갈 수 없는 구조가 되었다. 내 자신의 집도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들어갈 수 있는 꽉 막힌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우리는 편리함에 너무도 많은 것들을 내주었다. 골목이 상징하는 것은 함께 삶을 나누는 공동체의 모습이다. 도시화와 산업화로 폐쇄된 도시의 그림자가 성문 밖 첫 동네에도 드리워졌다. 이제 와서 김기찬의 사진이 주목 받고, 중림동을 그리워하는 것은 중림동에 골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골목에 온기 묻어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득, 사진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도 이 아파트에 입주했을까 궁금해진다.

철거될 날을 기다리는 골목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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